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야 나는 어기적 일어나는 게 주말 일과의 시작이었고, 그 시작의 일부는 할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쌀밥 한그릇이었다.
그렇게 밥 한그릇을 비우면 할머니는 드라마 재방과 낮잠으로, 나는 프로리그 시청으로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 끼니때가 되어서야 다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취직을 하고는 나의 주말은 초과근무와 각종 행사로 도배되었다. 월요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나는 주말에도 웬만하면 사무실에 나가야 했고,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행사들은 평일과 다름없이 하루를 밖에서 꼬박 채우게 했다. 할머니는 안그래도 적적한 평일의 일상을 주말까지 이어가야 했다. 가끔 오는 삼촌들과의 외식과 나들이도 당신께는 적잖이 공허했으리라.
"여기는 그런 일 별로 없는데 느그는 뭔 행사가 그리 많노?"
"할매가 몰라서 그렇지 여기도 행사 많거든~"
그 때는 몰랐다.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꼭 할애했어야 할 시간들이라는 것을.
'이번 일만 지나면 할머니 모시고 부산 한바퀴 돌고 와야겠다'
'이번 업무가 좀 적응되면 할머니랑 2박3일로 온천이나 갔다올까?'
하지만 나에게는 일이 우선이었고, 행사가 우선이었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선이었다. 할머니는 저 뒷전이었다.
#3.
그러던 할머니가 쓰러졌다.
콩팥이 안좋아 잠시 입원했다 퇴원한 토요일 어느날. 퇴원 직전 아침에 잠시 들렀던 병원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사무실에 나간다는 말에 "와 또 나가노?"라며 되묻던 나에게 "아몰라. 일이 많으니까 그렇지"라며 툴툴거렸다.
퇴원한 그 날 저녁, 할머니는 춥다며 이불을 덮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상해 보였지만 원인을 모르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다음날이 되니 상태가 더 심각했다. 급하게 옮긴 병원에서도 할머니의 추위는 계속됐지만 체온은 별 이상이 없었다. 병원측에서는 뇌수막염을 의심했지만,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다시 사무실로 나와야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나온 결과는 삼촌들에게서 카톡으로 받고서야 알았다.
"할머니 뇌출혈이란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그때서야 제대로 와닿았다. 급하게 달려간 울산대병원 중환자실.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코에 꽂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춥다는 말과 함께.
이 바보같은 할매는, 그 아픈 와중에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못지르고 끙끙 앓고 있었다. 무려 이틀을.
#4.
집에 돌아와 밤이 새도록 펑펑 울었다. 다 내가 잘못한거라고. 회사에서 갈굼받은 걸 할머니한테 모두 토해 낸, 내 잘못이라고. 도저히 스스로가 용서가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울부짖었다.
그 뒤로는 할머니 병간호를 위한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다만, 나는 거기서도 제 역할을 못했다. "너는 빠져라"라는 삼촌들의 역정 아닌 역정과, 밀리고 밀려버린 업무와, 스스로를 옥죄는 우울증 때문에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5.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나는 그동안 사무실을 반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우울증까지 달고 사는, 업무도 못하고 자기관리도 못하는 인간으로 반 낙인이 찍혀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자는 우울한 상황의 연속.
그러던 어제. 아침잠에 못이겨 헤매고 있는 나를 할머니가 깨웠다.
"배고파. 밥 좀 차려 줘."
깜짝 놀라며 깼다. 단 한 번도 나에게 해보지 못했던 말. 서른 여덟에 과부된 이후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말. 그 누구도 들어주지 못했던 말을, 여든 다섯 노구의 몸을 이끌고 내 방문을 힘겹게 열며 한 것이다.
겨우 밑반찬 몇 가지를 차리고 밥을 한 숟갈 뜨고, 그렇게 초라한 아침식사를 내놨다. "차렸다"고 하기에는 차마 민망한 식사를.
식사한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속으로 계속 울었다. 그깟 일이 뭐라고, 그깟 직장이 뭐라고 이다지도 나는 야속하게 굴었나.
#6.
오늘도 할머니는 외로이 혼자 집에 계신다. 아마, 내일 시설에 입소하면 더 외로우실게다. 내가 조금만 잘 했더라면, 내가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을 한꺼번에 겪고 나니 온 신경이 마비되는 느낌이다.
그 동안에 또 다른 이들에게 많은 폐를 끼쳤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무엇을 말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 말도 제대로 못하겠다. 내 업보다. 모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나? 아마도 그래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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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올린 글에 정성어린 답글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결국 제가 배부른 소리를 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다 들어보도, 모든 일들은 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라 생각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어쩌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아무튼, 제 일처럼 걱정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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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머니처럼 생각하던 친할머니가 어느날 뇌출혈로 다른사람이 되셨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전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모시고 다니고 밥도 많이 차려드렸고 해서 평소에 더 잘해드릴걸 하는 생각은 덜했습니다.
그래도 쓰러지시기 바로 전날 같이 간 절에서 좀 더 편히 모셨으면 그런일이 안일어났을까 하는 후회나 쓰러지시기 몇시간 전에 평소처럼 화장실 문을 안닫고 일을 보셔서 그 일에 대해 핀잔을 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는 못볼 할머니였다면 절대로 안그랬을텐데 하죠.
그 이후로 6개월간 전혀 다른사람이 되어 혈관성치매를 앓으시며 병원신세를 지시던 할머니는 초반에는 제가 가족이란건 아셨지만 후반부엔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셨습니다. 간병인 정도라고 생각하셨죠. 지금 어느 정도 상황이신진 모르지만 그래도 몸 가누는게 불편하신 정도고 정신은 맑으신 상태면 천운이라 여기시고 남은 시간 할머니와 화투도 치시고 티비도 같이 보시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보내세요.
같은 아픔을 겪어 본 사람으로써 힘내시라는 말 하기엔 너무 이 말이 가볍게 느껴지네요...
현직 작업치료사로서 뇌졸중하고는 직업적으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시설 입소는 개인적으로 집에 혼자 계시는것보단 훨씬 좋다고 봅니다. 외로움도 어느정도 해결할수 있고 관리도 어쨋든 해주니까요. 다만 한가지 그 시설에 자주 찾아가주는건 중요합니다.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이라도 찾아가 주는거랑 안찾아 가는건 천지차이며 환자의 남은 생의 삶의 질도 확 바꿔버릴수 있습니다.시설입소에 부정적인 생각이 있으신거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시설입소 자체는 오히려 레드스카이님이 잘하시는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