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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4/15 13:18:23
Name sungsik
Subject [일반] [역사] 조선시대 실패한 화폐제도: 저화(楮貨)

조선시대 경제 이야기를 한 김에 예전에 쓴 글을 하나 더 올려봅니다.
그냥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며 재미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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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식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상업을 천시해서 화폐를 쓰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닙니다. 조선시대엔 저화 (지폐돈), 포폐(면직류화폐), 혹은 흔히 아는 동전까지
다양한 화폐를 사용하려 엄청난 노력했어요.
조선 실록만 봐도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화폐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넘쳐납니다.
이를 가장 먼저 인지하고 노력한 인물은 태종. 태종은 저화를 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태종은 저화 혹은 저폐라고도 불리는 종이돈을 일상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 제도는 실패했습니다.

태종 1년,
태종은 하윤의 건의에 따라 사섬서를 설치하고 저화를 발행합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딴지가 들어오죠. 원래 신라부터 고려까지 동방에선 포필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종이는 쉽게 해진다.. 그러니 저폐 대신 면직 화폐를 써야한다는 거였죠.
하지만 태종은 저화의 사용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신하들 녹봉을 주는 것도 저화를 병용하여 지급하고,
국고의 쌀을 사는 것에도 저화를 이용해 사게합니다.
첫 시행시 태종의 저화 사용 의지는 확고했지요.
(이 때 저화 한 장의 가격은 쌀 두 말의 값어치를 했습니다.)

이렇게 저화가 통용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일반 백성들은 기존에 써왔던 추포(베:면직류)의 사용을 여전히 더 좋아합니다.
태종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고, 저화의 사용 방침을 더더욱 강화하지요.

추포와 저화를 둘 다 사용할 수 있게는 하지만, 만약 저잣거리에서 파는 사람이 저화를 받지 않거나
사는 사람이 저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매매한 물건을 모두 몰수하겠다는 조치까지 강행합니다.

그러다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 추포의 하나였던 오승포의 사용을 완전 금지하면서,
동시에 조정에서 저화로 오승포를 다량 구매해버립니다. 시중에 오승포의 유통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었죠.

하지만 태종 2년 9월, 저화의 통용이 채 2년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저화 통용의 폐단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저화 사용은 정말로 좋은 제도이나, 백성들의 심리가 중국과 같지 않아 수군대면서 저화를 무용지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젠 한 장의 저화로 한 말의 쌀을 사려고해도 살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1년전만 해도 한 장에 두 말)
지금 백성들이 저화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 사용을 중지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헌부에서는 포화의 단점을 말하고 저화의 장점을 말하며 저화의 사용을 계속 주장합니다.
사헌부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포화의 단점 :
1. 마가 귀해지면 재료 수급이 어려운 점.
2. 방직하기가 어려운 점.
3. 수량이 많아지면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운 점.
4. 길이가 한 필이 되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점.
5. 찢어지고 흠이 있으면 쓰지 못하기에 꿰메거나 이어서 가지고 다닐 수가 없음.

저화의 장점:
1. 종이는 섞어서 쓸 수 있으니 재료의 수급이 용의.
2. 인쇄하기가 편함.
3. 가볍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기가 편함.
4. 조금 찢어지거나 해졌어도 사용 가능하기에 꿰메어 가지고 다닐 수 있음.


하지만 사실 사헌부에서 저화 사용 폐지에 대해 반대한 건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에서 저화의 유통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저화를 이용해 쌀과 면직 등을 구입했는데,
저화의 사용을 중지하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지폐를 다시 환납하려고 할테고,
관부에선 이미 그 물건들을 상당량 사용한 상태라 쌀이나 면직으로 환전을 해주기 힘든 실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화 제도를 폐지해버리면 관아에선 화폐 가치에 따른 물건을 돌려주지 못할테고,
그럼 결론적으로 백성들에게 물건을 수탈한 꼴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러니 일단 저화의 사용을 계속 추진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태종 3년 9월, 저화가 사용된지 채 3년되 되기 전에 사섬서는 없어지고 저화 사용은 중지됩니다.


이렇게 끝났으면 참 다행인데... 태종 10년, 7년만에 없어졌던 저화를 태종은 다시 복구시킵니다.
그리고 세금을 저화로 대신 내게 하고, 온갖 의견을 다 수렴하려 하지요.
나중엔 아예 정 2품 이상에겐 저화를 효과적으로 통행시킬 의견을 전부 다 제출하라 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수요와 공급.
특히 화폐를 잘 회수함으로써 화폐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빈궁할 때 저화를 매입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쌀을 풀어 저화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세금 역시 저화로 적극적으로 걷어들이지요.


하지만 조정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몰래 사람을 저잣거리에 나가 알아보게 하기도 하고, 관원들에게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저잣거리에서 저화를 쓰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태종은 저화의 가치를 백성이 알게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 방법에 대해 고심했음에도
이미 한 번 시행했다 폐지되었던 법이니 백성들은 이 저화법이 언제 다시 폐지될지 모른다 생각하여
저화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게 현실이었죠.

결국 저화의 재사용이 시행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저화 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져버려
저화로 쌀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 후에도 저화가 아주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세종 4년에는 저화 3장이 쌀 한 되까지 이를 정도로 화폐가치가 떨어진 상황에 이릅니다.
이를 계산하면 처음 발행했을 시 저화 1장이 쌀 두 말이었음으로,
20년만에 약 60배정도 가치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를 거의 상실했다봐도 무방하지만,
태종이 만든 법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폐지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문종 때 이으러 문종조차 저화의 사용에 회의적이었고,
성종 때는 법만 있지 이미 죽어버린 법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사용이 중지됩니다.

이 화폐제도의 실패는 인조대까지 조선 내 화폐의 보급을 망설이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태종, 세종대 화폐 보급의 실패가 너무나 뼈아팠기에 누구도 함부로 강력히 화폐 보급을 주도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아래 글에서 보듯 화폐의 통용의 필요성을 대다수가 인정했음에도 망설임과 의구심을 동시에 가진 이유가 이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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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글링아빠
13/04/15 13:21
수정 아이콘
어제 댓글 달려다 말았는데, 글에도 나오지만 화폐제도 보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폐 제도와 그 가치보전에 대한 신뢰겠죠.
내 주머니 안의 세종대왕 그려진 종이 몇 장이 밥도 되고 쌀도 되며 그 가치가 보존된다는 데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건 그냥 종이쪼가리일 뿐이니까요.
정부가 그만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고, 신뢰를 구축할 근거가 되는 시스템도 없었고,
도입해서 사용을 억지로 밀어붙이니 화폐는 성공하기 어려웠을겁니다.
아케르나르
13/04/15 14:03
수정 아이콘
저글림아빠님 댓글처럼 회폐 자체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서양에서 괜히 금/은/동 등의 실제 가치가 있는 금속으로 화폐를 만들어 쓴 게 아니죠. 그런 가치있는 금속이나 물건으로 통용하도록 했다면 좋았을텐데요.
13/04/15 14:20
수정 아이콘
그러면 귀퉁이를 조금씩 짤라서 모은다거나해서 동전이 점점 악화가 됩니다
금,은본위제로 화폐와 교환할 수 있게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루크레티아
13/04/15 14:53
수정 아이콘
귀금속 화폐는 단순히 화폐의 모양이 아니고 직접적인 무게와 비중, 순도로 가치를 결정했습니다. 귀퉁이 잘라내면 잘라낸 만큼의 가치를 깠죠. 이런 일을 해주던 환전상들이 초기 화폐 경제의 큰 축을 담당했습니다.
본위제 자체가 귀금속을 본격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기에 아래 글에서도 썼지만 귀금속 화폐의 유통 없이 급격하게 지폐와 동전으로 넘어간 것이 화폐 경제에 대한 신뢰를 얻지 못하게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15:41
수정 아이콘
무게와 순도는 괜히 재는거 아닙니다. 무게가 줄고 순도가 줄면 가치도 같이 줄어요. 그거 재고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게 화폐유통의 핵심입니다.
13/04/15 15:58
수정 아이콘
악화가 늘어나면 하나하나 재야하니 불편해집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16:02
수정 아이콘
그러나 그걸 다 했습니다. 그렇기에 금, 은을 직접 매개수단으로 하는 본위제가 유지된 것이고.
왜 금화, 은화가 시대별로 일정한 가치를 유지해 왔는가, 일정한 순도와 무게가 어떻게 유지되었던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은본위 경제체제를 유지한 명나라 유물을 보면 은의 무게와 밀도를 재어 일정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는 저울이 흔하게 발견됩니다. 왜그럴까요.
루크레티아
13/04/15 16:05
수정 아이콘
그걸 재는 사람들이 환전상이고, 환전상이 흥하면서 화폐 경제도 발전했지요.
말씀하신대로 동전이 악화가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이 화폐 경제의 발전 자체에는 영향을 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화폐의 크기와 순도 조절은 돈을 가진 국민들이 아니고 정부에서 직접 조절했지요.
아케르나르
13/04/15 17:16
수정 아이콘
백원짜리/오백원짜리 동전 보면 귀퉁이가 톱니처럼 돼 있는데, 그게 화폐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겁니다. 우리나라 돈에 국한된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거죠.
아케르나르
13/04/15 17:22
수정 아이콘
애니 '늑대와 향신료' 를 보면 다양한 금/은화 등의 화폐가 나오는데요, 작중 사건 중 하나가 조폐권을 가진 영주가 새로운 은화를 발행하면서 이전의 은화 대비 은 함유율을 떨어뜨리려는 내용이었죠. 이 작품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지라 실제 있었던 일을 많이 참고한 걸로 아는데요, 당시 환전상 중에는 단지 동전을 손에 쥐고 흔들어보는 것 만으로 해당 동전의 은/금 함유율을 맞추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귀퉁이를 깎아내는 정도로 속일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펠릭스
13/04/15 14:06
수정 아이콘
동일한 가치를 지닌 귀금속이 존재하지 않는 지폐는 20세기까지 유럽에서도 불가능 했습니다.

무협지에 전표라고 나오지요. 결국 그만큼의 은을 쌓아놓고 있어야 화폐가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요.
내일은
13/04/15 14:57
수정 아이콘
화폐가 편리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화폐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모르고 성급하게 도입했기 때문이겠죠.
포켓토이
13/04/15 17:02
수정 아이콘
제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화폐 보급에 실패한 것은 결국 유통의 필요성이 낮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많은 양의 물자를 유통해야 하거나, 또는 다양한 종류의 물자를 서로 교환하려면 기준이 필요하고
저절로 화폐가 사용되게 될텐데 우리나라는 지역 특성상 그런게 필요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대로 섬나라인 일본은 유통이 필요하니까 화폐제도가 활발하게 보급될 수 있었을테구요.
루크레티아
13/04/15 17:09
수정 아이콘
정책의 문제가 크죠.
일본의 화폐 경제가 결정적으로 발달하게 된 에도 막부 시절에는 정부에서 강제로 유통이 발전 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을 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방 영주들을 강제로 에도로 정기적으로 불러들인 제도가 있지요.(일명 신킨코다이) 이 제도로 인해서 오고 가는 영주들을 위한 도로와 제반 시설들이 생겨났고, 이런 시설들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유통망이 생겨났으니까요. 에도 막부는 원래 모든 막부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토지와 농민을 관리하던 막부였는데, 이런 토지와 농민 관리를 위한 정책의 일환인 신킨코다이가 상업의 발전을 촉진했으니 어찌 본다면 운이 좋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04/15 17:51
수정 아이콘
필요하다면 민간이 어떤 형태든 만들어 썼을겁니다. 정책은 최종적으로 보조할 뿐이에요. 강제적인 정책이 있다한들 그게 조선의 경제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의문입니다. 전 글에도 달았지만 정태적으로 보면 조선의 가난은 생산력이 높지 않아서이지 화폐가 유통이 안되서라고 보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18:00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는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보다 월등한 인구증가율을 기록한 바 있습니다. 임란과 호란에 몇번의 대기근을 겪고도 500년만에 인구가 3배로 뛴다는 건(500~600만이 1600만 내외까지 치닫습니다.) 엄청난 겁니다. 이건 조선의 생산력 및 생산력 증가율이 매우 높음을 의미하지 그 역은 아닌 거지요.

조선의 화폐사용 미비는 사회적, 지리적 특성에 따른 것이라 보아야지 생산력이 부족해서그렇다고 보기엔 좀 많이 힘들다 생각됩니다. 한반도 전역이 일찍부터 사회적으로 확고한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 등이 일본과의 차이지요. 중국이야 워낙에 넓고 넓어서 아무리 강한 정치적 통합이 있어도 지역별 분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다 강남과 강북의 경제적 격차가 계속 커지면서 사회적 이질성도 커지던 동네라...
13/04/15 20:38
수정 아이콘
제가 알기로 조선의 년당 인구증가율은 0.1%내외로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인구가 늘었다고 생산력이 충분하게 되는건 아니죠. 애초에 생산력이 뛰어나면 왜 조선이 가난하겠습니까. 아 포인트가 서로 엇나갔네요. 조선의 화폐사용 미비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터인데 말씀하신 이유가 크겠죠. 다만 저는 아래 글과 연계하여서 조선의 가난이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담으로 조선은 가구당 일일 평균 곡식 소비량이 1리터가 안되었어요.
13/04/15 20:57
수정 아이콘
조선시대 농민의 곡식 소비량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종 1년 3월 9일
충청도 관찰사 이맹군이 계하기를, "지나간 을미년에 호조의 공문으로 된 난민 구제 규정의 내용을 보면, 장년의 남녀는 매인당 하루에 쌀 4홉, 콩 3홉, 메주 1홉, 11세에서 15세까지는 매인당 쌀 2홉, 콩2홉, 비지 반홉씩 이옵니다. (중략) 호조에서 사정하기를, 쌀과 콩과 메주를 합하여 8홉이므로 (중략) 지금 농사일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전례에 의거하여 나누어준다면, 비록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나, 농력이 부족하오니 (중략) 15세 이상은 하루 쌀 7홉, 콩 6홉, 비지 2홉과 11세 이상은 쌀 4홉, 콩 3홉, 비지 1홉을 주고, 10세 이하 5세 이상은 비록 농사일에 종사하지는 않으나, 아이가 주려서 울면, 부모가 홀로 배부르게 먹지 못할 것이니, 역시 11세 이상의 준례에 의거하여 주시옵소서."

하니, 의정부와 6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한 바, 다 말하기를,

"나누어 주는 것은 전례대로 하고, 백성에게 종자 곡식을 대출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여, 그에 따랐다.

전근대시대의 농민은 -국가별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현대인에 비해 상당한 대식가였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조선은 그 정도가 꽤 심하지 않았나 생각되고,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남성 노비의 경우 음력 3~9월에는 3끼, 21홉을 먹여야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노동량이 비교적 적은 여성 몸종의 경우에도 동 시기에는 3끼 15홉, 해가 짧은 시기에는 2끼 10홉을 급양합니다.
참고로 18세기 프랑스의 농민은 농한기에 1일 2리브르의 빵을 소비한다(리브르는 487.5g)는 기록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21:26
수정 아이콘
년당 인구증가율 0.1%면 조선 인구는 멸망시에 천만이 안됩니다. 그련데 현실은 1600만 내외 추정이죠. 또한 전근대 농경사회 하에서는 인구증가는 식량생산량 증가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일 평균 곡식 소비량이 1리터가 안되었다는 건 전혀 아닌데요. 오히려 조선 임노동자들의 임금을 식량으로 환산할 경우 양쯔강 하류 삼각지의 두배에 달한다는 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13/04/16 00:09
수정 아이콘
관련 자료를 찾아봤는데 제가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ㅠㅠ 단위를 잘못 알고 있어서 ㅠㅠ 뭐 어쨋든..
인구 문제를 보면 1600만 안됩니다. 조선 인구 관련 통계야 오차가 많아 정확한 수를 알긴 어려우나 보통은 600만에서 1300만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1906년 당시 구한국정부의 조사치에 따르면 579만명 일본 관헌의 조사에 따르면 1293만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1985년 윤종주 논문에서 나온 도표에 근거한 겁니다.
구한국정부의 조사치를 놓고 본다면 AD150-AD1950까지의 연간 인구 평균 증가율은 0.077%
AD1650-1906년은 인구가 오히려 10만 줄었습니다.

곡식 소비량은 제가 실수한 부분인데요. 권병탁의 논문에 따르면 1790년경 자작농은 1.5승/인(일) 병작농은 0.45승/인(일)의 경제수준을 유지했다고 하네요. 여기서 승이란 단위는 되하고 같다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되는 지금은 미터법에 맞추기 위해 1되가 2L인데 고려 문종 시대때는 1되가 596.4㎤로 추정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찾을 수가 없네요.

추가적으로 첨언하면 총 경지를 인구수로 나눈 수치로 볼때 제가 가진 자료상 가장 안좋은 시기가 1726년 영조 2년인데 일인당 0.17결 가장 큰 1634년 인조 12년 1인당 0.86결이었습니다.
13/04/15 21:28
수정 아이콘
가구당 일일 평균 곡식 소비량이 1리터가 안 됐다는 출처가 저도 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일일 평균 곡식 소비량이 1리터가 안 됐다는 게 실질 소비량이 1리터가 안 됐다는 건지
전체 생산량 / 전체 인구수를 했을 때 한 가구당 1리터가 안 된다는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또 전근대엔 인구는 대체적으로 그 국가의 최대생산량만큼 늘어납니다.
인구가 최대 한계치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이 닥치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거고요.
인구수는 그 국가의 최대 생산량으로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보고 고려와 비교했을 때 조선의 인구 증가는 압도적으로 높죠.
13/04/15 22:17
수정 아이콘
저도 한국 경제사란 수업을 수강하면서 들은거라 집에 핸드 아웃이 남아있다면 올려드리겠습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22:36
수정 아이콘
네오님// 조선 사람들이 대식을 한다는 건 상당히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걸로 아는데 그 반대되는 주장이라면 상당한 근거가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m]
13/04/16 00:10
수정 아이콘
관련 자료를 찾아봤는데 제가 틀린 부분도 있습니다...ㅠㅠ 단위를 잘못 알고 있어서ㅠㅠ 뭐 어쨋든..
인구 문제를 보면 1600만 안됩니다. 조선 인구 관련 통계야 오차가 많아 정확한 수를 알긴 어려우나 보통은 600만에서 1300만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1906년 당시 구한국정부의 조사치에 따르면 579만명 일본 관헌의 조사에 따르면 1293만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1985년 윤종주 논문에서 나온 도표에 근거한 겁니다.
구한국정부의 조사치를 놓고 본다면 AD150-AD1950까지의 연간 인구 평균 증가율은 0.077%
AD1650-1906년은 인구가 오히려 10만 줄었습니다.

곡식 소비량은 제가 실수한 부분인데요. 권병탁의 논문에 따르면 1790년경 자작농은 1.5승/인(일) 병작농은 0.45승/인(일)의 경제수준을 유지했다고 하네요. 여기서 승이란 단위는 되하고 같다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되는 지금은 미터법에 맞추기 위해 1되가 2L인데 고려 문종 시대때는 1되가 596.4㎤로 추정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찾을 수가 없네요.

추가적으로 첨언하면 총 경지를 인구수로 나눈 수치로 볼때 제가 가진 자료상 가장 안좋은 시기가 1726년 영조 2년인데 일인당 0.17결 가장 큰 1634년 인조 12년 1인당 0.86결이었습니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저에게 쪽지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핸드아웃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나이트해머
13/04/16 01:38
수정 아이콘
네오님// 수치보니까 근거까지 바로 짐작이 되네요. 1910년대 총독부 호적조사. 허수열 교수님부터 해서 '초창기라서 안잡히는 수치가 하도 많아 몇번이나 재조사하는 게 확인되는' 그거군요. 거기다 출처 논문이 1985년이면 요 최근 따라가는 것도 버거울 정도인 조선후기 경제사논쟁이 시작되기도 전...OTL.

몇마디만 하자면, 최근의 연구에서 조선 후기 인구를 1906~1910년대 총독부 통게조사만으로 연구하는 건 좀 시대가 많이 지난지 오래입니다. 이명훈 교수를 필두로 하는 낙성대학파에서 조선후기 양반 족보 등 다수의 자료를 들고 나와 뒤집은 이래, 현재는 역사비평에 못해도 한편 이상의 연구 논문이 매달 실릴 정도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1985년 논문자료는 이게 참... 찾아 보여주신 건 감사하지만 이건 너무 옛적 이야기가 근거네, 지금 시대가 언젠데... 하는 정도밖에는 답변을 못드리겠네요. 개인사정으로 논문검색을 못해드리는 게 아쉬울 정돕니다. [m]
나이트해머
13/04/16 01:48
수정 아이콘
네오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은 아니지만,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조선후기~ 일제시기 경제사 논쟁에 대해서 한번쯤 훓어라도 보셨으면 싶습니다. 저 책이 나온 이래로 반박과 논쟁이 무서울 정도로 진행중이라 80년대의 학설은 이젠 지나간 과거이죠. 현재는 가장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아틀라스 한국사」마저도 1717년 1635만, 1753년 1866만 등 18세기에 1700만 내외로 잡다가 19세기 생산성 저하로 1600~1700만 사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 시대라서요. [m]
Starlight
13/04/15 20:47
수정 아이콘
강제적인 조세 정책이 결국 조선의 경제 시스템에 큰 영향을 끼쳤죠.
대동법이 그 대표적인 예죠. 강제적인 정책으로 만들어진 상품 잉여작물의 탄생은 곧 시장경제 활성화로 이어졌죠.
조선 전기에는 그런 정책이 없었기에 화폐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바람이어라
13/04/15 20:29
수정 아이콘
혹시 책을 읽고 쓰신 글이라면 제목과 저자명을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역사를 전공했는데 이 주제를 좀 찾아보고 싶어서요.
13/04/1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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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 책을 읽고 쓴 글은 아니고 실록 기사를 정리해 쓴 글입니다.
윗 내용은 실록에 100% 다 실려있습니다.
바람이어라
13/04/1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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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실록 기사라...ㅜ
아쉽네요.
13/04/15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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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화를 가져오면, 조정에서 항상 그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곡식이나 인삼 소금 등으로 바꿔준다고 하고' 그 교환비율을 정해 호조의 법령에 포고해 놓으면, 풍흉년에 따른 또는 경작의 다과에 따른 가치변화는 있겠지만(예를 들면, 흉년에는 저화의 가치가 급등하고, 풍년의 경우는 다소 떨어지는.....) 최소한 안정적인 화폐 유통기능은 확보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곡식과 같은 현물교환의 경우 화폐가치가 안정적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리스크까지 부담하는 입도선매의 선물개념까지 화폐에 포함되어 있기에(미래에 흉년이 들거라고 예상하면 저화를 적극매입하고, 풍년이 올거라 예상하는 경우는 저화를 매수하려하지 않아서 유통기능이 일시 마비될 수 있음: 사실 그 당시에 풍흉년을 예상하기는 힘들고, 곡식에 대한 일정 수요는 항상 존재해서 가치가 아주 급변했을 것이라 예상은 하지 않지만요...) 화폐를 기준잣대로 삼는 현물은 비교적 가치가 안정적이고 변화가 없는 물품이 합당하기에, 인삼같은 제품은 국제교역이 가능하기에 국내수요만으로 가치상승하락이 결정되지 않는 안정성(물론 국제적으로 인삼의 수요가 급변하는 경우는 어쩔수 없지만... ) 을 갖지 않았을 까요?

제도 첫 시행에 신뢰를 확보할려면, 백성들에게 화폐란 것의 실물가치를 확실히 제시하는 편이 나았을 거라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형태는 금은본위제의 다른 형태기에 어느정도 한계가 있고, 정부가 엄청난 물량의 인삼 또는 식량을 확보해야 하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지만, 처음 시행초기에는 많은 화폐가 아닌 소량의 화폐를 유통시켜, 이와같은 방법으로 신뢰를 확보한 후, 유통물량을 서서히 늘리는 방안이 바람직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화폐의 가치에 대한 정부의 신뢰만 확보했다면 유통은 활발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현물화폐의 유통은 은자라 하더라도 유통자체에 비용이 드는데, 이런상징화폐는 그 유통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형태이기에, 상단이나 대형 거래집단 일수록 실물화폐보다는 유통화폐로 거래하는 것이 이익이 더 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일단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백성들에게도 쉽게 전파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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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hrace님// 상평통보가 지금 말하신 바로 그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일정한 교환비를 유지하여 풍흉년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상평통보 이전에는 포:쌀의 교환비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비슷한 효과를 냈고. 그런데 이때 나타난 조정에서는 이 교환비를 유지하기 위해 매년 수십만 전의 상평통보를 찍어내야 했고, 이를 위해 중요한 전락물자인 구리(각종 화기류의 재료로 중요시되는 전락자원이였죠)를 엄청나게 소모해야 했으며, 그러고도 전황현상을 겪었단 말이죠. 상평통보의 유통 성공도 일본이 부흥하면서 대랑의 구리를 캐낸걸 수입해서 가능하지 않았나 할 정도라.

결국 사회구조가 화폐유통에 걸맞게 변모해야 가능하며, 정부가 이를 해내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락물자의 대부분을 투입하는 수준의 노력이, 말이죠. 그게 아니라면 일본처럼 광산이 곳곳에 산적해 있는 운이 따르거나요. [m]
13/04/1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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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상평통보가 아니라, 저화와 같은 지폐돈이라면 실패했을 건지 이부분은 저로선 정말 궁금하기에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리고 저는 이 분야에 대해선 전공자가 아니고 완전 비전문가입니다. 우연히 글을 읽고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부담갖지 마시고 답변해 주셔도 됩니다.
나이트해머
13/04/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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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hrace님// 조선시대 종이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싸고, 파손도 쉽습니다. 거기다가 누가 봐도 그것의 가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실물가치를 지닌 금속화폐와는 달리 종이화폐는 철저하게 신용으로 굴러가고, 그만큼 정착이 힘듭니다. 수십년 이상은 노력해야 할 걸요. 실제로 유럽에서도 지폐가 정착된 건 얼마 되지 않았지요. 상평통보 대신 저화를 시도했다면 정착에 실패하지 않았을 까 생각됩니다. [m]
13/04/15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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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그렇군요... 상평통보는 그럼 현물화폐+상징화폐의 기능을 반반씩 결합한 정도의 형태라 보면 되겠군요.
나이트해머
13/04/1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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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님// 굳이 부연설명하자면, 지금 제시하신 논문은 1904년 603만여~1910년 1293만여~1925년 1902만여 등으로 인구학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만큼 치솟는 '통계상의 파악인구' 중 특정시기를 그대로 실질 인구로 대입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시하신 시대를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지' 싶지만 말이죠. 추가로 덧붙인 1인당 결작수도 최근에는 읍별양전과 수조권의 배분 등에 대한 연구 , 즉 조선 후기의 실질 결수에 대한 연구내용이 빠져있는 것이고요. 이 또한 그런 연구가 이루어지기 이전 시대의 것이라 감안할 만 하지만. 실제로 박제가는 1결이 넘어가는 농민가구 하나를 평균으로 잡고 주장을 풀어가고 있지요. 이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재정시스템의 재발견:17~19세기 지방재정사 연구」라는 책이 권장할 만 합니다. [m]
13/04/16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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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 고맙습니다.
그런데 궁금한게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라는 책이 어떤 측면에서 논쟁을 불러왔다고 하는 거죠?
저자도 역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인 거 같더라구요.
나이트해머
13/04/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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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sik님// 그 책이 최근의 식근론의 시작입니다. OTL...그래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수량경제학이란 측면에서 그 책은 현재의 논쟁과 연구의 시발점이 되는 책이고, 풍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책이기에 여러모로 논박을 받긴 했어도 많은 부분 읽을만한 가치가 잇죠.

이명훈 교수야 뭐 유명하죠. 요즘 역사 관련해서는. 이분은 노비와 관련된 중요한 연구서적도 내신 바 있을 정도로 조선 후기 사회사 관련해서 상당한 연구를 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책제목이 「노비 농노 노예」 였던가... [m]
13/04/1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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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그래서였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추천해주신 책은 꼭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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