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전술 보드게임 <매직넘버일레븐>을 개발한 과정에 대해 연재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통해 결과물로 이어지게 되는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좋은 읽을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1편부터 살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⑥ 핵심 메커니즘 구상 - 주도권 & 시너지
축구를 구성하는 요소는 셀 수 없이 많다.
슛, 패스, 드리블, 태클, 클리어링, 압박, 탈압박, 크로스, 컷백 등등등..
내 생각엔 저 많은 요소들을 '개별 액션'의 개념으로서 게임에 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면 예를 들어, '저 이번 턴에는 드리블 할 게요' '그럼 저는 태클 액션으로 막을게요' 이런 식으로 마이크로하게 게임 전개를 가져가다가는 자칫 게임이 번잡해지거나 너무 미시적인 차원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건 보드게임보다는 실시간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축구 비디오 게임에 더 어울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이 게임에서 축구의 핵심 요소를 딱 네 가지로 정리해서 표현하기로 했다.
공격, 수비, 주도권, 시너지.
드리블 돌파를 하고, 압박을 하고, 크로스를 올리는 디테일한 작업들이 결국엔 다 경기를 주도하기 위한 것 아닌가.
우리 팀이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는 높이고, 상대 팀이 골을 넣을 수 있는 기회는 줄이는 것,
그것을 한 단어로 설명하면 결국 '주도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도권이라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한쪽이 경기를 주도한다면 한쪽은 밀릴 것이고, 실력이 비슷하다면 대등할 것이다.
동시에 경기를 주도할 수는 없다. 즉, '줄다리기' 같은 것이다.
▲ 주도권 트랙 위아래의 빨강/초록/파랑 색깔이 각 팀의 주도권 상태를 의미한다
이 게임에서 '주도권'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한다. 상대성을 가진 '트랙'이 존재하고, 그 위를 마커가 오가며 양 팀의 주도권 상황을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 팀의 주도권이 더 높으면 공격이 수월해지고, 반대로 상대 팀의 공격 작업은 어려워진다.
앞서 말한 축구의 다양한 요소들 (드리블, 압박, 크로스 등)도 주도권에 기여하는 요소로서 녹였다.
예를 들어 좋은 드리블 능력을 가진 선수를 잘 활용하면 순간적으로 주도권이 올라가는 식이다.
▲ 이 선수는 드리블 능력으로 주도권을 일시적으로 1 올리고, 상대 시너지도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이제 주도권을 통해 공격을 어떻게, 얼마나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여기서 앞서 언급했던 네 가지 요소 중 하나인 시너지가 활용된다.
예를 들어 엄청 강하게 압박을 걸어서 공격 기회를 얻어냈지만 선수간 연계 플레이가 하나도 되지 않는 팀이 있다고 하자.
공을 빼앗은 선수 혼자서 모든 수비진을 돌파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메시는 예외), 결국은 다시 공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반대로 공격 기회를 얻었을 때 선수간 유기적인 연계 플레이가 가능한 팀이라면?
당연히 공격 기회가 몇 배는 더 강해질 것이다.
이 게임에서 그러한 '유기적인 연계 플레이'를 표현한 것이 바로 '시너지'라는 개념이다.
시너지는 '카드' 형태로 표현했다. 카드에는 1부터 5까지 수치가 표현돼 있고, 그것을 랜덤으로 받게 된다.
운 나쁘게 1짜리 카드를 뽑으면 망하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실제 축구에서도 연계 플레이를 했다고 해서 항상 그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패스 미스가 나오기도 하고, 별 위력이 없는 공격 패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연계 플레이를 계속해서 시도하다보면 한 두번 좋은 찬스가 나오게 마련이다.
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너지 카드를 단 한 장만 뽑는다면 좋은 카드가 나올 확률이 낮겠지만,
연계 플레이를 지속적으로 시도해 더 많은 카드를 뽑는다면 4,5 수치의 카드를 뽑을 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일종의 호흡을 맞춰나가는 과정을 카드 뽑을 확률로 표현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1이나 5 같은 극단적인 숫자의 카드 비중은 낮추고, 3처럼 평균치에 가까운 숫자는 뽑힐 확률이 높도록 카드 분포를 조정했다.
이렇게 확보한 카드는 공격력 또는 수비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수비력 강화에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수비 역시 조직적인 연계 플레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5 시너지 카드. 하지만 마냥 좋은 카드만은 아닌 이유도 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정리하자면 이 게임은 공격과 수비라는 큰 축을 두고, 주도권을 줄다리기 하며 시너지로 부스팅을 하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공격 / 수비 / 주도권 / 시너지라는 네 가지 요소는 앞선 연재에서 설명했던 선수 카드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공격, 수비, 압박, 연계 등 다양한 아이콘이 만들어지며 빌드업 루트를 구성한 모습
이렇게 축구 보드게임 <매직넘버일레븐> 핵심 골조는 모두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보드게임이긴 하지만 어쨌든 축구라는 스포츠를 표현했고, 스포츠의 핵심은 심장 쫄깃해지는 '짜릿함'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 부분이 약해보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추가하게 되었다.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⑦ 마무리 - 매직넘버
축구에는 '알고도 못 막는 슛'이라는 게 있다.
완벽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감아차기, 한 박자 빠르게 낮고 정확하게 꽂히는 피니쉬 같은.
완벽해 보이던 수비진이 이런 슛 한방에 무너지기도 하고,
그로인해 흐름이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 축구 경기다.
그러한 '알고도 못 막는 슛'을 구현하고자 만든 시스템이 바로 '매직넘버' 시스템이다.
매직넘버를 설명하기 전에 일단 득점 시스템을 먼저 살펴보자.
이 게임에서 골이 들어가는 방식은, <공격수가 만든 공격력(공격 아이콘 수) + 시너지 카드 수치>를
<수비진이 만든 수비력(수비 아이콘 수) + 시너지 카드 수치>와 비교해 공격측이 더 높으면 득점에 성공하게 되는 식이다.
▲ 이 사진에서 스트라이커의 공격력은 4, 윙어의 공격력은 2
예를 들어 위 사진에서 스트라이커가 슈팅을 시도한다고 하자.
그러면 기본적으로 4의 공격력이 주어지고, 여기에 '시너지 카드'를 추가로 써서 공격력을 강화하게 된다.
(제작기 6편에 언급했듯, 시너지 카드의 수치는 1~5 사이)
그런데 시너지 카드는 어떻게 얻냐면, 미드필더가 '연계' 아이콘(플러스 모양)을 생성해줘야 뽑을 수 있다.
위 그림에 보면 AMF인 찬스메이커는 좌우로 연계 아이콘을 만들 수 있는 포텐셜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와 같이 공격전개를 했다면 시너지 카드가 없으므로 그다지 강력한 슈팅을 때릴 수 없다.
물론, 슈팅을 때릴 때 항상 한 장의 시너지 카드는 공짜로 주어진다. 단, 랜덤 뽑기다.
즉, 위의 경우, 스트라이커의 공격력 4 + 랜덤 시너지 카드(1~5)가 기대할 수 있는 최종 공격력이 되겠다.
만약 미드필더를 통해 확보한 시너지 카드가 수중에 있었다면, 여기에 그 카드를 한 장 추가해 공격력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비는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공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 현재 수비진의 수비력은 3. 연계 아이콘도 1개 있으므로, 매 턴 시너지 카드도 1장 뽑을 수 있다. 만약 풀백을 한 칸 올려서 미드필더 우측에 붙였다면? 수비력은 2로 줄겠지만 연계 아이콘이 2개가 되면서 시너지 카드를 2장씩 뽑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선택은 감독에게 달렸다.
위 사진에서 수비진의 수비력은 3이다.
공격과 다른 점이라면, 공격의 경우 공격수 1명을 선택해 그 선수 한 명의 공격력만을 세지만, 수비는 모든 수비수의 수비력을 합산해서 센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비도 여기에 시너지 카드를 합산해 총 수비력을 산정한다. 랜덤으로는 2장까지 뽑기가 가능하다.
여기까지 들으면 '수비가 너무 유리한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다.
시너지 카드 중 일부는 '태클' 기능이 달려 있어서 수비가 쓰게 되면 PK를 내주게 되기도 하고,
어떤 공격수는 'CRACK' 기능이 달려있어서 상대 수비 아이콘을 일정 개수 무시하게 만든다.
또한 공격은 시너지 카드를 맥시멈 3장까지 추가할 수 있는 반면, 수비는 2장이 맥시멈이라는 차이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격에게는 도입부에 언급한 '매직넘버'라는 특별한 기능이 존재한다.
이 게임의 제목이 '매직넘버일레븐'인 이유도 여기서 기인하는데,
만약 공격력의 총합 수치가 정확히 '11'이 된다면 이 슈팅은 상대 수비력에 상관없이 무조건 골이 된다.
수비력이 12든, 15든, 20이든 상관 없다.
말 그대로 알고도 못 막는 슛인 것이다.
반대로, 만약 공격력 총합이 11을 넘어간다면 이 슈팅은 무조건 안 들어가는 '대기권 돌파 슛'이 된다.
앞서 잠깐 소개했듯이 시너지 카드 1장은 항상 랜덤이기 때문에 매직넘버가 나올지, 대기권 돌파 슛이 될지,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두터운 수비벽이라도 언제든 뚫을 수 있고, 또 아무리 매서운 공격이라도 언제든 실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이내믹이 '스포츠 게임'이라는 요소에 화룡점정을 할 수 있는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연재를 마치며..
여기까지가 축구 보드게임 매직넘버일레븐이 만들어지기까지 고민했던 주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게임이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해서 완성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 없이 많은 테스트를 거쳐 밸런스와 오류를 잡아내야 하고, 본질적으로 게임이 '재미있는지'가 계속해서 담보되어야 한다.
거기에 디자인은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구성물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지 등 하나의 게임이 완성되기까지 고민해야 할 거리들은 무수히도 많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다뤄보겠지만, 이번 제작기는 시스템적인 부분까지만 다루고 마무리하려 한다.
처음 아이디어 구상을 시작했을 때부터 출시를 앞두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게임이 완벽한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는 만족한다.
무엇보다 축구라는 소재를 이렇게 풀어낸 보드게임은 없다는 것에 자부하고, 그런 게임을 직접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매직넘버일레븐 출시를 무사히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세계를 보드게임으로 구현해내기 위한 나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