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3/21 23:13:03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패망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왜구와의 일전, 해풍 전투




신우(辛禑) 4년(1378) 무오 4월, 왜적의 배가 착량(窄梁)에 많이 모여 승천부(昇天府) 로 들어와서 장차 서울을 침구(侵寇)하겠다고 성언(聲言)하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병위(兵衛)를 대궐 문에 배치하여 적군이 이르기를 기다리니, 성중(城中)이 흉흉(洶洶)하였다. 방리(坊里)의 군사로 하여금 성(城)에 올라 망보게 하고, 여러 군대에게 나누어 명령하여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나가서 둔치게 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에게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해풍군(海豐郡)에 진치게 하고,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적군이 이를 정탐해 알고서 최영의 군대만 부수게 되면 서울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에 여러 진[屯]을 지나오면서 이를 버리고 다투어 보지도 않고 해풍(海豐)으로 달려와서 바로 중군(中軍)을 향하였다. 최영은 말하기를,

“국가의 존속(存續)과 멸망은 이 한 싸움에 결정된다.”

하면서, 마침내 백연과 함께 전진하여 적을 쳤으나, 적군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날랜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가서 백연과 합세하여 쳐서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최영은 적군이 쓰러져 흔들림을 보고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곁에서 적군을 치니, 적군이 거의 다 죽었으며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 왜선이 착량(窄梁)에 크게 모여 승천부(昇天府)에 들어와서 말을 퍼뜨리기를, “장차 경성을 침략한다." 하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여 계엄을 내리고, 모든 군사를 나누어서 명하여 동ㆍ서강에 나가 주둔하게 하고, 호위 병졸을 궐문에 벌여 세워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니, 성 안이 흉흉하였다. 방리(坊里)의 군사를 시켜서 성에 올라 바라보게 하였다. 판삼사사 최영이 모든 군사를 거느려 해풍군(海豐郡)에 주둔하고, 찬성사 양백연을 부사로 삼았다. 적이 정탐하여 알고 생각하기를,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경성을 엿볼 수 있다." 하여, 우리 군사가 주둔한 여러 곳을 그대로 지나쳐서, 서로 겨루지 않고 해풍으로 달려들어 곧장 중군(中軍)으로 향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사직의 존망이 이 한 번 싸움에 결정된다." 하고, 드디어 양백연과 함께 진격하였다. 적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달아났다. 태조(太祖)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나가서 백연과 합력하여 쳐서 크게 깨뜨리니, 적이 쓸려 흩어지는 것을 최영이 보고, 휘하 군사를 거느려 나와서 옆에서 공격하여, 적이 거의 전멸하고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했다. 밤에 성 중에서 최영이 쫓겼다는 말을 듣고, 더욱 물끓듯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우(禑)가 나가 피난하려고 하자, 백관이 행장을 꾸리고 여러 겹으로 대궐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러 원수가 사람을 시켜 승전보를 드리니, 경성의 계엄을 풀고 백관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조정에서 최영의 공이라 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주었다. ─ 고려사절요


최영은 모든 군사들을 총지휘하여 해풍군(海豊郡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에 진을 치고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梁伯淵)을 부관으로 삼았다. 적들이 상황을 탐지한 후, 최영의 군대만 격파하면 경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기고 아군이 진 친 곳을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쳐 곧장 중군이 있는 해풍군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있다.”라고 다짐하고는 양백연과 함께 나아가서 적들을 공격하였다. 최영이 퇴각하자, 우리 태조(太祖)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양백연과 협공해 적을 대파했다. 적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최영이 부하들을 지휘해 측면에서 공격하니, 적들은 거의 다 죽고 잔당들만이 밤에 도망하였다. 밤새 도성에는 최영이 패주했다는 소문이 퍼져 인심이 더욱 흉흉해졌고 사람들은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우왕이 피난을 떠나려 하자, 백관(百官)들은 행장을 꾸린 채 궁문에 겹겹이 모여 왕을 기다렸다. 원수(元帥)들이 보낸 전령들이 전승을 보고하자 비로소 개경에는 삼엄한 경계가 풀렸으며 백관들이 모두 하례했다. 조정에서는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 고려사 최영


○ 왜적의 배가 착량(窄梁)에 대거 집결해 승천부(昇天府)를 침구하니 온 나라가 소란해졌는데 우리 태조가 양백연(梁伯淵)과 함께 공격해 적을 대파했다. ─ 고려사 1378년





대 왜구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해는 1377년이다. 이 1377년의 왜구들은 1380년의 함선 500여척 규모를 제외한 여타 왜구의 공세 중에 가장 압도적인 수준으로 공격해 왔는데, 총 7개의 집단으로 추정되는 왜구들이 32회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며, 54곳의 지역을 초토화 하면서 고려 전역을 유린했다. 특히 강화도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머물며 수도에 압박을 주는 왜구들의 기세 때문에 지방에 지원군을 보내는 일에도 차질이 생길 정도였다.



1378년은 그 전 해인 1377년에 비해 왜구들의 공세 규모는 약간 줄었으나, 위기로 따지자면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수도 개경에 압력을 가하던 왜구가, 실제로 개경에 대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1378년 4월, 왜구는 착량(窄梁) 어귀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착량은 강화도와 본토와의 사이 좁은 해협의 길목을 일컫는데, 따라서 이 착량 부근은 이미 왜구의 소굴이 된 강화도의 군사 세력들이 동진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착량은 진포대첩 이전 고려 수군이 그나마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기도 하였다. 착량 어귀를 넘어서는 순간, 어떤 일을 당할지 보증할 수 없던 상태였던 것이다. 1377년 3월 손광유(孫光裕)는 최영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착량 어귀를 넘어서다가 왜구에게 대패, 함선 50여척을 잃고 1,000여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 1378년의 왜구들은 착량 어귀로 대규모 함선을 불러모아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 지역에 상륙하여 고려 조정을 곧바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착량에 상륙한 왜구들은 현 개풍군인 해풍(海豊) 지역에 주둔하였다. 왜구가 해풍 지역을 위협한 적은 10년 이전인 1364년에 한번 있었는데,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열(邊安烈),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석문성(石文成)을 보내 대비하게 함으로서 이러한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 1364년의 왜구들은 고려의 세조 왕륭(王隆)의 영정을 뺴돌리는데 만족하고 후퇴했으나, 왜구 침입이 한층 격렬해진 1378년의 왜구들은 그렇게 녹록치 못했다. 왜구들은 수도 개경을 노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왜구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개경에 비상령이 내려진 기록과, 유언비어가 돌아 개경의 민심이 흉흉해진 기록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1378년 이전에 왜구가 ''직접적으로'' 개경을 노리겠다고 선언한 사례는 오직 1377년만이 있을 뿐이다. 이 당시 왜구들은 개경의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개경을 노리겠다는 거대한 계략을 꾸몄으나 사전에 분쇄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 개경에 대한 군사적 행동이 이루어진 사례는 이 1378년이 최초인 것이다.



http



왜구의 의도가 명확해짐에 따라 개경 역시 진동했다. 당시 판삼사였던 최영은 급박한 상황에서 소집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해풍으로 나아갔다. 당시 최영의 부장은 양백연(楊伯淵) 이었는데, 양백연은 교활하고 사치스러우며 재물을 탐한다는 악평을 받았지만 지휘관으로서는 1370년부터 왜구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여러차례 소규모 전과를 올리고 강화도의 왜구를 몰아낸 적이 있었던 검증된 장수였다. 



상황을 보면 당시 출정한 장수가 최영과 양백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동강과 서강에 군대를 배치했는데,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아도 ''군대를 나누어 배치했다'' 고 언급하고 있다(分命諸軍, 出屯東西江) 최영과 양백연은 중군(中軍)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 중군 외에 어느정도의 소규모 군사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왜구는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고는 최영의 중군만을 깨트린다면 그 외의 군사 세력은 더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주변의 다른 고려군을 무시하고 그대로 최영이 이끄는 중군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현재의 도로망으로 확인되는 개풍과 개성의 거리는 11.3km로, 당시의 도로 사정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보더라도 20km 정도의 거리 차이 만이 있었을 것이다. 군대의 이동 속도를 1일 30리 정도로만 보더라도 11km는 하루, 20km는 이틀이면 도달 할 수 있는 거리이며, 1일 30리는 최대한 늦게 본 이동 속도에 불과하니 실제적으로는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이다.



중군을 이끌고 있는 최영으로서는 왜구가 여타 군사 세력을 모조리 무시하고 자신에게 다가온다 하여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왜구는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기에, 여기서 더 물러난다면 개경은 곧바로 위협에 노출되었을 터이다.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은, 병력을 집결시킬 시간 역시 부족하다는 의미가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 당시 고려군은 나누어 주둔하고 있었으나, 왜구는 이러한 병력을 모조리 무시하고 최영의 중군을 공격했는데, 단순히 전투의 승패만을 따지자면 최영은 물러나서 여타 병력을 한 데 모아 결전을 치루는 것이 옳으며, 이러한 병력의 분산과 집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대 통솔의 중요한 요소로 일컫어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개경을 방비해야 하는 당시의 최영으로선 시간을 벌기 위해 교전을 회피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1375년의 홍산 전투 당시 지휘관으로는 최영 외에도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 등이 언급되었던 것에 비하여, 이 해풍 전투 당시 최영 외에 언급되는 지휘관은 최영의 부장으로 표현된 양백연 뿐이다. 수도를 위협하는 적군이 수도에서 15km 안팎의 거리에 머물며 교전을 치루려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태는 평범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도 최영이 급작스럽게 교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급작스럽게 교전을 해야만 하고, 만일 패배한다면 수도의 함락은 불을 보는 뻔한 상황. 사태가 이러하자 최영 역시 비장한 각오를 굳힐 수 밖에 없었다. 최영은 싸움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직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으로 인하여 걸정된다(社稷存亡 決此一戰)."











이후 1차 교전의 양상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간략하다. 적이 최영을 쫒아, 최영이 급히 물러났다는 것이다. (賊逐瑩, 瑩奔) 이 기록만 보아서는 교전이 시작하자마자 최영이 작전상 물러났는지, 혹은 최영이 치열한 교전 끝에 왜구의 기세에 못 이겨 잠시 군대를 뒤로 물렸는지 확실치 않다. 전자대로라면 이후의 상황은 모두 고려군의 작전대로이며, 후자의 경우라면 이는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우연의 승리다. 추정해보자면 적군이 최영을 쫒아다는 기록에서 보았을때, 최영의 군대가 조금 더 집중적인 공격을 당했고 이 때문에 괴멸을 피하기 위한 최영이 잠시 전장에서 물러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최영의 군대가 잠시 전장에서 이탈했지만, 현장에서는 양백연의 군대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최영의 후퇴가 의도적인 작전이 아니라 실제로 패퇴에 몰리지 않았나 싶은 부분인데, 모든 부대가 후퇴한다면 몰라도 일부 군대를 남겨두고 주력이 물러난다면 남은 부대는 괴멸의 위협에 놓이게 되고, 이러한 작전을 의도적으로 구사한 사례는 동서양의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시의 싸움은 밤이 아니라 낮 중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낮에 벌어진 싸움에서 최영이 물러났다는 소식은 반나절 거리에 있는 개경에 닿아, 밤중에 개경은 ''최영이 패배했다.'' 는 소문에 극도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우왕은 실제로 피난을 준비를 한 상태였으며, 여러 백관들도 행장을 꾸려 왕이 최종적으로 피난을 결정하고 이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급박한 순간에, 갑자기 제 3의 세력이 나타났다. 그 군대는 바로 이성계의 정예 기마 부대(精騎)였다.



http


1.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崔瑩)에게 명하여 날랜 군사[精兵]를 거느리고 안주(安州)로 빨리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指揮)하게 하고, 태조에게 명하여 동북면으로부터 날랜 기병[精騎] 1천 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2.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3. 적군이 최영을 쫓으니, 최영이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날랜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가서 백연과 합세하여 쳐서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최영은 적군이 쓰러져 흔들림을 보고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곁에서 적군을 치니, 적군이 거의 다 죽었으며 남은 무리는 밤에 도망하였다.

4.  태조는 장수와 군사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5.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기록에서 이성계가 자신의 정예 기병 부대를 동원한 사례는 상당히 자주 찾을 수 있다. 최유 - 덕흥군의 침입 당시 공민왕은 이성계에게 ''동북면의 정예 기병 1천여명을 동원하라." 고 직접적인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이성계 휘하 기마 부대는 고려에서도 이름난 수준이었다. 



이성계는 이 막강한 기마 부대를 이끌고 갑자기 전장에 나타나 왜구를 급습했다. 이성계의 군대는 어디서 갑자기 등장했을까? 최영의 후퇴가 작전이었다면 이는 준비되어 난데없이 튀어나온 기습일테지만, 만일 최영의 후퇴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면 이 부대는 최영이 이끌던 중군 외에 왜구가 무시하고 지나친 병력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즉 나누어져서 미처 중군에 소집되지 못했던 군대가, 전투 중간에 뒤늦게나마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군대가 정예 기마부대라는 점에서 다른 부대가 합류하지 못했는데 이성계의 군대만 중간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터이다.



아직 전장에 남아있던 양백연을 상대하던 왜구들은 난데없는 기습을 당하고, 이성계의 부대와 양백연의 부대가 힘을 합치기 시작하자(合擊)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전장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최영 역시 전장의 상황이 돌변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군대를 수습하여 다시 전장으로 복귀하였다. 양백연의 군대를 상대하고 이성계의 기습을 당했던 왜구들은 그대로 측면을 최영의 군대에게 무방비로 내주게 되었고, 이 공격을 당하자 전열도 완전히 붕괴하고 처절하게 패퇴하기 시작한다. 왜구는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남은 극소수의 왜구들은 밤이 되자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피난 준비를 하고 있던 고려 조정에서는 뒤늦게 이 승리의 소식이 알려졌고, 비로소 개경의 비상령은 해제되어 피난 예정도 없었던 것이 되었다. 만일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수도 함락은 확정적이었던 만큼, 이 승리는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이 전투에 있어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최영의 패퇴가 의도적이었는지, 갑작스러운 일이었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1차 사료에서의 묘사는 모두 ''왜구가 쫒자, 최영이 물러났다'' 는 동일한 언급이다. 국방군사연구소의 倭寇討伐史(1993.12) 등에서는 ''짐짓 패퇴하는 척하며'' 라는 식으로, 이를 의도적인 작전이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풍 전투에 관련된 기록이 너무 간략하여 발생하는 일이지만, 소위 말하는 것처럼 ''조선왕조에서 최영을 폄하하기 위하여'' 일부러 기록을 모호하게 작성했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 단편적인 해석일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를테면 최영의 홍산전투는 사서에서 최영 자신도 "적의 규모가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고 언급하고 있으며, 실제로 관련 현장을 답사한 한국방송대 이영 교수 등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는 판단을 내렸기에 아무리 전투의 규모를 크게 잡아도 천단위가 넘는 병력의 전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사서에서 묘사되는 홍산 전투는 그전까지 왜구와의 전쟁사 역사상의 기록들 중에서도 가장 장렬하고 세세한 묘사를 보이고 있는데, 전투의 규모로 치자면 1364년 무려 3천여명의 왜구를 물리친 김속명의 진해 전투, 1373년 1,000여명의 왜구를 몰살한 홍사우의 삼일포 전투 등이 홍산 전투보다 작은 승리라고 하기는 힘듬에도 불구하고 사서의 묘사는 차이가 있다. 이는 고려사 편찬자들에게도 최영의 군사적 위상이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이니 만큼, 사서 묘사의 간략함을 지적한다면 몰라도 단순히 ''최영을 폄하하기 위해'' 묘사를 간략하게 했다는 설명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해원맥
14/03/21 23:15
수정 아이콘
결국은 태조짱짱맨.. 으헝헝 ;
14/03/21 23:17
수정 아이콘
말이 좋아 왜구지 이건 뭐 전쟁의 횟수나 규모가....
싸가지
14/03/21 23:26
수정 아이콘
나라가 저 지경인데 어떻게 바로 10년 후에 요동을 칠 생각을 한거죠? 신기하네요.
14/03/21 23:55
수정 아이콘
정말이지 이 시기의 왜구들의 침입 양상을 보면 고려가 제대로 된 국가였나 싶습니다...
표절작곡가
14/03/21 23:56
수정 아이콘
선리플 차추천 후감상~^^
Grow랜서
14/03/22 00:04
수정 아이콘
일단추천 오늘도 흥미진진하네요 역사이야기는 언제봐도 잼나요
14/03/22 00:28
수정 아이콘
해풍과 개경의 위치면 지금으로 치면 서울과 부천시 광명시 정도의 거리밖에 안되는 거 아닌가요 헉..
바스테트
14/03/22 00:51
수정 아이콘
우왕은 진짜 불쌍한 임금인 거 같아요
외적으로는 왜구들에 의해 매년 고통받고 그 뒤로는 명나라가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내적으로는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유흥말곤 허락되는 게 없으니--;;;
사대부들 입장에서야 그 시대에 암군취급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따지고보면 참 불쌍합니다. 본인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나라안팎으로 다 빡센 상황에 죽어서는 신돈의 자식이라고 폄훼당하고...ㅠㅠ 뭐 그렇다고 우왕이 잘난 임금이란건 절대 아닙니다만 그냥 갑자기 불쌍해서...
iamhelene
14/03/22 01:17
수정 아이콘
이성계는 정말 무신이었나요,,
저 신경쓰여요
14/03/22 01:37
수정 아이콘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은 정말로 말 그대로 전쟁이었군요. 한 번 패배하면 사직이 무너질 수도 있는... 잘 봤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0609 [일반]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사 역사상 최악의 졸전들 [14] 신불해9159 14/03/22 9159 8
50604 [일반] 패망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왜구와의 일전, 해풍 전투 [10] 신불해7566 14/03/21 7566 16
50538 [일반] 위키피디아 페이지뷰순 한국&북한 유명인 랭킹 (웃으면서 봅시다!) [14] Ayew5180 14/03/19 5180 0
50514 [일반] [K리그 클래식] 2라운드 리뷰 [17] 잠잘까3252 14/03/17 3252 7
50493 [일반] 정도전 22화 후기 [71] 해원맥8939 14/03/17 8939 4
50483 [일반] 정도전 21화 (수정완료) 스포한가득! [51] 해원맥9989 14/03/15 9989 3
50380 [일반]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 조정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력은 어느정도 였을까? [36] 신불해11905 14/03/10 11905 11
50370 [일반] 베토벤 교향곡 no.5 '운명' 1악장 - 형식이란 것? [22] 표절작곡가5826 14/03/10 5826 8
50364 [일반] 정도전 20화 후기 [58] 해원맥8052 14/03/10 8052 5
50346 [일반] 정도전 19화 후기 [26] 해원맥6743 14/03/09 6743 1
50185 [일반] 드라마 '정도전'의 정도전vs정몽주 [18] 비연회상6202 14/03/02 6202 2
50183 [일반] 정도전 18화 후기 [86] 해원맥6604 14/03/02 6604 0
50164 [일반] 정도전 17화 후기 [48] 해원맥6302 14/03/01 6302 1
50029 [일반] 정도전 16화 후기 보고 [56] 해원맥6903 14/02/23 6903 0
50011 [일반] 정도전 15화 후기 보고 [60] 해원맥6345 14/02/22 6345 3
49414 [일반] 사회 고발이 아닌 가족영화. 그리고 기적. [17] 곰주3392 14/01/21 3392 7
48858 [일반] KBS 정도전 티저영상이 떴네요! [29] 착한아이9973 13/12/26 9973 0
47996 [일반] 슬램덩크 만화책에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은 선수들과 팀들... [72] Duvet40387 13/11/26 40387 0
47899 [일반] [영화] '반전' 제34회 청룡영화상 [31] HBKiD5631 13/11/22 5631 1
47675 [일반] 대하사극 정도전. [61] 펀치드렁크피지알8190 13/11/12 8190 4
47548 [일반] 청룡영화상 각 부문 후보가 발표됐습니다 [44] 타나토노트5610 13/11/07 5610 0
46349 [일반] 슈퍼스타K5 어떠신가요? [91] splendid.sj9565 13/09/07 9565 1
46337 [일반] 야구장 많이 가시나요? - 2013 직관기 [44] 베누캄프6543 13/09/06 654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