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타이즈에 숨쉴 곳 없는 마스크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총질 도중 떠벌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누구냐면, 데드풀이라고 하는데 원래 본명은 웨이드 윌슨이야, 내가 이 꼬라지로 다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 이게 싫다는 것도 아냐 멋지지 않냐? 아가리 싸물고 고막을 열어봐 킴 카다시안 둔부처럼 너어얿게, 난 퇴역군인이고 그냥 뒷돈 받고 잡일 해주는 양아치 인생인데 단골 바에서 쥑이는 여자 하나를 만났거든, 이 여자가 겁나 새끈한데 나랑 또 죽이 아주 착착 맞아요 앞으로든 뒤로든, 쿵덕쿵덕 찰떡궁합의 점성도를 날이면 날마다 몸으로 시험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할 줄 알았는데, 인생 못생긴 게 아주 오져 디진다 나는 이렇게 잘 빠지고 미남인데,말 하도 보니 혈압오르네, 내가 암에 걸렸어 암에, 그래 그거 비련의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그거 말야 질질 짜는 거, 도대체 햄보칼 수가 없어!! 생명보험도 없어서 10억도 못받아!! 그래서 이걸 치료하려고 누굴 따라갔는데 말야, 아 바빠 죽겠네. 탕탕탕 피융피융 우당탕탕탕
<데드풀>은 다른 히어로 영화들에 비해 더 막 나가는 구석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 비교는 “히어로 영화” 라는 장르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도 잘 쳐줘서 그렇지 그렇게 튄다고 보기도 어려워요. 키만 작지 잘 생기고 쉴 새 없이 떠벌거리는 <아이언맨>이 있고, 여기저기 깐죽 털면서 아크로바틱하게 노는 <스파이더맨>도 있고, 아예 멤버 전체가 허당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있지요. 잔인한 걸로 치면 이미 <블레이드>가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영화들에 비하면 영화 전체의 명랑하고 발칙한 색깔이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캐릭터만으로 뭔가를 강조하기에는 큰 차별점이 없다는 거죠.
영화는 지저분한 대사와 수위 높은 고어씬들로 개성을 확립하려고 합니다. 이는 곧 대사와 고어씬들을 제외하면 별 다른 특징이 없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렇다고 대사와 고어씬들이 대단한 유효타를 날리고 있지도 않습니다. 말도 많고 욕도 세고 잔인한데 그게 그렇게 웃기지가 않다는 거죠. 이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욕 하고 뻔뻔한 사람이 재미있을려면 욕하고 뻔뻔한 게 금기인 상황이 전제로 깔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출발부터 그 전제를 뒤집고 갑니다. 이 영화는 욕하고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구는 무대야, 라고 당연하게 여기니 대사나 고어씬의 파격이 급감해버립니다. 멍석을 깔고 노니까 기대치를 못따라가는 거죠. 데드풀에게는 모욕적일지 모르겠지만, <엑스맨 오리진: 울버린>에서의 웨이드 윌슨이 훨씬 더 재미있고 신납니다. 너스레를 떨 수 없는 진중한 분위기에서, 옆에 멀쩡한 캐릭터들이 계속 츳코미를 날리니까요. 그래서 타이즈 같은 거 없이도 해당 영화에서 웨이드 윌슨은 짧은 순간의 대사와 액션이 더 튈 수 있었던 거죠.
또 다른 이유는 대사의 자극이 약하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꾸준히 터집니다. 이런 자극더미에서 충격의 공백을 대사로 메꾸려하니 영화가 부실해집니다. (웨이드 윌슨의 맨 얼굴은 별로 혐오감을 주지도 못합니다) 피가 터지고 뭐가 터져나가는 데 아무리 더러운 욕을 한다 한들 그 충격이 얼마나 셀 수 있겠어요. 그래서 대사들만 주를 이루는 장면은 코메디도 파격도 별로 약빨이 듣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이건 제작비가 딸리는 데서 나온 궁여지책이긴 할 겁니다. 그렇다 쳐도, 이 영화의 액션도 별 다른 재미는 없습니다. 공중제비만 열심히 돌지 총과 칼을 이용한 데드풀의 액션은 어딘가 전형적입니다. <이퀼리브리엄> 정도는 아니어도 총과 칼을 같이 다루는 합이 좀 싱거워요. 그래서 이 영화의 대결들은 탈 히어로 영화를 자처하는 작품치고는 좀 기시감이 많이 들죠. 콜로서스와 투닥거리는 장면의 느낌으로 모든 액션이 괴상하게 흘러갔다면 어땠을까요. 액션 히어로라기보다는 덜 떨어지지만 치트키가 적용되어 있어서 악당 입장에서 처리하가기 곤란한 그런 느낌 말이죠. 신체 재생능력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부분은 아마 CG 처리 비용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캐릭터와 주제를 그려나가는 데서도 영화는 모범생 같습니다. 대사랑 고어를 제거해보면 이런 점은 더 명확해지죠. 데드풀이 싸우는 놈들은? 다 나쁜 놈입니다. 데드풀이 싸우는 이유는? 여자친구를 구하고 싶어서죠. 제 멋대로인척 하지만 결국 권선징악에 강자의 윤리에 얽매여 있는겁니다. 이 영화에서 무고한 피해자라고는 택시비 떼먹히는 인도 친구 뿐입니다. 차라리 무고한 피해자들이 생기고, 이를 수습하느라 주변 사람들이 욕하고 바쁘고 해야 데드풀의 무책임함이 좀 두드러질 수 있었을 거에요. 신호위반도 하고 클락션도 크게 울려대지만 데드풀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지는 못하는거죠. 결국 데드풀은 “멋있는” 캐릭터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해서 본격적으로 망가지질 못합니다. 중간에 실수도 하고 황당한 짓도 하지만 마지막은 성공하고, 해내고 마는 히어로로서의 숙명을 데드풀은 그대로 완수해내고 있습니다. 히어로 영화의 공식 그대로죠. 이 영화의 유머 카피인 “로맨스”도 좀 진지한 구석이 있어서 깬다기보다는 히어로 영화로서의 당위를 부여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맙니다.
이 영화는 돌파구가 있었습니다. 데드풀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격뿐 아니라 제4의 벽을 넘나드는 구조적 특징에 있죠. 이 부분을 잘 활용한다면 훨씬 더 자유분방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스튜어트? 매커보이?” 라며 자기가 속한 엑스맨 세계관의 허구를 까발리는 데드풀의 특징을 활용하는 거죠. 그런데 <데드풀>은 이 가능성을 독백과 방백으로 한계짓습니다. 그러니 영화가 별로 참신할 것도 없게 되죠. 대신 이런 건 어떨까요. 영화 도중 촬영 스텝과 싸운다거나, 라이언 레이놀즈를 옆에 두고 자기가 진짜 존재하는 캐릭터인 척 한다거나, 감독한테 한 컷 더 가자고 징징대거나, CG 팀한테 밉보여서 와이어가 다 보이거나, 스턴트맨이 액션씬을 찍는 동안 라이언 레이놀즈가 쉬는 장면이 카메라에 걸려 데드풀이 막 화낸다거나, 시나리오 작가를 협박해서 내용을 바꾸거나, 중간에 영화 장르가 애니메이션으로 바뀐 다거나… 이 영화는 히어로 무비라는 장르와, 영화 제작에 대한 메타 영화가 됐어야 합니다. ZAZ 사단의 못말리는… 시리츠처럼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면서 작품 전체를 혼란스럽게 휘저어놓았어야 했어요.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찔끔거릴 데 그쳐서 감칠맛만 납니다. 안티 히어로 영화를 표방하지만 결국 히어로 영화의 틀안에 머물러 있는 거죠.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만큼 뽑아낸 영화이긴 합니다. 라이언 레이놀즈라는 배우의 본래 기질과 캐릭터의 궁합이 제일 잘 맞아떨어지기도 하구요. 그러나 그 결과물이 최고라는 생각은 안듭니다. 결국은 히어로 영화의 구속을 벗어날 수 없던 작품이 되버렸어요. 속편에서는 히어로 영화의 고정관념을 장르 바깥에서부터 부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영화는 전위의 가능성이 아주 큰 실험소재니까요. 히어로 무비계의 우디 앨런이 되지 마라는 법도 없잖아요?
@ 전 그래도 최소한 1분 정도는 영화가 아예 만화책처럼 컷컷으로 넘어가는 연출이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2차원으로 세계를 뒤틀어버리는 장면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