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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10 16:49:25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 조정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력은 어느정도 였을까?


2차 요동 원정은 여러가지 상황 상 고려가 한번의 원정에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을 뽑아내서 공격을 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이 병력은 전투병 38,830명 - 지원병 11,634명으로 도합 50,473명으로 호왈 10만을 일컫었으며, 군마는 21,682필에 해당했다. 이 병력은 당시 고려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규모였고, 이만한 병력이 원정군으로 빠져나간 이상 수도 개경의 방위력이 극도로 허약해졌을 것은 누구나 예상 할 수 있는 바이다.


○ 왜적이 초도(椒島 : 지금의 황해남도 과일군 초도)를 침구했다. 당시 개경의 장정들은 모두 군사로 징발되고 노약자들만 남아 있었는데 밤마다 여러 차례 봉화가 오르니 도성 안은 텅 비어 버렸으며 민심은 뒤숭숭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 우왕은 궁궐 창고의 금과 비단을 내어 군사 수 천여 명을 모았으나 죄다 창고의 노예와 시정잡배들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사 1388년의 이 기록들은 원정군으로 인하여 개경의 방위력이 허약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개경은 왜구의 위협에 노출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장병을 모집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와 조민수, 두 지휘관의 손아귀에 들어간 원정군 5만 이외에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거의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우왕이 평양에 머물면서 각 도 병사들의 징집을 독려해 압록강(鴨綠江)에 부교를 놓게 하면서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감독을 맡기는 한편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재산을 배편으로 서경에 운반해 놓고 군사들에게 줄 상금으로 쓰려했다. 또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로 징발하고 경기도(京畿道)의 군사를 추려서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진지를 구축해 왜적에 대비하게 했다. 


○ 봉천선도원수(奉天船都元帥)·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로 하여금 개경(開京)의 서강(西江)으로 돌아가 진지를 구축해 두고 왜적의 침구에 대비하게 했다. 


고려사의 기록을 확인하면, 우왕은 임견미와 염흥방의 몰수한 가산들과 전국의 승려들까지도 군사로 징발하여 원정을 준비하는 그 와중에서도, 경기도의 병력은 별도로 추려 동강과 서강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2차 요동 원정에 참여한 주요 원수들의 지역을 보도록 하자.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 심덕부(沈德符) 
양광도도원수(楊廣道都元帥) 왕안덕(王安德)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 정지(鄭地)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全羅道副元帥) 최운해(崔雲海) 
동북면부원수(東北面副元帥)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江原道副元帥) 구성로(具成老)



실제로 주요 지역인 서해도 도원수가 경기도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동 원정이 국운을 건 사업인 만큼 주요한 지역의 이름이 빠져있다는것은 요동 원정에 조차도 쏟아부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할 전력이 반드시 남아 있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러한 일은 수도 방위 임무 밖에 없을 것이다. 왜구는 1378년에 직접적으로 수도 개경을 노리고 진군하여 개경에서 고작 15km 안 팎까지 다가온적이 있으나 이성계 - 최영 - 양백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난 적이 있었으므로, 왜구의 개경 침공은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그렇다면 이 개경 방위군의 규모는 어느정도 였을까? 이는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하다. 


○ 왜적의 침구가 더욱 심해지자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을 한양(漢陽)으로 보내 세자와 왕비들을 경호하게 했다. 


○ 전라도 안렴사(安廉使) 유량(柳亮)으로부터 왜적이 배 80여 척을 진포(鎭浦)에 정박시켜 놓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로부터, 왜적이 40여 군(郡)을 침구했는데 현재 잔류 병력이 취약해 적들이 무인지경을 밟는 것같이 횡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급히 올라오자 원수(元帥) 도흥(都興)·김주(金湊)·조준(趙浚)·곽선(郭璇)·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 적을 방어하게 했다.



2차 요동 원정 중 당초에 우려되었던 요소 중에 하나인 왜구의 침공은 현실화 되었다. 당시 고려와 왜구가 전쟁을 벌인 것은 충정왕 연간 부터 시작되어 40여년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은 누구나 예상 할 수 있었고, 우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왕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나름의 전력을 남겨둔 것으로 보이는데, 왜구가 서남해안으로 침투하여 노략질을 벌이고 양광도에 병력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통해 보았을때 당시 지방에서는 원수들의 부재로 여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로 보이지만, 이후 중앙에서 원수들을 파견한 것으로 보면 개경에는 아직 약간의 군사력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정확한 숫자는 알기 힘들다. 그러나 이때 우왕은 도흥, 김주, 조준, 곽선, 김종연 등 도합 5명의 원수를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고려시대 말기에 1명의 원수가 일반적으로 거느린 병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이 역시 분명치 않으나, 이에 대하여 오종록은 2차 요동 원정 무렵 1명의 원수가 대략 1,300여명 가량을 이끌었다는 식으로 언급한 바가 있으며,(高麗後期의 軍事 指揮體系, 1991.9) 이상훈의 경우 황산전투 무렵에 원수들은 대략 1,000여명 가량을 이끌었을 것이라 언급한 바가 있다.(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2012) 또한 이상훈의 경우 1388년의 경우에는 1,600명에 달했을 것이라는 언급도 한 바가 있다.(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2012)


물론 원수들이 거느린 군대의 규모가 일괄적일것이라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당시 개경의 원수들이 이와 비슷한 규모의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면 다섯명의 원수가 거느렸던 병력은 5,000명에서 8,500여명 가량이 될 것이다. 설사 5,000여명 보다 적은 규모로 본다 하여도 최소한 수천 단위가 되었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 개경 방위 - 왜구 토벌 목적으로 이동한 병력 외에 다른 주요한 병력은 또 있었을까? 당시 개경에 원수들의 병력이 주둔하긴 했지만 위화도 회군이 벌어질 당시 우왕은 서경에 있었다. 국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왕비와 세자를 지키기 위해서만도 한명의 원수가 파견될 정도인데, 국왕 주변에 상당한 숫자의 병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기록상으로 원정군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확인 할 수 있는 세력은 다음과 같다.


○ 왜적의 침구가 더욱 심해지자 원수(元帥) 김입견(金立堅)을 한양(漢陽)으로 보내 세자와 왕비들을 경호하게 했다. 

○ 서북면 조전사(漕轉使) 최유경(崔有慶)이 회군 사실을 우왕에게 급히 보고했다.

○ 이성원수(泥城元帥) 홍인계(洪仁桂)와 강계원수(江界元帥) 이의(李薿)가 앞장서 요동(遼東) 땅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돌아오니 우왕이 기뻐하며 금으로 만든 정아(頂兒)와 무늬 놓은 고운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 양광도 안렴사(按廉使) 전리(田理)로부터, 왜적이 40여 군(郡)을 침구했는데 현재 잔류 병력이 취약해 적들이 무인지경을 밟는 것같이 횡행하고 있다는 보고가 급히 올라오자 원수(元帥) 도흥(都興)·김주(金湊)·조준(趙浚)·곽선(郭璇)·김종연(金宗衍) 등을 보내 적을 방어하게 했다.

○ 봉천선도원수(奉天船都元帥)·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이광보(李光甫)로 하여금 개경(開京)의 서강(西江)으로 돌아가 진지를 구축해 두고 왜적의 침구에 대비하게 했다.



이 가운데 홍인계와 이의는 위화도에서 머물고 있던 여타 병력과는 달리 별도의 선봉부대로서 요동 땅에 들어가 소규모 약탈을 하고 있던 참이었으며, 따라서 위화도에서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던 본진과는 여론에서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숫자가 500명에서 1,000여명만 된다고 해도, 개경에서 방어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원정군의 후방을 교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 다섯명의 원수가 남쪽으로 파견되었으며, 개경 주변에서는 이광보의 군사가 있었다. 서북면 조전원수 최유경도 원정군에 포함되지 않았던 상태였다.


또한 우왕은 위화도 회군 이전부터 왜구 대비 목적으로 계속해서 병력을 쥐어짜내 증강을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기록을 확인하자면 다음과 같다.


 ○ 우왕이 상호군(上護軍) 진여의(陳汝宜)를 전라도(全羅道)·양광도(楊廣道)로 보내 질병을 핑계로 요동정벌에 종군하지 않고서 자제나 노예를 대신 보낸 자들을 모조리 징발해 왜적을 방어하게 하는 한편 도피한 자들을 수색해 군법으로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


병력 징발은 원정을 위해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 당시의 원정은 핑계를 대고 원정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닥달하여 왜구에 대비하는 병력으로 삼는 한편 강도높은 징발을 통해 재산을 몰수한 상황이다. 물론 이후 왜구가 지방을 횡행하여 별도의 원수들이 토벌을 위해 파견을 나갔던 만큼, 원정을 위해 이미 병사들을 잔뜩 끌어모은 상황에서 이러한 징발이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을지, 과연 그럴듯한 숫자가 모이긴 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수백여명을 모을 수만 있다고 해도 당시 우왕의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고, 위화도 회군이 확인된 시점부터라면(시간의 여유만 주어졌다면) 어떻게든 더욱 강력한 규모로 징발이 이루어졌을 것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여기에 별도로 서해도 지방의 군사들을 포함시킨다면, 위화도 회군 당시 5만 원정군 외에 존재하는 별도의 군사 세력은 5,000명에서 최대 1만여명을 넘는 숫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우왕의 세력' 이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원정군의 승산에 이들이 발을 맞춘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더 할 필요도 없긴 하나, 만약 반대의 상황이 된다면 조금 다른 상황이 된다.



유사 이래 거의 모든 전장에서 공자보다는 수성하는 쪽이 병력 측면에서는 한결 덜 급한 여유 있는 상황이 되며, 또한 당초의 명분 역시 쿠데타의 기치를 세운 원정군보다는 국왕군 쪽에 있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이성계나 조민수는 유력한 사령관일 뿐이지 여타 원수들의 군주가 아니므로, 만일 조금이라도 전쟁이 장기화되는 모습이 보인다면 군대 내에서 그들의 입지도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우왕은 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회유 공작을 원정군에게 펴기도 하였다.



○ 우왕이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편에 장수들을 회유하는 글을 보냈다. 

“명령에 따라 출정했으면서 진군하라는 지시를 위반한데다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려하니 또한 이는 인륜을 어기는 짓이다. 이러한 불미스런 일이 일어난 것은 부족한 이 몸 때문이긴 하나 군신(君臣)간의 대의는 진실로 역사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원칙이니 글 읽기를 즐기는 경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강토를 어찌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논의했으며, 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어찌 감히 어기는가? 그대들이 최영을 지목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만, 최영이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경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 수고한 것도 또한 경들이 잘 아는 사실이다. 이 교서를 받아보는 즉시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고 개과천선하여 끝까지 함께 부귀를 보존할 것을 생각하라. 나는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 다시 설장수(楔長壽)를 군영으로 보내 장수들에게 술을 하사하는 한편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게 했으나 장수들은 도성 문 밖까지 진격해 진지를 구축했다.



우왕의 이러한 공작은 전쟁이 너무나 빨리 끝났으므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보름이나 한달 가량이도 전투가 지속된 와중이었다면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되었건 일단 상황을 길게 끌고 갈 수만 있다면 유리한 것은 국왕군 쪽이지 원정군 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계, 조민수는 어떻게 이런 모든 변수를 해결했을까? 내전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보자면, 기본적인 측면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진왜란 - 병자호란과 별 다를 것도 없다. 원정군은 국왕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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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군은 당초에 서경에서 출발했으며, 위화도까지 가는 데는 20일이 걸렸다. 이는 아무리 관대하게 봐도 빠르다고 할 수는 없는 속도인데, 출정 할 당시부터 최영이 여타 장수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으려 했을만큼 군대의 분위기가 뒤숭숭 했으니 놀라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회군이 일단 결정되자 같은 군대가 맡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데 20일이 걸렸던 수만 규모의 원정군은, 그 2배가 넘는 위화도 - 개경 루트는 오히려 그보다 절반은 빠른 속도로 이동했는데, 이는 400km를 10일만에 주파한 속도다. 이 군대의 회군 루트에 대동강, 압록강, 청천강, 예성강이라는 강이 네 개가 있으며, 당시에 이러한 강물이 불어있을 장마철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실로 엄청난 속도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선봉은 움직임이 빠른 경기병 부대로 보이는데, 기록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군대의 도착이 6월 1일, 실제 전투가 6월 3일에 벌어졌다는 점을 보자면 먼저 내달린 선발대가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렸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군대의 이동 속도가 이렇게 엄청났던 만큼, 우왕은 병력의 소집은 커녕 개경의 수비를 준비하기도 빠듯한 입장이었다. 5월 22일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우왕이 그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5월 24일 이었으며, 실제로 우왕이 개경으로 이동하던 시기는 5월 25일이었다. 5월 26일까지도 우왕은 평안도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 5월 28일 무렵에는 개경으로 이동하는 우왕에게 벌써 '회군하는 병력이 근처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6월 1일 무렵에 원정군이 개경 앞에 주둔한 것으로 보았을때 이 정보는 사실이었으며, 위화도에서 출발한 원정군이 개경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도 우왕은 아직 개경에 입성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우왕이 개경에 입성한 것은 5월 29일이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뒤에는 원정군이 개경 앞에 주둔하여 진영을 차렸고, 다시 이틀 뒤에는 본격적인 공격이 가해져 바로 그 날로 전투가 끝나고 말았다. 따라서 우왕과 최영에는 병력을 소집한다거나, 여타 원수들의 지원을 바란다거나, 조금 버티면서 이쪽의 명분을 이용한다거나 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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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프리프
14/03/10 16:53
수정 아이콘
근대 상황이 저리 막장인대 백전노장 최영은 왜 우왕대리고 몽진을 안갔을까요 이괄도 거의 2주만에 한양찍었는대 인조는 떠나버리고 없었는대 말이죠
anic4685
14/03/1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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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진갔다해도 남부에선 끌어올 병력이 없었지 않을까 싶기도...???(왜구가 그야말로 초토화시켰으니...)
신불해
14/03/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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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왕이 서경에서 개경으로 이동할 당시, 이미 그 주변까지 위화도에서 온 군대가 도달한 상황이었습니다. 개경을 버렸다 해도 남쪽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따라잡혔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이동속도였습니다. 우왕의 경우 인조 등과는 달리 처음부터 수도에서 이동한것이 아니라, 서경에서 수도로 이동하던 상황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마프리프
14/03/10 17:02
수정 아이콘
그래도 개경농성보다야 가능성있지않을까 한대요 명분도 너무 없는 반란이었고 개경이야 고려 500년동안 심심하면 털리던곳이라...
신불해
14/03/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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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기록으로는 남쪽으로 몽진은 커녕 개경에 입성하는 것 조차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우왕은 5월 28일에 지름길을 달려 이튼달이 되는 와중에 개경에 입성했는데, 이 당시에서조차도 워낙 급하게 도주하는 통에 우왕 주변에 겨우 50여명이 같이 따라올 수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였는데도 불과 이틀 정도 사이에 원정군이 개경에 도착했으니, 설사 도주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저항 세력을 뭉치게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anic4685
14/03/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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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급 도주스킬이 있다해도...남부에서 끌어올 병력이 없을거같다 뭐 이거죠...(부산에서 한양까지 20일만에 작살났는데 이미 날라버린...선조수준의 도망능력은...수준급 아닙니까?)
꽃보다할배
14/03/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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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인조 말고 다른 변수가 없는데 (있다면 소현세자 정도? 오자마자 독살됫죠) 고려는 이미 그무렵에 우왕보다 이성계의 명망이 더 두터웠던 것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왜군보다 이순신을 더 싫어한 이유랑 비슷하다고 봅니다.
꽃보다할배
14/03/1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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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원정군에 최영을 대장군으로 보냈으면 역사가 어떻게 됫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우왕은 알고보면 이인임이 아버지가 아니라 최영이 아버지인듯...그리고 생각보다 멍청한 왕은 절대 아니구요. 드라마에선 멍청하게 나오지만...단지 힘이 없었을뿐이라고 변호하고 싶네요.
Starlight
14/03/1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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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들이라고 무조건 바보/멍청이는 아니죠.
최선을 다해도 그 결과가 최악인 경우도 많고요.
꽃보다할배
14/03/1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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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드라마나 역사에는 우왕을 너무 멍청이로 묘사하고 있다보니...나름대로 변을 했습니다. 멍청하기보단 힘이 없었노라라고...그리고 설마 우왕이 정말 신돈의 아들이었을까요. 승자의 논리일 뿐이죠.
공안9과
14/03/1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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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댓글에서 본 건데, 실제로는 우왕이 이인임의 여노비에 꽂혀서 이인임 집에 들락날락 거리자 이인임이 아예 집을 내줬고, 감동한 우왕이 그 때부터 아버지라고 불렀다더군요.;;
GreeNSmufF
14/03/10 17:35
수정 아이콘
이성계대신 최영이 갔다면 이성계가 개경에 남아야하는데 이러나 저러나 우왕에게는 딜레마였을것입니다.
꽃보다할배
14/03/10 17:39
수정 아이콘
원명교체기를 생각하면 일단 우왕의 뻘짓거리임에는 틀림없으나 보낸다면 둘다 가는게 맞지 않았나 싶어서요 구지 이성계를 남겼다면 반란이 오히려 어렵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최영이 휘몰고 돌아오면 이성계는 사형 크리이니까요
14/03/1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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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역시 왕이 시해되는게 가장 두려웠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바스테트
14/03/10 18:15
수정 아이콘
최영을 자기 곁에 냅두면 원정군총사령관임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지 않게 한건 본인 신변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괜히 최영의 딸과 결혼해서 장인어른으로 삼은 게 아니었는데.......역사는..... 크...결국 그 한수가 최악의 한수가 되어버렸죠
내일은
14/03/10 17:22
수정 아이콘
일단 직업군인에 가까운 주력군은 이성계에 다 딸려보냈을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각 군현의 병사들이야 대개 원래 농민이었을테니 요동 치라고 보낸 병사들과 질적 차이가 엄청 컸을 겁니다.
남쪽으로 어떻게 피난간다고 해도 이미 왜구 때문에 피폐해져있기도 하고 고려가 조선만큼 중앙의 지방 지배가 강한 나라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근왕 한다고 의병 끌어모아 왕에게 달려올 사대부들의 나라가 아니니...
흰호랑이
14/03/10 17:30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이 돌아오셨다!!

좋은 글 앞으로도 많이 부탁드립니다 ^^!
불굴의토스
14/03/10 17:40
수정 아이콘
궁금한건데 저렇게까지 무리하게 원정을 간 이유는 뭔가요??

당시 이성계 충성심은 전혀 의심받지 않았던 건가요?

최영이 마치 홍명보 '내가 대신 군대간다' 이런 식으로 보증했나요?
신불해
14/03/10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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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군의 분위기는 출정 할 당시부터 최영이 장수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으려고 했을 정도로 뒤숭숭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성계 한 사람의 의지로 5만 군대가 방향을 바꿨다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여타 무장들도 원정에 대하여 회의적인 편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합니다.
14/03/10 17:42
수정 아이콘
반란인걸 각오하고서도 그런 강행군을 수행한 장졸들을 생각하면 이성계 세력 뿐 아니라 고려군 내에 전반적으로 이성계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군요...
Siriuslee
14/03/10 17:52
수정 아이콘
하시바 히데요시의 쥬고쿠 대반전은 대략 180km 를 9일만에 [걸어서] 회군한 속도였는데,(단순 거리로 따지기 뭐한 대부분 일본 지형이 그렇지만, 진군하기 별로 좋지 않은 길입니다.) 대략 1일 20km 진군속도였죠.
평균 1일 16km 였다는 중근대 시대의 평균 진군속도에 비교하면 무진장 빠른것이기도 한 이 회군으로 일본전국의 패권을 이어 받았죠.
(제 개인적으로는 회군 속도보다는 회군을 결정하고 실행을 한 결단력이 더 빛나는 일이라고 봅니다.)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대략갸 230km 이고, 이걸 19일 걸렸다는건, 1일 12km 속도면 느리다고 할 수는 없는 속도입니다.
그런데 회군할때는.. 사냥까지 하면서 [천천히] 회군했다는 속도는??

대략 400km를 9일만에 주파!
정말 후덜덜한 진군 속도군요.
꽃보다할배
14/03/10 18:01
수정 아이콘
애초에 위화도에서 이미 역성 혁명은 설득이 끝났다는걸로 보입니다. 그냥 정벌 못하겟으니 돌아오겠소라는 수준이 아니죠.
그러고 보면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조 수양대군을 보면 결의를 하면 시행이 신속하다라는 공통점이 있네요. 피는 못속이나봅니다.
낭만토스
14/03/10 18:00
수정 아이콘
상황이 저런데 굳이 원정을...
꽃보다할배
14/03/10 18:03
수정 아이콘
원리원칙의 최영과 공민왕의 아들 우왕이 합작하여 벌린 뻘짓이죠. 물론 성공했다면 우왕의 입지가...원명교체기와 내부 단속을 너무 우습게 본 댓가이긴 합니다.
be manner player
14/03/1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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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때 간도에 관리 보내면서 집적?대는 것도 그렇고 이 경우도 그렇고
말년에 남의 땅 욕심 내는 거보다는 내치부터 잘 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키스도사
14/03/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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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때 요동성을 한먹 먹고 왔는데도 유지 못했던 걸 경험 해보고도

요동 정벌을 재차 감행한건 제정신이 아니었죠.
석신국자
14/03/10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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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이 5만인데 군마가 2만이면 후덜덜한 병력이네요
회군속도가 빠를수 밖에 없네요
14/03/1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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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엔하위키 위화도회군 항목을 신불해님이 작성하셨나요? 비슷한 듯 싶어서요.
신불해
14/03/1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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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했습니다.
14/03/1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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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러셨군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견우야
14/03/1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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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군부를 이성계가 장악했다고 보는게 맞는것 일까요? 궁금하군요,,,
쉽게말해 이성계가 5만의 군대를 조직적으로 움직일수 있는 힘을 가졌는지가 핵심이겠군요,,,
꽃보다할배
14/03/1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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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지식에서 군부는 최영이 오랫동안 장악했고 당시 포지션만 봐도 이성계는 뛰어난 무장이자 최영의 조력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구지 말하면 이순신이 이성계고 권율이 최영이다 정도로 보시면 더 맞을 듯 합니다.
단지 최영은 구 고려를 옹호하는 입장이고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들의 추대를 받던 입장이다보니 명을 치는게 옳지 않다는 대세에 힘입어 거꾸로 역성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죠.
견우야
14/03/1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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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궁금증이 그렇다면..
이성계가 이끈 5만에 병력중에는 최영을 따르는 충복들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 충복들이 이끄는 병력도 적어도 2만~3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완전 개인생각 ..추측)해 봅니다. (좋은 지식 있음 알려주십시요.)
그리고 그 충복들은 이성계를 감시하는 역활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 당시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권력다툼은 분명 존재 하고 있는상황에서..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 군부핵심 '이성계'에게 고려군대 핵심전력을 준 상황도 이해가 떨어지고

만약 주었을 때..

'권문세족'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잇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한 것인지?

알고잇는 지식이 부족하여 물어봅니다.
꽃보다할배
14/03/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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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실 더 복잡한데 이인임 등이 거의 고려의 마지막 권문세족이라고 봤을때 우왕이 왕권 강화를 위하여 전부 참형에 처하고 재산을 적몰한 시점부터는 이미 신진 사대부들이 전면에 대세로 나섰습니다.
군부는 이미 전공이 많은 이성계 일파가 다수였고, 우왕 입장에서는 왕권 강화를 성공리에 했다고 생각했지만 오판한 것이 신진 사대부들이 기존의 고려의 문벌 귀족에 환멸이 나 있던 상황이었죠. 원명 교체기라는 것도 신진사대부에게 힘을 실어주었구요.
거기서 우직한 무장인 최영이 결정적인 오판을 한게 본인처럼 다수의 무장들이 고려를 위해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구요.
아마 이번~다음달에 걸쳐서 위화도 화군이 정도전에서 방영될텐데 그 복잡한 심리 내면을 어찌 그려낼지가 기대됩니다.
견우야
14/03/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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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참으로 복잡한 상황이군요..
신진사대부들의 성장이 왕권의 강화와 관련되었다면. 그 성과는 어느정도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당시 신진사대부 '친명정책' vs 권문세족 '친원정책' 사이에서 마지막 순간 결정을 내려야 했던

'우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키운 '신진사대부'의 정책을 선택하지 않고 '권문세족'의 정책을 결정한것이...

그 때 당시 두집단의 최대 권력다툼에서 '신진사대부'가 밀려난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것인가요?
꽃보다할배
14/03/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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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죠. 공민왕 이후로 이미 친원은 대세에서 밀려났구요. 우왕은 남은 난신적자를 처분한다는 명분으로 이인임 염흥방 등의 재산을 적몰하죠.
오히려 신진사대부에 기대려고 했던건 우왕입니다. 단지 신진사대부가 이미 고려라는 나라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시점이고 왕권 교체에 대한 희망을 원명교체기를 통해 가속화한 것이죠. 성리학의 나라...정도전부터 당대 석학이라면 당연히 한족의 성리학을 꿈꿔왔고 그 이상의 실현을 이성계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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