역사를 보다보면 당연히 그것은 진실이려니..하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다시 생각하면 대체 왜?? 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중 하나가 강화도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자주가던 역사 사이트에서도 강화도가 대체 왜 천혜의 요새인가요?
하는 식의 질문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강화도는 그 강력한 몽골을 막아냈던 요새이자
고려이후부터 왜적이 쳐들어오면 왕이 피난 가야할 1순위 중 하나로 꼽히던 장소인지라
우린 막연히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대에 강화도를 가보면 대체 왜 천혜의 요새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죠.
육지와의 거리는 기껏해야 김포에서 500미터에서 1킬로 남짓이라 수군이 뭘 전쟁을 하고 말고할 장소 자체가 없습니다.
500미터면 한강의 폭보다도 훨씬 좁은 정도로 그냥 배로 바다를 건너야할 정도의 거리일 뿐이죠.
게다가 그걸 건너고 나면 먼저 들어오는 건 평야에 가까운 땅입니다.
그 때문에 현대에 강화도를 가보면 막연히 천혜의 요새로 알고 있던 강화도의 방어력은 한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강화도의 모습은 조선 시대에 그 모습을 갖추어 나갑니다.
고려시대 때의 강화도는 현대와 모습이 많이 다른데 윗 그림에서 노란색으로 칠해진 부분이 고려 때의 강화도의 모습입니다.
현대처럼 해안선이 단조롭지 않았고 내륙의 상당수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군대를 이동시키려면 최소한의 땅이 필요한데 당시의 해안선 자체가 상당히 복잡했고 그나마도 대부분 언덕지형으로 되어 있는데다
고도 5미터 미만의 땅은 조수간만의 차로 바다에 잠겼다가 빠져나와 모두 갯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지와 연결된 수로가 겨울엔 얼긴 하지만 살얼음식으로 얼어서 그 위로 이동은 불가능하고,
배로 이동하려니 해안선은 너무 복잡하고 상륙할 지역의 상당수는 산지나 갯벌로 이루어져 있는데다가,
그 이외엔 성을 지어 방어 병력이 지키고 있으니 몽골군이 접했을 강화도란 바다 위에서 성을 공략하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지형이 13세기 이후부터 간척사업을 통해 조금씩 육지화되기 시작합니다.
강화도 천도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들어왔고 일순간 많은 이가 들어와 살아야 했기에 간척사업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조선시대에는 강화도는 풀이 좋아 목장사업을 하기 좋고 땅이 비옥하여 돈많은 사람들이 노리는 땅으로 유명했고,
조정에서도 주도적으로 간척사업을 진행했죠.
태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강화도 간척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고 비옥한 강화도의 농지와 목장으로 인한 세수는 늘었지만
그에대한 반대급부로 강화도의 방어력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습니다.
그 약해진 방어력만큼 강화도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했었다면 다행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움직임은 부족했지요.
그리고 병자년에 호란이 터지고 물론 김경징의 무능이 한몫하긴 했지만 강화도는 몽골 때처럼 외적을 막아내기에 한 없이 부족한 섬이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전투의 승패가 한두가지의 이유로 결정나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무능했던 지배층이 있었던 남한산성을 후금이 무력으로 뚫는 것은 끝내 실패하고,
강화도의 경우 점령에 성공한 것은 어쩌면 지배층의 무능보다는 섬 그 자체의 방어력의 정도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강화도가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던 까닭은 현대의 막연한 이미지처럼 역사적으로 강화도의 방어력이 증명되었었고,
수로를 통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다 최악의 경우에 북쪽으론 중국이 남쪽으론 호남으로 도망갈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군의 경우도 혹시 모를 난을 위해 본인이 피신할 장소를 물색할 때 나주나 안동 등이 후보지로 나왔지만
그래도 최우선으로 꼽았던 곳이 바로 이 강화도였고, 인조역시 남한산성으로 가기 전에 바로 이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던 것이었죠.
이후 과거의 일을 교훈삼아 강화도의 방비를 강화하지만 그 이후 맞이했던 전투는 병인양요였고
19세기 서양의 발전된 무기 앞에서 강화도는 그저 무기력한 섬일 뿐이었습니다.
강화도의 모습은 수백년에 걸쳐 그 모양이 변화하였고 변화한 만큼 섬의 방어력 역시 너무나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물론 좀 더 유능한 사람이 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겠지만,
병자호란 때의 강화도의 함락은 사람의 능력보다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결과에 더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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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이 바뀌어서 방어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없어진 건 아닙니다.
남한산성 공방전때 보여준 조선 중앙군의 전투력은 일단 합격선이었고 효종도 '장수가 문제지 병사가 문제는 아니었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군대의 절반만 강화도로 들어갔어도 여전히 난공불략의 요지가 됩니다.
이런 이유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명나라 장군 원숭환이 숭정제에게 처형당하고 그 휘하 장수들인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과 홍이포를 가지고 청나라에 투항했던게 더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강화도 상륙작전때 이들이 지휘를 했었는데 그들의 함선 건조 노하우와 홍이포 동원이 중요한 역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정묘호란때는 강화도를 함락시키지 못했다가 병자호란때는 성공한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