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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3/21 13:37:24
Name 아난
Subject [일반] 예술취향, 예술(작품)의 가치, 예술비평에 관한 단상들 (수정됨)
2006년 10월 8일, 브릭의 소리마당 https://www.ibric.org/myboard/list.php?Board=isori 의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음악 이야기' 라는 글타래에 댓글들로 올렸던 것입니다. 길고 빡빡한 편이니 주의를 기울여 읽을만한 시간적/신경적 여유가 있으신 분들만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제 댓글을 촉발하거나 제글이 댓글인 본글과 댓글들도 저장해두었지만 그것들까지 올리면 글이 엄청 길어지는데다가 제 댓글들만으로도 쟁점이 무엇인지가 충분히 드러날것이라 자신하기 때문에 (제 글들이 그 글들의 요지를 정확히 전달한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제 댓글들만 올립니다. 혹시라도 글타래 전체를 읽고 싶은 분은 요청하시면 pdf 로 변환해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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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취향, 예술(작품)의 가치, 예술비평에 관한 단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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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다르면 취향도 다릅니다. 속한 계급과 직업과 교육이 다르면 취향도 다릅니다. 스스로 선택한 개인적인 삶의 구구절절들이 다르면 취향도 다릅니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기질과 한창 민감할 때의 생활환경이 다르면 취향도 다릅니다. 물론 취향은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초보적인 윤리의식을 막 갖추고 삶의 도리라는 것을 이제 막 배우고 깨치기 시작한 중학생은 잘쓰여진 무협소설에서 어느 정도 배움이 섞인 감동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토마스 만이나 카프카의 작품들을 읽고서 배움이 섞인 감동을 느끼기는 힘들것입니다. 그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경험이나 주인공들이 하는 고민은 전적으로 낮설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불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과 '능동'적인 삶의 경험이 쌓여 세상을 보는 눈이 깊고 넓어지면서 동시에 고민과 불만과 혼란도 많아지면 무협소설에서 배움이 섞인 감동을 느끼기 힘들어집니다. 대부분의 무협소설은 내가 이미 벌써 잘 느끼고 알고 올바르다고 믿는 것의 형상화일 뿐 나의 불만과 고민을 깊숙히 상담해주는 이야기나 현실에 결여되어 있는, 새로운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방신기의 노래만을 듣던 내가, 팝 음악만을 즐기던 내가 모던 재즈나 어떤 록 음악이나 클래시컬 음악'도' 들으면서 그것들이 더 가치있다거나 훌륭하다고'까지' 느낀다면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그것은 교육과 '능동'적인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해서 갖는 느낌들과 지식들과 판단들이 기껏해야 4-5분짜리 감미롭거나 감상적이거나 신나는 선율과 노랫말로 환기되고 표현되기에는 너무나 더 다양해지고 더 폭넓어지고 더 미묘해지고 더 정교해지고 더 격렬해졌기 때문에, 그래서 그 느낌들/지식들/판단들의 더 다양함/더 폭넓음/더 미묘함/더 정교함/더 격렬함에 상응하는, 더 다양하고 더 폭넓고 더 섬세하고 더 정교하고 더 격렬한 소리를 듣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머리와 가슴이 무겁고 넓어지면 우리의 삶에서 '4-5분짜리 감미롭거나 감상적이거나 신나는 선율과 노랫말'이 필요한 시간과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죽을 때까지 단순하고 분명한채로 남아 있는 고난과 고민의 영역들, 그저 단순한 감상과 위안만이 필요할 뿐인 영역들이 있습니다. 몇천 미터 고봉들을 올라다니는 재미만 알뿐 동네 뒷산을 가벼이 산책삼아 올라가는 즐거움을 모르는 이는 등반가일지는 몰라도 온전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정상적 인간들은 아무리 예술적 취향이 세련되고 고급화되도 동방신기 수준 이상을 찾지 않는 순간들 또한 즐깁니다. 내가 동방신기는 더이상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더이상 동방신기 수준은 필요없기 때문이 아니라 [동방신기 수준보다 별로 높지 않은] 무언가 다른 것이 동방신기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연륜이 쌓이고 여가생활의 여유를 누리면서도 예술적 취향의 폭이나 깊이에 별다른 확장이 없고 10대 말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들은 고민하고 느끼는 능력, 능동적인 삶을 사는 능력에 근본적인 제한이 있는 이들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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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 장르에 대해 다 취향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는 이상입니다. 클래시컬 음악을 바흐까지만 듣고 그것도 모자라 록이나 재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명작 소설은 끼고 살아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왜 훌륭한지를 못느끼거나 피카소가 왜 위대한지 못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음악은 엄청 폭넓고 깊게 들으면서도 미술이나 문학에는 꽝인 사람들도 있구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만이라도 예술 취향이 넓어지고 깊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 무교양한 생활환경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든 사정 때문에, 대중예술에 휩쓸리는 지배적 분위기 때문에 등등 이유는 많습니다. 전반적인 사정이 이러니 그저 조금 더 좋아하는 장르쪽에서 조금 더 시간을 내보시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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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들 사이에는 분명히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이 서열 매기기는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예술에 대해 남다른 감식안을 가졌다고 인정되는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의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에 의해 매겨집니다. 이 헤게모니 투쟁의 한 영역이 비평입니다. 감식안의 인정은 누가 해주는 것인가요? 이미 인정받은, 분파들로 나뉘어 있는 선배들이 해줍니다. 물론 이 서열매기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어떤 예술이 훌륭한 예술인가/지금여기서 창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예술적 과제는 무엇인가 등등의 예술규범적 문제들에 대한 일단의 다양한 답변들을 전제로 합니다. 이 답변들은 때로는 서로 적대적일 수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술 전문가들끼리 서로 으르렁대는 경우라도 어느쪽이든 이미 벌써 예술 전문가라는 인정을 받고 있고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크지 않은 이상 그들 양편이 지지하는 예술작품들 각각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예술계 내에서는 대략 비슷한 급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한쪽의 세력이 압도적으로 클 때는 다른쪽 입장에서 지지되는 작품들은 주변화되거나 무시됩니다. 과거 서구 미술에서 모더니즘의 시기가 그랬습니다.

예술작품들 사이의, 따라서 예술가들 사이의, 따라서 대중예술가들과 순수예술가들 사이의 서열은 그 서열나누기의 객관적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사회적으로 확립된 사실입니다. 나는 기존의 서열나누기에 객관적 근거가 있는지를 의심할 수 있고 나만의 서열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예술을 즐기는데 '서열'이라는 낱말은 아무 소용가치도 없어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는 그 서열이 교과과정과 국가의 문화정책과 사람들의 통념과 계층의 문화적 구분에 미치는 영향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나는 가능하면 그 서열에 맞추어 나와 나의 자녀들의 예술교양을 형성하는 것이 나와 나의 자녀들의 사회적 위신을 높여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회적 위신에 관심없어'라면 그것은 대체로 내가 그런 위신을 갖추는 것이 요구될 만한 계층이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을 자신만의 판단기준으로 줄세우기를 하려는 귀하와 같은 무모한 시도' 운운은 실정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 판단기준을 볼트님이 얼마나 반성적으로 자기화했느냐에 관계없이 그 판단기준은 사회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분명 형식적으로 예술을 권위있게 논할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 사이에서의 결코 자의적이지 않은 절차, 특히 오랜 세월 동안 이론비평및 실제비평을 거쳐 수립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비틀즈의 음악이 바흐 음악만큼 예술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음악 전문가들 - 일반 대중의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문제에서 그 의견은 계산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계산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은 비틀즈가 대학 강의실에 들어오기 시작한 현재까지도 여전히 극극소수이며 윤도현의 음악이 바흐의 음악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라면 전무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jbl님은 지금 볼트님한테 그 기준이 어떻게 자의적이지만은 아닌지, 그 기준이 무엇이고 어떤 객관적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하고 계신것인가요? 볼트님은, 음악미학자이고 음악비평가가 아니라면, 충분한 설명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누가 대신 나서서 충분한, 적어도 꽤 자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한다해도 jbl님 자신이 상당한 음악미학적 지식을 갖고 있고 음악비평가적 훈련을 거친 분이 아니라면 jbl님은 그 설명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들 사이에서는 두루 두루 좋아하는 사람들의 충분하지 않은 설명으로 충분합니다. 바흐와 비틀즈와 윤도현을 모두 좋아하고 즐기는 이들의 답변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그들 대부분이 바흐를 듣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술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이도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통념화되어 있고 어느 정도씩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실감도 하고 있는 이 사회적 사실로서의 서열에 과연 객관적 근거나 기준이 있겠느냐, '훌륭함과 우월함은 그런 제멋대로의 잣대로 누군가가 평가한 결과를 바탕으로 우위에 있는것을 의미한다'라는 논조(제 식으로 말하면 '전문가들 사이에서 말발 쎄고 쪽수 많은 인간들의 예술취향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일 뿐 그 예술취향이 정말로 우월한 예술취향이라는 실체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는 논조)의 의문을 제기한 것은 jbl님입니다. 부르디외를 동원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예술적 가치를 재는 객관적 기준따위는 없으며 그저 취향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 저는 아무리 세심히 읽어도 jbl님 주장이 이렇게 밖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 는 주장에 대해 먼저 상술하고 해명해야 될 분은 jbl님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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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소지가 있기에 몇 가지만 덧붙입니다.

1) 원칙적으로 말하면 제가 주장하는 것은 바흐>비틀즈>윤도현이 아니라 예술작품들의 질에 위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는 것, 비평은 위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 비평은 단순한 말싸움이나 쪽수 싸움이 아니라 설득을 위한 논증적 계기를 갖고 있다는 것, 어떤 예술작품들의 남다른 훌륭함이나 탁월함에 대해 아주 많은 수의 비평가들 사이에 상당한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 예술작품의 질의 평가에는 자격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자격이 없고 따라서 분명 느낌은 바흐>비틀즈>윤도현이지만 그 느낌의 올바름을 비평적으로 정당화할 능력이 없습니다. 아마 바흐의 음악이 비틀즈나 윤도현의 음악보다 더 풍부하고 더 다양하고 더 극적이고 더 경건하게 느껴졌고 더 신이 난다는 주관적 선호 표현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또한 저는 예술에서 더 유의미한 질적 차이는 장르들 사이나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사이보다는 개별 예술작품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여러가지 면에서 비틀즈의 노래가 슈만의 가곡보다 훌륭할 수 있고 비틀즈의 노래들보다는 롤링 스톤즈의 노래들이 더 여러가지 면에서 더 훌륭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저는 예술작품의 질적 차이를 재는 기준들이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정당화되거나 도전받고 모든 기준들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함축없이 기준들이 다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정전(Canon)은 재구성에 열려있어야 하고 무시되고 주변화된 작품들이 각광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저는 어떤 예술작품의 초문화적 내지 초역사적인 절대불변의 가치라는 개념을 부정합니다. 바흐나 베토벤이 우리 근대인들에게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가운데 속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이 과거나 현재의 전근대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까지 위대한 음악가로 여겨져야 할 필연성은 없습니다. 예술은 생활감정을 재료로 하고 있으므로 생활감정이 아예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한 문화권의 예술적 가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우리 근대인이 바흐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며 베토벤의 영웅적이고 극적인 음악도 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근대가 바흐의 근대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적 가치의 기준은 변화해가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그 변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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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예술취향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현실에서는 분명히 차별적으로 대우받는데 말이지요. 시장에서라면, 그리고 동등한 수요와 구매력을 전제한다면, 사람들의 예술취향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대접받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 두 전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성립한다 해도 시장은 예술적 가치가 재어지는 일차적 영역이 아닙니다. 그 일차적 영역은 자격있는 이들만이 발언권과 결정권을 분유하고 있는 예술계입니다. 현실적 의미가 아니라면, 규범적 의미를 갖는것인가요? 이를테면 나의 예술취향을 나와는 다른 예술취향을 가진 남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 이상의 사회에서라면 그 생각에 반대할 사람 없습니다. 제 자신도 원칙적으로 맞는 생각이라고 믿습니다. 또 자유민주주의 사회 이상의 사회에서라면 이 생각은 현실에 부합하기도 합니다. 그토록 자주 얘기되는 '표현의 자유'는 '예술취향의 자유'를 함축합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혹은 사회에 나오기만 하면 나에게 억지로 바흐나 셰익스피어나 피카소를 즐기라고 강요하는 제도나 인간들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현실에 부합하는 생각을 왜 강력하게 피력하시는 건가요? 혹시 소박하든 세련되었던 비평의 형식을 갖춘 내 취향의 우월성 주장/네 취향의 저열성 주장도 '강요'에 포함되는 것인가요?

내가 누구의 예술 취향이 더 고상하고 어떤 예술작품이 더 훌륭하고 어떤 예술가가 더 위대하다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내가 그 말을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을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나와 비슷한 눈과 귀와 생각으로 대하는 이들로, 나의 동지들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나의 동지들로 가득 채우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에 속합니다. 단,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나의 예술취향과 다른이들의 예술취향을 위계적으로 구분하고 그 구분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나의 정치경제적으로 더 높은 지위가 더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데 관심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대개 그 위계적 구분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나 그 기준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는 논변은 고도로 사변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자의적일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이유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전자의 이유라고 부정적인 것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과 세계와 자연을 대하는, 제가 엄청 싫어하는 관점과 태도와 감수성을 설득시키려는 시도(주로, 혹은 공식적으로는 지배적 비평과 예술교육을 통한 시도), 그래서 제가 정서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동감하기 어려운 이질적 인간들이나 적들^^이 제 주위에 더 많이 존재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시도들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저는, 혹은 예술활동의 사회적 존재 이유를 바로보는 저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시도들로 그 시도들과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주장하는 예술적 가치의 기준들과 그 기준들에 부합하는 예술작품들과 그 예술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예술적 취향이 왜 우리 모두의 더 행복한 삶에 더 기여하는지를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주로 후자의 이유가 작동해 이루어지는 예술적 취향의 위계화라면,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더더욱 당연할테겠지요?

흔히 예술이 진실 개념과 결부되어 왔던 것은 예술의 바로 이 실천적 성격 때문에, 예술의 이 사회적 인격 형성 기능 때문입니다. 예술은 이렇게 우리 모두의 더 행복한 삶을 위한 투쟁과 실천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은 마약으로 인한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행복'감'과 실제의 사회적 조건들과 관계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객관적인 행복의 잠재력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적 가치에 객관적 기준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고 너의 예술적 가치 기준보다 나의 예술적 가치의 기준이 더 객관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예술작품'들'은 어떤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미 벌써 언제나 특정한 편들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애호자를 갖는 예술작품들은 모두 나름대로 가치있고 그 가치에 우열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저 시장에서든 예술계 내에서든 현재 가장 애호되는 예술적 가치를 추인하고 있는 것 이상은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편을 들어야 하고 편을 들기 위해서는 내가 진실 쪽에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총과 칼과 주먹의 힘을 빌어 편을 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이런 주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술작품들과 모든 예술가들을 일렬로 줄 세울수 있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흐와 비틀즈와 윤도현을 줄 세울 수 있고 줄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바흐와 베토벤과 모짜르트를 줄 세울 수 있고 줄세워야한다는 주장을 함축하지 않으며 비틀즈에게는 있지만 바흐에게는 없는 좋은 것이나 윤도현에게는 있지만 비틀즈에게는 없는 좋은 것이 있다는 주장을 불가능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많은 예술작품들이 저마다 다른 이유들로 훌륭할 수 있고 그 다른 이유들 사이에 위계를 나눌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장르가 아예 다른 예술작품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우스운 짓입니다. 반면, 어떤 예술작품들은 다른 예술작품들보다 더 많은 이유들을 충족시켜 그 다른 예술작품들보다 더 훌륭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예술작품들은 다른 예술작품들보다 예술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점들을 더 적게 갖고 있어서 더 휼륭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경우들은 실제에서는 규범미학을 함축하고 있는 비평을 통해 설득되어야 합니다. 잘쓰여진 비평들을 많이 읽어본 이들이나 스스로 그런 비평들을 쓰는 이들은 비평문이 자연과학의 논문만큼의 합의가능성이나 입증가능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평을 계속하는 것을 의미있게 할 정도로는 설득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더이상은 설득이 안되는 지점들이나 수준들이나 경계들에 조우하는 것은 비평을 부질없는 짓으로 보거나 예술적 취향의 평등주의를 주창하게 하는 이유라기보다는 비평을 더 발전시키고 혁신시켜야 하는 이유이고 어떤 구체적인 실천으로 비평을 보충해야함을 자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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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후 관계에 있는 시대들 사이에는 같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살았다는 것 이상의 공통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뒷 시대의 어떤 사람들이 반동적으로 앞 시대를 그리워할 수도 있고 앞 시대에 뒷 시대의 어떤 사람들이 진정성 있는 이유로 좋아해야 할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앞 시대의 예술작품들이 뒷 시대에도 걸작으로 칭송받는 경우들에는 대개 이 세 사태 가운데 하나나 둘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살지 않는 시대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보다 더 잘 대변하고 표현하고 반영하고 문제시 할 수 없습니다. 그 시대들 사이의 차이가 크면 클 수록 더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의 시대를 그렇게 잘 대변하고 표현하고 반영하고 문제시 한 작품이 없다면 나는 과거 시대의 걸작들에 만족스럽게 매여있기보다는 갈증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바흐를 좋아하지만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나 바그너나 말러가 없는 클래시컬 음악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들의 음악 사이에서 생활감정과 세계를 대하는 감수성의 근본적이거나 미세한 차이들을 느낍니다. 후자들의 음악에는 바흐의 음악에는 없는, 우리의 더 근대적이고 더 현대적인 삶의 조건과 삶의 결을 가리키는 노랫말과 선율과 악기구성과 화음이 있습니다. 저도 바흐를 매우 자주 듣지만 누군가가 로미오님식으로 요즘의 비평적 예술 담론에는 매우 낮선 문장들로 바흐를 칭송할 뿐만 아니라 바흐의 음악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음악적 갈증을 못느끼고 베토벤 등의 음악의 더 동시대적 성격에 감흥할 수 없기까지 한다면 저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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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21 13:47
수정 아이콘
예술을 포함해 많은 부분에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계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어떤 경우는 꽤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가령, 클래식이 뽕짝보다 더 우월한 음악이라고 해서(그렇게 가정했을 때) 내가 뽕짝이 안끌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뽕짝을 좋아한다고 해서 무시할 문제도 아닌거겠죠. 최소한 매너의 차원에서. 막상 저도 그리 고급진 취향은 아니더라구요(특히 소설...판타지 소설만 봅니다. 클래식은 베토벤밖에 모릅니다). 게다가 취향의 폭을 넓히는 게 생각보다 많은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조건을 필요로 하기도 하구요.
21/03/21 13:54
수정 아이콘
본문에서 말씀해주신 내용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저는 어떤 의견들 사이의 위계를 주장할 때 열린 소통이 가능하고 무제한적 다원주의를 허용할 때 오히려 민주적 소통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내생각에, 내가 보기에, 내가 듣기에는' 이런 단서가 지나친 권위를 가지는 걸(또는 너무 강한 면죄부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생각인데, 틀릴 수도 좀 수준 낮을 수도 있는 내생각이죠. 지금 제가 말한 이생각도 틀릴 수 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주장"했기 때문에 틀릴 수도 있고 발전도 있는거구요.
LPL짤쟁이
21/03/2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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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경우에는 이해가 되지만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되는게 너무나 많습니다. 피카소가 점 하나 찍으면 100억 제가 점하나찍으먼 0원. 현대미술 비평가들은 그림에 의미는 작가의 유명도도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그나마 피카소는 다양한 화법에 잘그리는 사람이 특이하게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2D에 3D를 보여주는 시점을 그려서 이해가 갔습니다. 하지만 점점 현대 미술을 보면 볼수록 점만 찍는 사람이 10억 20억 받아 가더라구요. 처음작품도 점. 마지막 작품도 점. 왜 유명해? 점때문에 점이 왜 비싸? 유명하니깐. 현대 미술은 모순 그자체입니다. 경매장에서 1000원 하던게 갑자기 익명의 거부가 10억 부른것부터 갑자기 그작가의 작품의 값어치가 10억 이상이 됩니다. 그 작가는 똥을 싸도 10억 이상이구요. 이런것도 혹시 예술입니까?
21/03/2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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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의 시장가치는 예술적 가치로부터 다소간 상대적으로 독립적입니다. 작품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평적 합의가 나오기도 전에 잘 나가는 작가가 유행하는 - 특히 미술시장이 더 큰 해외에서 유행하는 - 스타일로 창작한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싼 값에 팔릴 수 있습니다. 신진 작가라도 비평가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큰 손들한테 유망할 것 같다는 평가를 받으면 잘 팔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판별하려면 해당 예술형식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해당 예술형식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비판적으로 축적된 감상경험이 필요합니다. 이 지식과 경험은 전문가들만 갖고 있기 십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대다수는 걸작이라는 미술작품, 특히 현대미술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실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내가 보고 듣고 읽기에 - 이 '나'는 비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 예술적 가치가 없는 작품들을 비평가들 다수와 시장 양자 모두가 떠받들 수도 있습니다. 예술적 가치는 자연법칙처럼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도 만장일치로 동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술적 가치의 기준은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구성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는 헤게모니를 잡은 예술적 가치의 기준을 비판할 수 있지만 자격 있는 나들의 비판만이 약간이나마 그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21/03/2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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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예술적 가치의 기준은 변화해가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그 변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예술 작품이 가진 여러 가치(작품 형식의 가치, 작품 내용의 가치, 사회적 가치, 교육적 가치, 시장 가치 등)들이 있지만, 말씀하신 미술계의 현상은 어쩌면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예술작품의 가치 중 오늘날에는 그 무엇보다 시장적 가치가 우선시 된 현상을 반영한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시장 가치와 미술계에서 인정하는 작품의 가치는 서로 다를 수 있고 또 독립적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술 작품은 단순히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거나 조롱하는 작품(개인적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뱅크시의 경우 자기 작품이 경매에서 낙찰되자마자 파쇄기에 갈려나가도록 제작했습니다.)들도 있습니다.
21/03/2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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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음악/미술에서 트렌디함/가치있다는게 얼마나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생각하면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가 신기하기도 하다가.
굉장히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다만 오독되기도 쉬운 글로 보이네요.
ioi(아이오아이)
21/03/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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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알이니 음악을 게임으로 바꾸면 왜 예술취향, 예술작품의 가치, 예술비평에 관심을 갖는지 보이죠

당장 리니지가 돈도 많이 벌고, 사람도 많은데 피지알에 리니지의 평가는 그건 게임도 아니다 니까
-안군-
21/03/2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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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지식의 저주랄까... 도 들어가죠. 예를들어 소나타와 론도를 구별할 줄 알고, 클라리넷과 오보에가 왜 다른 악기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이러한 지점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이런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도 동시에 느끼죠.
미술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전 솔직히 르누아르의 그림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더 가치있게 치는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만, 전문가들이 설명해주는걸 듣고 나면 왜 모나리자가 최고의 명작이라고 불리는지 이해는 할 수 있겠죠. 물론 전 모네나 르누아르의 그림을 여전히 더 좋아합니다만...
다시 음악으로 돌아와서, 독학으로나마 작,편곡을 곹부했기에 여전히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욕(...)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쁘걸의 롤린이 싫은건 아니에요. 솔직히 그냥 귀에 꼽고 다니기엔 용형이 작곡한 노래들이 모짜르트의 노래들보다 더 좋아요. 그냥 이런식으로 다양성을 인정해주면 좋겠...지만, 우리가 여러 사회,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한 온라인 토론에서 많아 보았듯이, 사람들은 그런식으로 넘어가는걸 용납하기 힘들어하죠.

깊은 사유가 느껴지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라프로익
21/03/2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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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장 좋아하는 바흐곡 하나 뽑은 다음에 시대별로 연주자별로 다 들어보고 느끼고 정보도 찾아보고 사색도 해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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