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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02 23:04:08
Name 비연회상
Subject [일반] 드라마 '정도전'의 정도전vs정몽주
요즘 매주 주말만 기다립니다. 매 회마다 역대급이라는 식상한 수식이 어색하지 않은 굉장한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는데, 극의 1/3 지점까지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데서 '그래 우리나라 사극 아직 안죽었구나'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경이감마저 드네요.

사실 극중에서 아직 정도전vs정몽주의 구도는 표면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심지어 위화도 회군 이후 새 왕을 세우는 시점까지도 말하자면 혁명동지였죠. 동문의 정을 개나 줘버리는 피터지는 쟁투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박영규의 이인임, 이성계의 유동근, 최영의 서인석 등, 가히 한국 연예계에서 본좌급이랄만한 중견 배우들이 포진하고 있는 탓에 정작 못지않게 중요 인물이랄 수 있는(심지어 한명은 타이틀 주인공) 정도전과 정몽주가 '묻힌다'는 악평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헌데 전 여론과는 달리 두 역으로 분한 조재현과 임호의 연기에 상당히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저같은 역사 문외한조차 알 정도로 두 사람의 정치적 지향은 알려져 있습니다. 양자가 모두 동문 가운데서도 손에 꼽는 뛰어난 유학자이면서 관료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정몽주가 구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지향했다면 정도전은 그 체제 자체를 부수고 새로운 틀을 직접 디자인하고픈 욕망이 컸죠. 결국 그 운명이 갈려 정몽주는 비참하게 참살되었고 정도전은 자기가 꿈꾸는 나라의 설계자로 짧게나마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한 사람에게 죽었으며, 왕조개창에 저항한 자는 신 왕조 사류들에게 수백년동안 대선배로 추앙받았고 왕조개창의 일등공신이었던 자는 수백년동안 (비록 그 자손들은 양반가로 살아남았지만) 역적의 오명을 씻지 못했죠.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한마디로 그의 연기가 이질적이라는 것이지만, 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더 풍채가 좋고 호걸의 느낌이 나는 배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도 어그로꾼(...)의 면모가 다분했던 풍운아 정도전을 묘사하자면 조재현같이 마르고 강퍅한 느낌의 배우가 적역일 수 있겠다 라고 수긍도 되네요.

비참한 구체제의 민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양지'의 죽음 이후 정도전이 "괴물을 죽이기 위해 괴물이 되겠다"라고 선언한 시점은 극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어찌보면 식상한 클리셰에 가까운 전개임에도 작가와 배우에게 감탄한 점은, 말처럼 정말 '괴물이 된' 주인공으로 밀고 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이전의 작품들은 대개 이 부분에서 실패하거나 외면했습니다. RPG 레벨업과 전직 개념에 가까운 애들 장난같은 노예추락 스토리따위가 아닌, 진짜 의미의 '웅심을 숨긴 전락'을 그려내는 것을 아예 포기하거나 어설프게 짓다 만 밥처럼 망쳤을 뿐이죠. 정도전의 작가는 우직하게 밀고나가고 있고, 배우 본인도 그 해석에 동의했다는 확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이제 겨우 1/3 지점을 지났을 뿐이니 조금 더 지켜봐야 확실해지겠습니다마는...

저는 정몽주 또한 이 작품에서 잘 살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그저 '참으로 맛이 있구나'를 연발하는 부드럽고 잘생긴 아저씨로 각인된 임호는 훌륭하게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밑밥까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작가이지만 정몽주에 대해서는 특별히 노골적인 대사를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장차 극 전개에서 '고려의 절대충신vs고려를 파괴하려는 강경 역신'의 평면적인 구도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미리 드러낸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럼에도 매우 인상적인 한 장면으로 어떤 미래를 암시하는데, 역모의 의심을 받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이성계의 막사로 어명을 가져온 정몽주는, 걱정하고 슬퍼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합니다. "가십시다 장군." 거기서 구구절절 국가에 대한 충성을 논하며 설득하거나 혹은 두려움에 떨거나, 이런저런 말은 없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가장 뛰어난 장수이고 나라의 운명을 책임질 인재이며 인품으로도 가까이 두고픈 벗이지만, 그는 어쨌든 어명으로 소환된 고려의 신하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차후의 살아날 궁리를 하고 계책을 내놓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단지, 충혈된 눈으로 이성계를 직시하며 '갑시다'라고 말할 뿐이지요.

정도전이 정몽주와 대립하는 장면은 제 기억으론 고작 한두번에 불과했고 스쳐 지나가는 식이었지만, 사실 갈등은 이미 잉태됐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아직 젊었던 시절 이 체제를 잘 개선해보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정도전은 정몽주와 모든 정견을 주고받으며 터놓는 사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교묘하게도 이 부분은 굳이 직접적으로 말다툼을 하는 등의 대립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서서히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데, 물론 약간의 의구심은 있습니다. 차후의 구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일파와 신왕조를 옹립하려는 일파간의 대립, 말하자면 정몽주vs정도전의 대결은 이 작품에서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을겁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처절하고 잔인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묘사되어야 마땅한데, 과연 이 부분에서도 작가는 우직하게 타협없이 밀고 나갈 수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 이렇습니다.

굉장히 숨가쁘게 달려온 정도전, 그런데 이제야 프롤로그가 끝났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인임의 퇴장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 정도전'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죠. 너무나 설렙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짧다'는 아쉬움 때문에 화가 날 지경인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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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레드
14/03/02 23:11
수정 아이콘
정말 리즈시절 나가수 보는 기분이 절로 듭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리즈급 배우들의 진정성이 담긴 연기!!
조재현씨의 연기도 훌륭하고 이미지 자체도 저는 좋다고 봅니다. 정도전이라는 아주 과격한 인물이랑 잘 어울린다고 봐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실 송강호씨가 정도전역을 맡았으면 어땠을라나 싶긴 했지만요 하하
저도 정말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14/03/02 23:26
수정 아이콘
크크크 나는 배우다 인가요? 박영규씨가 곧 명예의 전당에 오르시겠습니다 크
하카세
14/03/02 23:31
수정 아이콘
와 송강호씨면.. 진짜 잘어울렸을거 같네요.
레지엔
14/03/02 23:14
수정 아이콘
그렇죠 이제 시작이고 이제부터 진짜 평가가 시작될 겁니다. 근데 지금까지를 보면 임호씨는 합격점이라고 생각하는데(너무 젊어보이긴 하지만), 조재현씨는 당초의 우려가 있습니다. 깐깐해보이는 것도 어떤 어그로꾼(..)의 개념보다는 난장이라는 느낌이 들고, 반대로 변한 후의 능글맞아진 모습은 유학자의 느낌이 약한 것 같습니다. 특히 기록상의 정도전은 대의나 정치적 설계를 밀고 나가는 면은 강경하면서도 의외로 디테일을 허술한 측면이 보이는데 이 부분을 연기하기엔 조재현씨의 느낌이 좀...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4/03/02 23:29
수정 아이콘
저도 임호씨의 나이가 너무 젊어보이는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정몽주가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임명된시기가 1384년 정도전의 나이 43, 정몽주의 나이 47인데...
임호씨의 나이가 실제로 45이니 얼추 맞기는 한데...임호씨가 동안이라 너무 어려보이는군요...
개인적으로 임호씨의 역할에는 전광렬씨 정도가 했으면 외모나 실제 나이가 딱 맞았을것도 같습니다.
해원맥
14/03/02 23:15
수정 아이콘
1.이인임 하차하고 새로 등장이 확실시 되는 조준, 이숙번이 누가 나올지 궁금하군요
2. 신진사대부들은 "명분"을 중요시 하기는 하지만 뚜렷한 해법은 없는 .. 이상만을 원하고 구현하고자하는
그런 답답한 쪽으로 그려지고, 그 대표주자인 정몽주는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정몽주 vs 정도전의 언쟁 (닥치시게 포은!)
정몽주 vs 이방원 ( 숙부님께서는 아버님을 도성으로 데려오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으셨습니까?)
를 보건데 정몽주는 정몽주 나름 타협점을 찾을수 없는 고려의 충신 포지션이 아닐까합니다.
귤이씁니다SE
14/03/02 23:23
수정 아이콘
정도전과 정몽주가 부각되는것은 아무래도 위화도 회군 이후가 될거란 생각에 앞으로 정도전과 정몽주가 어떠한 모습으로 발전될지 궁금해 집니다. 정도전의 경우 어느정도 발전된 상황이고, 정몽주의 경우는.. 아마 위화도 회군 이후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리 예상해 봅니다.
14/03/02 23:25
수정 아이콘
조준만 잘 캐스팅한다면 조재현의 정도전이 좀 더 편해질거 같긴 한데 말이죠...남은은 포지션이 딱 정해진거 같고...
개인적으로는 이인임이 없어졌을때 정도전이 그 무게감을 다 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좀 확신이 안갑니다...
정몽주는 뭐 딱 그냥저냥...나중에 이성계를 잡겠다고 달려들다가 이방원에게 죽을때의 모습만 잘 살려줬으면 하는...
단지날드
14/03/02 23:34
수정 아이콘
저도 글쓴분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정도전과 정몽주맡은 두분다 연기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작가가 캐릭터도 잘만들고 있는거 같아요 앞으로 그 둘이 주역이 되었을때가 기대가 됩니다. 걱정은 크게 되지 않네요
Manchester United
14/03/02 23:48
수정 아이콘
영화배우를 캐스팅해서 정도전을 만든다면

이인임 - 최민식
최영 - 백윤식
이성계 - 정진영
정도전 - 김윤석
정몽주 - 한석규
이방원 - 이병헌
염흥방 - 박희순
임견미 - 박성웅
이지란 - 황정민


대충 이정도로 해서 한 번 보고싶네요.
14/03/03 01:18
수정 아이콘
이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보려면 영화표가 3만원정도하려나요 크크크
표절작곡가
14/03/03 03:55
수정 아이콘
임견미 - 박성웅이라니~~크크크

이성계 장군에게 "살려는 드릴께" 드립을 치는데.....
바스테트
14/03/02 23:49
수정 아이콘
작가가 조급하게 정도전과 정몽주를 밀어주지 않는 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극중에서는 아직 이인임의 시대인 만큼 이인임에게 충분히 포커스를 맞춰주고 서서히 정도전과 정몽주를 집중 부각시키겠죠.
적절한 판단 같아요 크

그건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조준,조민수,공양왕은 누구로 캐스팅할지도 궁금합니다.
(특히 조준과 공양왕이 사이가 매우 나빳다는데 어떻게 나타낼지 크크
몽키.D.루피
14/03/03 00:03
수정 아이콘
어제 방송분에서 흥미로운 씬이 있었죠. 이성계 집앞에서 이방원과 정몽주, 이방원과 정도전이 차례로 만납니다.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왜 대책도 없이 개성에 데려왔냐고 하고 나서 바로 뒤돌자마자 정도전을 만나서 정도전이 아버지 살릴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장면이죠. 이 세사람의 관계와 앞으로의 복선까지 한 씬에 넣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_ωφη_
14/03/03 00:06
수정 아이콘
그러고 보니 지금 이지란 역활 하시는분이 용의눈물에선 이숙번 역활을 했었네요
삼공파일
14/03/03 01:53
수정 아이콘
이질적이라는 게 딴 게 아니라 조재현 씨 말이 너무 빠르고 어조가 현대어 투에요. 임호 씨랑만 비교해도 임호 씨가 평소에 말할 때 그렇게 느리고 리드미컬하게 말할 리는 없잖아요? "허허 이 사람아~ 자네는~ 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끝이 오르락내리락 천천히 끝나서 옛 양반투입니다. 박영규 씨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말할 때에도 "~하세요~!"하고 높낮이가 있고요.

그런데 조재현 씨는 혼자 대사량도 가장 많은데 속사포랩을 쏟아내면서 끝을 스타카토처럼 끊어서 소위 말하는 서울 사투리를 쓸 때가 많습니다. 항상 조선 건국과 대업을 염두에 둔 진지하고 열정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은 잘 주는데 다른 연기자들보다 호흡이 빨라 이질감이 있는거죠.
긍정_감사_겸손
14/03/03 13:09
수정 아이콘
이인임 짱짱맨 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본인의 실력으로 살아남는 정치력!
14/03/03 21:43
수정 아이콘
전 임호씨 연기가 정도전 내에서도 손꼽을만하다고 보는데 의외네요. 선역과 정도야말로 정말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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