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오래전부터 인재관리 선진국이었다.
대륙은 광활하게 넓고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엄청난 숫자로 엮여 비벼대며 살고 있는 땅이다. 많은 나라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주변국과의 선린교류나 물리적 충돌도 끊임이 없었다. 이곳의 main tribe의 주장은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외부에서 온 집권자(Foreign Ruler - 특히 원과 청), 색목인(집권자가 데리고 온 파란눈의 회계사, 수학자, 건축가 등) 그리고 토착원주민인 한족들의 장단점이 혼합된 형태로 진화되어 왔다.
이 대륙에서 무수히 많은 종족들과 나라들이 명멸하였고 특히나 5개 종족의 16개국 시절도 있었다. 이들의 이합집산 기록이 바로 이들의 역사이다. 이들 한족이 하나의 나라가 돼본 기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금의 통일된 차이나도 나이가 겨우 70 여 년 뿐이다.
그런 인구 대국답게 전국시대부터 인재가 부족해서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다. 동북아에서 과거(科擧-현행 고시)라고 하는 정부 관리의 선별 제도로 인재를 발탁하는 방식을 제일 먼저 도입한 곳이 중원의 나라이며, 언제이든 관리를 지원하는 인구가 많아 인적 자원은 무한에 가까운 나라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들과 교류가 많았던 한국의 경우 그 인재선발의 장점을 가진 과거제도를 고려시대부터 받아 들였다.
대륙에는 많은 정권이 생기고 사라져 갔다. 항시 중원 정권의 흥망을 결정한 것은 인재의 존재 여부가 아닌 그 시대 인재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느냐, 인재들이 제도권 내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그 목소리는 제도권에서 합리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가가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 예를 들어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사라져버린 진나라의 멸망은 내시 조고가 준비된 황태자 부소를 죽이고 금치산자인 호해를 뜬금없이 즉위시켜 시작된 일이다.
무려 400년을 유지해오며 차이나 문화의 기틀을 잡은 한나라의 말기에도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지만 십상시가 최고결정권자여서 꼴까닥 망해버렸다.
한(漢)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후대에 그것이 픽션/넌픽션 스토리가 되어, 삼국지라는 소설이 스테디셀러, 베스트셀러로 잘 팔리게 된 이유가 된다. 그 바람에 이문열과 황석영 등은 그 구라를 푼 돈으로 부자가 되었다. ^^
수나라는 양제가 추진한 고구려와의 세 판의 전쟁에 국력을 소진하여 건국 38년 만에 쫄딱 망했고, 송나라 때는 악비 등이, 명나라의 경우 이유가 열 개도 넘지만 대표적으로 말기에 장거정의 세금제도가 있었다. 모두 중앙 조정의 의도적 오류가 자신을 죽여버렸다.
이는 술 항아리를 연상시킨다. 술을 만드는 효모는 무한증식이 가능하다. 당(전분)에 효모를 넣고 알콜이 10% 정도 발효되면, 자체적 살균력을 가져 잡균(초산균 제외)의 번식을 막아준다. 그러나 효모의 발효력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 농도의 알콜은 15~16도이다. 이 이상 발효를 진행하다가 보면 효모 자신의 세포벽이 녹아 더 이상 생존할 수가 없다. 그 술 항아리를 가진 큰 나라는 오늘도 발효 중이다.
특이할만한 일들은 이민족들이 힘으로 대륙을 정복하고 그 시너지로 인한 힘의 전성기 일 때, 그 중원은 번창했다. 그러나 그 이민족 집권그룹은 정주기간이 길어지며 제도와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한족에게 동화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더 훗날 역시 중원을 지배한 요나라(거란족),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여진족) 때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민족들이 한족을 지배하며 세워놓은 Hybrid한 번영의 틀은 그들이 중원에서 밀려난 후에 반드시 한족에게 유리한 유산으로 남겨줬다. 우성 유전자가 발현된 혼혈은 아름답다. 이러한 형태의 복합적 문화가 중원으로의 스며듦은 모든 주변국의 문화를 한족의 것이라고 뻔뻔하게 내지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 만다린이 모국어가 된 벽안의 위그루인 여자 탈랜트는 많이 있다. 많이 이쁘드라...
이는 한족 숫(♂)자의 저력을 새삼 알게 해 주는 일이라 하겠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가 많음은 밤 일하는 숫(♂)자가 많음이다. 한족은 지금 그 왕성한 번식력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지금의 저 넓은 중화인민공화국 땅도 여진(만주)족이 왕창 늘여 논 부동산을 한족이 넘겨 받은 것이다. 결코 한족 자신이 마련한 부동산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다수가 소수에게 힘없이 빼앗긴 권력의 비평 말고는 능동적으로 한일이 없다. 한족에게 추앙을 받는 청조말의 손문(쑨원) ? 그 역시 "언행이 모순으로 가득 찼고 '허풍쟁이'로 불렸다".
반면에 인구 대비 1/20 도 안되는 한국의 경우,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유관순 등 국가를 위하여 자신을 초개(草芥-하찮게) 같이 여긴 의사들이 무수히 많다. 한족은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마음은 조금치도 없는 Tribe(종특)인 것이다. 요즘 전문가들의 표현으로 한족은 "아가리 파이터"이다.
중원에 존재하는 70여살 쯤 된 인민공화국이라는 행운아의 부상은 초기의 집단 지도체제로 인하여, 인재들을 정치와 상관없이 '일을 할 수 있게' 풀어놔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본다. 여기에 등소평의 열린정책인 흑묘백묘론이 이를 거들었다. 만약 중공이 몰락한다면 후대의 사가들은 그 원인을 분명 시진핑 주석의 독재집권부터 파고들 것이다.
중원의 주변국으로, 비교적 가늘고 기다란 정권을 지녔던 한국과 비교적 대륙의 영향을 덜 받았던 열도국 일본과의 인재관리 차이점을 비교해 본다면 ;
한국인의 특성은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론수렴의 문화가 있다. 조선은 출발부터 배불숭유(排佛崇儒) 주자학의 나라였고, 500년 조선의 지식인에게 주희(1130~1200)의 영향력은 공자를 넘어선다. 주자학, 즉 성리학은 인본주의가 바탕이다. 그러나 그늘도 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현실을 도외시한 채 공리공론을 일삼다가 나라가 나약해져 망국의 길로 접어든 것은 모두 성리학 때문이고, 그 원류에는 주희의 성리학이 자리잡고 있다는 인식이 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게 배어있다.
반면에, 일본은 구성원 전부가 획일화된 개성을 집단 최고의 덕목으로 보고, 조직 구성원을 지도자의 소모 도구로 여기는 것이 인재관리 방법의 다름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부상당한 일본군 병졸을 치료 보다는 현장에서 폐기하고 재보급 받으면 된다고 하는 무타구치 렌야, 후쿠시마 방사능 피폭자와 오염물의 후처리 등 인명을 소모품으로 경시하는 관행이 아직도 존재하는 게 일본 지도부의 세습적 통념이다. 현재의 자위대 역시 전투 손실 회복 용 의료 시스템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또한 무리에 안 보이게 잘 섞여있어야지 혹시라도 튀면 짤린다란 것은 일본인 그들만의 불문율이다. 대중의 힘을 한데 모으기에는 일본이나 독일 나찌의 동원방식이 효율적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는 똘레랑스(tolérance)란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도 물론 반상이라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으나 국가 유공자나 능력자 등에 대한 면천의 기회가 있어, 비록 가늘지만 신분상승이 가능했다. 반상이라는 신분과는 달리 삶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워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양반도 있었으며, 부자 상민도 있었다. 물론 조선 중기 이후 양반의 주민등록도 암암리에 매매가 있었다. 전문용어로 족보를 팔고 산다.
- 야는 족보에서 첨보는디 갸가갸가 ? ^^
그러나 대륙은 약육강식이 대부분이었고 민초들이 굶을 때 생긴 그 반작용이 혁명으로 갈음되어 국가가 망하거나 권력 이양이 이루어 졌다. 열도국은 권력이 당최 세습이라 과거제도가 없었으며, 열도의 민초는 출생신분을 절대 바꿀 수 없다. 우리의 고려시대 무인정치 같은 막부의 틀이 일본에서는 아직도 관념적으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세습정치 형태는 지금도 강력히 남아 있다. 권력은 세습이라는 것만 보고 살아와서, 온 세상이 그럴 것이라고 만 알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몽룡이라는 걸뱅이가 과거에 합격함으로 신분이 상승되고 권력을 잡아 권선징악을 하는 춘향전 스토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 어찌 상민(常人)이 시험 한번 보고 양반이나 고관대작이 될 수 있을 까 ? 야 너는 그게 말이 돼?
- 응 여기 한국에서는 말이돼 !
- "9번 시험봐서 꼬랑지라도 붙기만 하면 돼!, 우린 엄청난 쌤플도 있어" 동네 이장 후보로도 나온다니까. ^^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도 공민왕 6년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조선조의 사육신 생육신 모두 고시 출신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나약하다고 그리 욕을 먹고 있는 조선조 600년의 군권(君權-임금의 힘)이 봉건(Feudalism) 시스템 없이 중앙집권화 되어 있으며, 동시에 고시 출신이 자리한 신권(臣權-6조 참모의 힘)과 대등한 관계로 있었으며, 현대 정치 시스템의 전형으로 감사원격인 사간원도 있었다. 사간원의 성능이 좋거나 말거나... 좌우간 있었다.
나라가 작다고 자책하지 마라, 그들이 과하게 큰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통치 시스템내에는 현대적인 정치 시스템인 삼권분립의 권력견제 사상과 여론수렴이라는 개념이 깊이 배어들어 있어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밸브 기능을 한다. 이러한 현대적 정치 시스템을 우리의 좌+우에 있는 나라들은 지금에도 갖추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은 장기적이며 안정적 집권이 가능했다.
되짚기 싫은 이야기 이지만, 조선은 절체절명의 순간인 남한산성에서도 군권과 신권은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숙고했음이 기록되어있다.
이 어찌 조선을 정치 선진국, 인재관리 선진국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