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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5 00:45
조선인 중학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진학통계, 지역별 일본 본토 제국대학 의학부 진학통계에서 '외부링크 사용이 허용치를 넘었습니다.'라고 뜨는 것 같습니다. 수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2/07/25 01:58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사견으로는 당시 북한행을 택한 이학부 출신들은 당시 기준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애기간을 통틀어 생각해 봐도 괜찮은 선택이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70년대까지는 북한이 남한에 비해 기술력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얘길 들은것 같네요. 이후의 드라마틱한 크로스는 합리적 의사결정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떠오르게 만들지만요..
22/07/25 02:33
사실 똑같이 북행을 한 법학부, 경제학부 졸업생들의 말로가 대체로 불운했던 것과 비교하면, 북행을 택한 과학자들은 북한에서도 전반적으로 학계 원로로 대접을 잘 받은 편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예후는 설사 북한 같은 폐쇄적인 체제에 놓이더라도 대체로 전문성이 인정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월북 당시 기준으로는 북한에 한반도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밀집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등 북한의 이과, 공과대학 교원에게 투입된 예산 등의 대우가 남한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나았다는 점에서 이북쪽이 오히려 더 좋은 편이었고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운명은 한편으로 비정치적이고 독립적일 것만 같았던 과학자들조차 속한 체제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분명히 이들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했을 테고, 최소한 같이 북행을 택한 문과 계통 지식인보다는 나은 삶을 누린 것은 맞습니다만, 남한에 잔류한 과학자들과 비교하면 과학자로서는 이들이 택한 대가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도쿄제대 출신 잔류 과학자는 물론,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타 제국대학 출신, 그리고 경성제대-경성대학 이공학부 출신 중 잔류한 과학자들은 어려웠던 시기조차 미국이 대표하는 세계 과학계와의 끈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60년대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산업 인프라 구축으로 이들은 학계에서든 산업계에서든 다방면으로 진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학계에 남은 사람들은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에 자리 잡아 본인 연구는 물론, 제자를 키워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북행을 택한 과학자들은 연구자라면 늘 갈망했을 세계 학계와의 교류가 단절됐고 북행 당시만 해도 선진적이었던 연구 환경은 그 이상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짧게 언급한 교토제대의 두 조선인 정교수 이승기와 이태규의 삶이 그런 점에서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북행을 택한 이승기야 북행 직후부터 북한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스스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한 연구 업적을 남기며 북한에서는 애국 과학자로 대접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있었을 때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던 세계 학계와의 교류는 사실상 단절됐으며, 정권이 제공할 수 있는 연구환경 역시 몸담고 있는 정권이 실패함에 따라 점차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반면 이태규는 남한의 혼란스러운 학내 분규 상황(국대안 사태)을 거치며 환멸을 느끼고 단신으로 미국으로 떠났으나, 어쨌든 세계 학계와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을 뿐더러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한국인 유학생들을 제자로 받아 육성하였고, 70년대 이후로는 모국으로 귀국하여 카이스트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비정치적일 과학자들조차 (이승기부터도 호남 출신이나 더 나은 연구환경을 찾아 북으로 택한 것이었으니..) 체제라는 제약은 강력했던 셈입니다.
22/07/25 02:12
저는 왜인지 이러한 부분에 관심이 많이 가더라구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교육체제와 당시 대학들 이런거… 나무위키에서 여러 해외 대학들이나 우리나라 대학들, 해외 입시 체제나 일제강점기 교육체제 등에 관한 문서를 읽곤 해요 약간 교육과정이나 교육체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런 생각도 종종 하고요
22/07/25 02:35
연속성도 있고, 그렇지만 중대 사건(해방 등)을 거치며 분명히 이전과 이후가 구분되는 면도 있고, 그렇습니다.
언젠가 경성제국대학-경성대학 연재를 다루게 되면 이 점도 한 번 포괄적으로 살펴볼 의향이 있습니다.
22/07/25 02:44
도쿄제국대학….
현재의 도쿄대학도 물론 일본 사회에서는 학벌의 왕으로 취급받지만 당시의 도쿄제국대학 졸업이라는 말이 주는 권위는 특히나 식민지에서는 더욱 컸겠죠 그토록 잘 나가던, 조선에서 손꼽히는 엘리트였던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평양전쟁/중일전쟁 중 사망하고, 병사하고, 한국전쟁 중 죽고, 북한으로 넘어갔더니 숙청당하고…. 참 역사라는 수레바퀴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싶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이 격동의 시기의 조선이 아니라 지금, 발전된 선진국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참 잘 살았을 텐데요…..
22/07/25 03:03
자료 감사합니다.
저중에 제가 아시는 분도 명단에 있는데 징집 피해서 월북하신 게 아니라 소련으로 도망갔다가 해방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온 다음 6.25때 남한으로 내려 오신 분 성함도 있네요.
22/07/25 10:17
김동휘라는 분이실겁니다.
그리고 저 분 중 청목영남 1943년 중퇴하신 법학부 87번분의 성은 김씨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오래되서 틀릴수도 있지만)
22/07/25 12:06
한가지 더 알려드리자면 40-45년 일본으로 유학간 신의주 고보 출신들끼리
구락부를 만들어서 친목을 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몇몇 분들 중 소련으로 도망가신 분들 중에는 조봉암 선생이랑 관련되서 진보당 창당 때 핵심 역할을 하신 분도 진보당 사건 때 같이 사형선고 받으신 분도 계십니다. 진보당 사건 이후 행적이 묘연해 지신 분들도 있고 재야에서 조용히 계시던 분도 있구요.
22/07/25 03:26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자료와 분석 감사합니다. 요즘 시대에도 해외유학은 적잖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저 시대의 유학생활은 대체 어땠을런지 쉽게 짐작이 가질 않네요. 물론, 저당시에는 구제고등학교만 다녀도 엘리트 취급이었으니, 거기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분들은 정말 대단한 우대를 받기도 했겠지만요.
출신고교를 자세히 뜯어보면 유독 경제학부와 문학부에서만 영미권의 퍼블릭스쿨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7년제 고등학교나, 일본 재계와 연관이 깊은 세이케이, 세이죠 출신이 여럿 보인다는점이 흥미롭네요.
22/07/25 10:56
예. 70, 80년대 유행했던 명사들의 회고담을 보면 종종 구제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밴 회고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 대학, 학부, 기수 보면 유독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고교가 모이기도
22/07/25 06:46
제가 현재 교토대학 유학중이라서 저도 관심있는 주제였는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서북지방, 대체로 평양출신들은 당시 아웃사이더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륙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돈이 모이던 곳이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는 멀었던, 그래서 더욱 서구화 근대화 개화운동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평양대부흥 운동도 연관되는데,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은 지역으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다보니, 머리속에 조선의 이념인 [유학]의 색채가 옅어서 신문물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도쿄로 유학가는 숫자가 많았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차피 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출세할 길이 없다면 유학가서 돌아오겠다? 뭐 그런거요
22/07/25 11:59
예. 맞습니다. 일제 때의 평양은 인구야 부산과 비슷하다지만 서울과 대비되는 하나의 중심지 같은 느낌이 뚜렷합니다. 서울 유학을 할 바엔 일본 본토로 건너가겠다라는 마인드라든지, 유교와 대비되는 개신교의 총본산이라든지
22/07/25 12:00
1940년대 징집, 1945년 전후 정치테러와 분단, 1950년 6.25 전쟁, 한국인에게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22/07/25 08:37
자료 감사합니다.
제 진외삼촌도 동경제대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성함을 정확히 모르니 전체적으로 출신지며 나이며 맞는 이분이겠거니 하고 보고있는데 행적 기록이 없네요 이 분도 전쟁에서 돌아가셔서 현충원에 묻히셨습니다. 한국역사의 비극이 많은 지식인들을 죽게 만들었네요...
22/07/25 12:01
감사합니다. 혹시 어떤 분으로 짐작하고 계신가요? 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든 게 1940-50년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2/07/25 08:54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엘리트 지식인이고 뭐고 다 소용없어지는군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무기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데 뭘 믿고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기는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2/07/25 12:03
극단적으로 일제 내내 한국의 최고위층으로 살던 조선귀족들조차 해방, 6.25전쟁을 거치며 행적 불명이 된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전쟁은 그야말로 빈자고 부자고 가릴 것없이 평등한, 그리고 참혹한 폭력이었던 셈입니다.
22/07/25 12:16
전에 어느분이 구글 블로거에 작성하고 복붙하면 그림 포함 잘 넘어온다고 알려주셨는데
그 글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네요 @_@ 다른 분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22/07/25 13:02
이 글의 논지와는 다소 벗어나는 말일수도 있는데, 도쿄제국대학이 당시 일본 대학의 정점에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들이 최고의 엘리트였다는 것도 틀림없습니다만 본문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다시피 절대적인 졸업생 숫자, 그리고 최정점은 아니라지만 당시 식민지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어느 정도는 집안 환경이 괜찮은 수준이어야 가능했다는 점 등을 감안해보면... 사실상 더 영향력을 넓게 발휘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립대학 출신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 소케이 출신은 아닙니다만 제가 나온 대학에도 고 김수환 추기경이 동문이시더라구요.
22/07/25 14:35
예. 김수환 추기경이면 천주교계 대학일 조치대학이겠지요.
본문에도 썼지만 지적하신 점이 해방 후에는 도쿄제대의 그림자가 옅어지게 되는 데 기인하였습니다. 도쿄제대의 경우, 대학 본과 진학 전 3년제 고등학교부터 타지인 일본에서 유학해야 했다는 점이 특히 진입장벽으로 작용했고, 사립대학과 달리 전문부 등을 운용하지 않았으므로 도쿄제대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는 풀이 좁은 편이었습니다. 반면 사립대학은 비교적 문호가 넓은 편이었는데, 중학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 가능한 전문부는 물론, 학부의 경우에도 예과가 아니더라도 보성전문, 연희전문 등의 조선 내 전문학교나 타 사립대학 전문부를 거친 사람들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국내파는 유학을 안 가도 됐던 경성제대가, 그리고 유학파 중에선 와세다, 주오, 메이지, 니혼 등의 사립대학 출신들이 한국의 해방 후 정계, 학계, 언론계 등지서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활동하는 수가 많았으니까요.
22/07/25 13:30
제 조부께서 와세다를 나오셨습니다. 지금은 당연히 아무도 안 계신 고향집에 자랑스레 걸린 졸업사진도 있었죠.
잘 아시겠지만 일본의 경우 국공립대와 우리나라의 그것의 위상은 꽤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의 연고대에 비교되는 게이오-와세다는 일본 전국대학순위 10위권이죠.) 그래도 일제 치하에서 유학까지 한 집안치고, 우리 집안은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게 됩니다. 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공산주의 활동 비슷한 것을 하신게 아닌가 추정합니다. 당시 지성인의 의무로 간주되기도 했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신 것도 그렇고..)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22/07/25 13:42
아무 생각 없이 글 클릭했다가 진외증조부 성함과 마주쳐서 깜짝 놀랐네요.(집안의 큰 어르신이 신호를 보내주신 것 같아 같아 로또 사러 갑니다.)
자료 정리하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경성제대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22/07/25 14:44
일제시대 엘리트 조사 관련 업무를 한 2년 정도 한 적 있는데,
조사하다보면 정말 입이 벌어지는 사례들이 많지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례로 경성의학전문학교 45년 졸업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의학도인데도 2차대전 막판이라 졸업하자마자 관동군에 차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간신히 서울로 와서 자리를 잡고 50년 5월에 석사를 획득하였는데 1달후에 6.25 발발. 서울에 남아있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서 인민군으로 전쟁에 복무합니다. 그리고 다시 국군에 체포되서 국군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불과 10년도 안되서 비자발적으로 관동군, 인민군, 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거죠.
22/07/25 20:59
일제하에서는 식민지인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순탄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조차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령 규슈제대 법과를 졸업한 김호수의 경우, 해방 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하여 일본 본토의 내무성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중기에는 조선인은 고문시험을 붙더라도 자의반 타의반 대개 총독부 소속스로 그치는 케이스가 많았으나, 극후기인 40년대에 접어들면 일본 본토의 성청에 배치되는 케이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김호수는 해방이 되자 월북하였는데(함남 출신이기는 했습니다.), 1950년대 초 정전 직후 남파간첩으로 왔다가 적발, 사형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22/07/25 17:48
경성제대만 나와도 초 엘리트인데 당시 동경제대면 지금 하바드 위상에 뒤지지 않았을터 그럼에도 세상이 안좋은 시기니 징집 전쟁 분단 등 엘리트라 해서 더 나은 삶을 살았다고 보기에도 어렵겠네요
70년대 말까진 북한이 기초과학을 남한보다 월등히 앞섰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화학분야...모든 공산권 국가의 공통이겠지만요
22/07/25 21:01
맞습니다. 특히 함흥-흥남은 대표적인 화학공업 지대였고 이북정권이 평양의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설립을 마무리한 후 바로 손댄 과제가 흥남공대의 설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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