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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4/18 14:55:37
Name sungsik
Subject [일반] [역사]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는 정말 제갈량까일까?


삼국지 연의가 아닌 역사서인 삼국지 저자 진수를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진수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진수는 제갈량에게 적대적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제갈량에 대해 객관적인 기술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전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생각합니다.
진수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벌을 받은 적은 있지만, 이건 머리카락을 자르는 형벌이었고 크다면 크지만 작으면 작은 형벌입니다.
그렇다하여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정말 객관적으로 기술했느냐.
한다면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유는 진수가 제갈량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입니다.
제갈량과 수년간 적대했던 사마의의 경우는 진황제 사마염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정사 삼국지는 사마염의 명령으로 진수가 편찬한 기록물이고요.
당연히 제갈량과 관련된 전쟁에 관한 부분은 노골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취사선택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 오히려 진수가 제갈량을 굉장히 흠모했다 생각합니다.
그런 그의 마음은 진수가 제갈량평전을 엮어 사마염에게 진상하며 올린 상소에서 잘 나타나는데요.
전문을 아래에 실어보겠습니다. 너무 길다 생각하면 굵은 글씨만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
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
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
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가서, 
몸소 밭갈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
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
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
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
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
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군대,군
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법과 교령)을 엄명히 해 상벌
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 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천하)를 진탕(震蕩-뒤흔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
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군사를 다스림.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기이한 모략)
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
므로, 이 때문에 여러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
(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
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
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시경 감당편)에
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
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문장,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여러 번 반
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순임금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
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
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문장)에 드러
나 족히 그 의리(意理-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
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 죄
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

제갈량이 기모나 장략이 부족하다고 까는 거 같은데...
사실 군사 수가 부족하고 공격과 수비가 다르기에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하고 관중이 성보를 천거한 것처럼
인간 모두가 모든 재능을 다 가질 수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이미 제갈량의 능력은 관중과 소하와 견줄말한데 단지 그와 짝을 맞출 인물을 찾지 못해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 뿐이다...라고 사마염 할아버지와 싸운 제갈량을 이런식으로 교묘하게 빠는 능력을 보세요.
이건 비단 제갈량이 한신이나 성보같은 인물만 있었어도 사마의 따위는 그냥 좁밥이었음.과 같은 느낌.

제갈량의 문체를 까는 것까지 인정하지 못해 변명하는 저 깊은 빠심까지....

개인적으로 진수야말로 제갈량 빠에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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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13/04/18 14:57
수정 아이콘
빠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고 악성제갈빠죠.
자기네 나라를 미친 듯이 엿을 먹였는데 '그런거 필요 없고 제갈량 킹왕짱' 이라니..
펠릭스
13/04/18 14:58
수정 아이콘
오히려 열렬한 제갈량빠였지요.

사실 진수 삼국지에서 제일 높이 보는 인물이 제갈량이지 않을까요.
Colossus
13/04/18 15:03
수정 아이콘
제갈량 때문에 골머리 꽤나 썩었을 사마의도 제갈량이 천하의 기재임을 인정했죠. '적이지만 훌륭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인물입니다.
안산드레아스
13/04/18 15:12
수정 아이콘
역시나 제갈승상이 전쟁까지 잘했다면 그야말로 킹왕짱 본좌라는 해석이 틀린게 아닙니다
역사가들도 그리 해석하더라구요
물론 제갈승상이 군재도 부족하지 않지만요
후추통
13/04/18 15:16
수정 아이콘
배송지는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에게 곤형(머리칼을 밀어버리는 형벌)을 주었고, 거기에 앙심을 품어 제갈량뿐만 아니라 제갈첨까지 악평했다고 주를 달아놓죠. 하지만 진수와 동시대나 후시대 사람들의 평가는 제갈량을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뭐 제갈량전에도 악평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제갈첨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갈첨의 것이라고 했다라는 말로 악평을 달아놔서 제갈첨하고 사이가 안좋다 라는 말도 있는데다 정의,정이 형제의 후손들에게 자신에게 돈을 주면 정의와 정이를 좋게 써주겠다고 제의했다가 거절당하니 박하게 썼다라지를 않나...뭐 근데 정의와 정이 에피소드는 그 일족이 조비에 의해 몽땅 죽어서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만...

뭐 한번 더 말하긴 합니다만 진수=제갈량까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사람은 다름아닌 "이 문 열"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구절은 없던데 하시면.....이문열이 평역한(이라 쓰고 멋대로 휘갈겼다라고 읽는)삼국지는 제가 아는 것만 십여차례가 넘게 개정을 하죠. 그러고도 안고친데가 숱해요...

진식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진식은 처형당했지 곤형을 받은 적이 없고, 진수전에는 아버지의 상중에 약을 먹었다가 지탄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인간실격
13/04/18 22:16
수정 아이콘
삼국지쪽에서 이문열똥이 참 크긴 큰가 보네요..볼때는 재밌던데쩝
영웅과몽상가
13/04/18 15:56
수정 아이콘
진수는 제갈량까는 아니라고 봅니다.
제갈량에 대해서 더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레지엔
13/04/18 16:07
수정 아이콘
요새도 진수보고 제갈량까라고 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리메
13/04/18 16:15
수정 아이콘
머리카락이 아니고 요참(허리를 자르는 형) 아닌가요? 그야말로 정말 능지처참만큼이나 괴롭게 죽는 형벌일텐데...무엇이 정답인가요?
세츠나
13/04/18 16:19
수정 아이콘
진수만 제갈빠인게 아니라 사마씨들이 오히려 제갈빠였을 것 같기도...조상의 최고 적수인데 까면 이기지 못했던 조상까지 까는게 되니...
오히려 제갈량을 띄워줄수록 진수를 좋게봤을 것 같군요. 이렇게 뛰어난 인물이지만 천시를 얻지 못했고 우리 대진은 천시를 얻은 나라다 하는 식으로...
13/04/18 16:38
수정 아이콘
사마씨들 입장에서는 '우리 조상님이 그 무시무시한 항우를 꺾은 유방이거든!' 의 한나라 컨셉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게 아닌가 싶죠.
뭐 제갈량이나 항우나 희대의 먼치킨이었다는 건 맞는 듯 합니다만.
13/04/18 16:47
수정 아이콘
일종의 사마의 쉴드죠.
우리 할배가 수비만 치중한건 상대가
제갈량이니깐
어느멋진날
13/04/18 17:16
수정 아이콘
당대 장군들에게도 물론이거니와 후대까지도 수비만 했다고 욕을 먹는 사마의니 상대가 제갈량이었다는걸 부각시켜야되긴 했겠죠.
Je ne sais quoi
13/04/18 16:3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재밋네요
13/04/18 17:23
수정 아이콘
이게다 이문열 때문...

진수 본인은 제갈량빠에 가깝죠.
13/04/18 17:40
수정 아이콘
재밌는글 감사하고 저도 동감합니다.
진수는 촉빠에 가깝죠.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출신지역 때문에라도 그럴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도 경주출신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신라에 대해 우호적일테고 이북출신사람이면 고구려에,호남출신이라면 백제에 대해 더 우호적일테니까요.
진수가 규모면에서 위의 수분의 일도 안되는 촉의 인물들을 상당한 비중으로 기록했던게 후대에 촉한정통론이 나올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싶습니다.
13/04/18 17:45
수정 아이콘
오히려 위촉오에서 가장 기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촉에 관련된 기록입니다. 기록이 너무 많이 유실되어 기록하고 싶어도 못하는 실정이었죠.
촉 출신이니 촉에 대해 우호적일 순 있어도 비중의 정도에선 촉은 오히려 상당한 불리함을 가졌고 그래서 기록도 미미한 편입니다.

촉한 정통론이 나올 수 있던 밑거름은 정사 삼국지보단 한진춘추나 조운 별전 등,
다른 기타 기록에 의해 만들어졌다 생각합니다.
13/04/18 17:43
수정 아이콘
진성 제갈량까는 형주 지원을 제대로 안했다는 것을 근거로 관우모살을 주장했던 어떤 분 아닌가요. 그 사람이 이문열인지 다른 사람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그렇습니다.
13/04/18 17:47
수정 아이콘
고우영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건 그냥 소설 내용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각색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걸 사실인양 받아들인 독자 책임이 오히려 큰 것이지요.

정사 들먹이며 이것이 사실인마냥 이야기한 이문열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순 없다 생각합니다.
13/04/18 17:57
수정 아이콘
아, 고우영이었군요. 저는 가치 판단이나 정합성 여부를 떠나서, <사실, 제갈량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질투심으로 인해 우리 관우짱이 죽었다능>정도는 되야 '까'가 아닌가 싶어서 적었습니다. 진수가 그 정도였나 해서요.
그리고 이문열은 소설가니까 그러려니 합니다. 흐흐
13/04/18 18:29
수정 아이콘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예전에 이 구절을 보고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있네요. 과장된 표현이긴 하겠으나 이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목숨 걸고 칭찬할 수 있는, 해야하는 인물이 제갈량이었다는거죠.
권유리
13/04/18 18:49
수정 아이콘
제갈량까라기보단 광적인빠에 가까운거 아니었나요 흐흐
인간실격
13/04/18 22:14
수정 아이콘
진수는 제갈빠라는게 거의 정설 아닌가요크
13/04/19 02:48
수정 아이콘
사마염과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칭송했다는건 그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대적했기 때문에'. 비슷한 예로 롬멜이나 이순신 장군은 '적국'에서 오히려 과도하게 고평가 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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