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는 본문은 안 쓰고 '각론'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본문에 넣으려다 흐름이 좀 애매해서 따로 빼게 되었습니다. 이 놈 쓴다고 본문이 막혀 있었던지라, 이놈 끝나면 빠르게 본문 마무리 짓겠습니다.
황교익이 '삼겹살은 일본에 팔고 남은 고기'라고 해서 논란이 있었지요. 정말 그럴까요? 2부에 걸친 빡센 팩트체크,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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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에 갈비가 있다면 돼지고기에는 삼겹살이 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1) 무슨 낙으로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겠는가. 최고의 소주 안주이자 서민의 친구이며, 광부와 교사와 공장 노동자의 건강관리 비법이기도 한 이 삼겹살에 얽힌 역사를 풀어보도록 하자.
삼겹살은 원래 세겹살이라 불렸다. 삼겹살이라는 명칭이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이지만2), 세겹살에서 삼겹살로 명칭의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는 신문, 잡지, 요리책 할 것 없이 세겹살이 대세였다3).
세겹살이든 삼겹살이든 맛만 있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런데 1970년대 이전까지는 삼겹이든, 살코기든 돼지고기 자체가 딱히 맛있는 고기로 여겨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소비량은 고사하고 도축두수 및 사육두수로도 소에게 밀렸던 것이 사실이다. 1930년이 되어서야 돼지 도축두수가 소 도축두수를 안정적으로 웃돌게 된다4). 50 kg 수준의 재래종은 말할 것도 없고 개량종 기준으로도 100 kg이 채 안 되던 돼지가, 당시 기준으로도 300 kg을 넘기던 소에 비해 도축두수마저 딸린다고 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선호하지 않았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요리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증보 9판)』에 보면, 소는 10여가지가 넘는 부위들로 자세하게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돼지는 달랑 비계와 세겹살로 나누어 적어 놓았을 뿐이다5). 부위별 구분이 불명확하다는 것은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며, 또한 조리법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음을 뜻하니, 당시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푸대접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푸대접의 와중에서도 삼겹살이 ‘그나마 나은’ 고기로 취급되어 왔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베스트셀러 요리책 『조선요리제법』은 세겹살을 ‘돈육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로 꼽고 있지만6), 71년의 한 기사에는 등심, 엉덩이, 세겹살 순으로 좋다고 나와 있다7).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만 해도 용도나 취향에 따라 제각각 다른 선호를 보였지, 지금처럼 ‘무조건 삼겹살이 최고’라 외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삼겹살이 구이계의 왕자가 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1970년부터 조사된 1인당 육류 소비량 통계를 들여다보며 이 문제를 풀 실마리를 얻어 보자. 재미있게도 돼지고기 소비량이 쇠고기 소비량을 앞서고 있으며, 1976년을 기점으로 돼지고기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976년은 이른바 ‘쇠고기 파동’이 있었던 해로, 쇠고기 공급이 크게 부족하여 소 좀 그만 먹고 돼지나 심지어 콩을 먹으라는 기사나8), 쇠고기 및 이를 대체할 돼지고기 등의 공급 대책이나 유통방식 개선에 관한 기사들이 쏟아져나오던 해이기도 했다9). 이로 미루어 볼 때, 76년부터 시작된 돼지고기 소비 증가는, 쇠고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쉬운 대로 돼지고기를 찾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결국 70년대 중반까지는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먹긴 했으되, 특별히 돼지고기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싼 맛에 쇠고기를 대신하여 먹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림 1. 연간 1인당 육류 소비량 변화 (1970~2016)> 돼지고기 소비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76년, 쇠고기 소비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1989년부터이다. 꾸준히 증가하던 고기 소비량을 한 번에 꺾어 놓았던 것은 IMF 경제위기가 유일하다. 2000년대 초에 답보상태를 보이던 쇠고기 소비량은,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하여 수입이 중단되면서 몇 년간 크게 감소하였다. 2007년부터 정체를 보이던 돼지고기 소비량은 2013년을 기점으로 다시 가파르게 증가하게 된다.10)
어찌됐든 삼겹살 붐이 시작된 시기는 돼지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던 1970년대 후반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삼겹살 붐이 시작된 이유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아마 가장 유명한 설은 ‘대일 수출 잔여육으로 삼겹살이 남아돌았고, 이걸 먹다 보니 인이 박혀 좋아하게 된 것’이라는 황교익의 주장일 것이다.11)
일본이 안심과 등심을 주로 먹는 것은 일식 돈까스 집에만 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일본에 돼지를 팔면 삼겹살이 대량으로 남게 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좋은 부위는 일본에 팔아 외화를 벌고, 불쌍한 한국 노동자들은 남아돌던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는 삼겹살의 슬픈 역사. 과연 정말일까?
미안하지만 이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우리나라가 돼지고기를 수출했던 것은 사실이다. 1962년 오리와 돼지를 홍콩에 수출했던 것을 시작으로12),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에도 돼지고기를 수출하게 된다. 하지만 한동안은 부분육이 아니라 돼지를 통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남는 부위가 생길 수가 없었다. 1968년부터는 부분육 수출이 시작되어13) 삼겹살이 남을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과연 우리나라가 삼겹살이 남아돌 만큼 돼지를 많이 수출했는가, 설령 그렇다 하여도 이 시기가 삼겹살 유행이 시작됐던 때와 맞아떨어지는가이다.
무역협회에서 제공하는 육류수출입 자료를 보면, 수출량이 해마다 널을 뛰는 가운데 78년부터는 국내 돼지고기 값이 뛰면서 대일 수출이 한동안 중단되기에 이른다14). 그래서 ‘수출하고 남은’ 무언가가 있을법한 해는 70년대 중 75,76,77년 딱 3개년도 뿐이다.
자, 그렇다면 이 3년간의 수출 물량이 ‘삼겹살이 국내에 남아돌도록’ 만들 만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식육마케터 김태경 박사의 계산에 따르면 1977년 일본에 수출한 4,758 t은 우리나라 총 돼지고기 생산량의 3% 정도에 해당하며, 안심과 등심, 뒷다리 위주로 수출했다고 가정한다면 전체 도축두수의 10~25% 정도가 대일 수출에 동원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15). 가격에 영향을 주어 수요를 끌어내기에 충분한 수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에서 등심과 안심이 사라지고 삼겹살만 남아돌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양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국내 돼지고기 가격 안정화를 위한 수출 중단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찌꺼기만 남기고 돼지고기를 팔아 외화를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 정치적 레토릭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수출을 재개할 때에는 국내 돼지고기 가격 하락을 막는다는 명분을 들고, 수출을 중단시킬 때에는 국내 돼지고기 가격을 안정화한다는 명분을 들었다는 것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16)
시기 문제는 또 어떠한가? 삼겹살 구이집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78~79년17), 소주에 삼겹살이 확고한 유행으로서 대중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초반18), ‘돼지고기 하면 삼겹살’의 공식이 생겨난 것은 90년대로 본다19). 그런데 정작 78,79년은 수출을 해서 삼겹살이 남기는커녕 우리가 먹을 돼지고기도 부족해서 상당한 양을 수입해왔던 해였다. 수출은커녕 고기가 모자라 수입을 해오는 판에 남는 삼겹살이 대체 어디 있었겠는가. 80년엔 거의 수출을 하지 못했고, 81년부터 3년간은 대일 수출 실적이 전무하다. 이 시기 삼겹살 구이의 유행은 ‘남는’ 고기로 벌인 싸구려 잔치가 아니라, ‘남의’ 고기까지 그러모아 벌였던 비싼 잔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돼지고기를 수출했던 것은 87년에서 99년 사이의 일이다20). 하지만 이 때는 이미 삼겹살의 인기가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던 상황이다. 돼지를 수출하던 와중에도 삼겹살만큼은 모자라서 수입해오던 것만 봐도 명백하다. 결국 이 시기의 돼지고기 수출은 국내에서 남는 안심과 등심을 일본에 ‘처리했던’ 것이지, 일본에 좋은 부위를 퍼주고 하위 부위인 삼겹살만 남겨 놓았던 것이 아니었다.
삼겹살은 ‘일본인이 고르지 않은 부위’가 아니라 ‘한국인이 선택한 부위’다.21)
<표 1. 돼지고기 수출입 통계 (1970~2010)> 비어 있는 칸은 수치를 찾을 수 없어 비워 놓은 것이다. 수입량에서 괄호 안의 수치는 삼겹살 수입량이다. 최근까지도 총 돼지고기 수입량의 절반 가까이를 삼겹살이 차지하고 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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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안도현, “퇴근길”
2) 『경향신문』, 「돼지고기와 무우볶음」, 1959.01.20
3) ‘세겹살’이 마지막으로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것은 1974.12.05. 『동아일보』에 실린 「값싸고 營養價(영양가)높은 돼지고기 調理法(조리법)」기사이다.
4)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5) 방신영, 『조선요리제법』, 증보 9판, 1939
6) ibid
7) 『경향신문』, 「겨우살이의 지혜」, 1972.10.31. “부위별로 돼지고기를 나누면 등심살이 제일좋고, 다음이 엉덩이살, 세겹살 등의 순으로꼽을수있다.”
8) 『경향신문』, 「쇠고기 파동 소비 절약 · 증식 서둘러야」, 1976.03.29.
『매일경제』, 「쇠고기 대용 단백질 함유 식품은」, 1976.03.25. 등 다양한 기사들이 나온다.
9) 서울시장이 국회에 불려가 쇠고기 가격을 시장에 맡길 용의가 있느냐는 추궁을 받기도 했고 (『동아일보』, 「쇠고기 파동을 추궁」, 1976.03.20.), 축산업 면세를 통해 대기업 참여를 촉진하자는 의견도 나오는 등 (『경향신문』, 「축산 면세 부활 검토」, 1976.03.20.) 다양한 반응들을 볼 수 있다.
10) 통계청 「양곡소비량조사」, 주요 농산물 1인당 소비량 추이. 1970~2007
http://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1285&stts_cd= 2007년 이후 자료들은
http://www.okdab.com 에서 발췌.
11) 알쓸신잡 5회 경주Ⅱ, 2017.06.30.
12) 『동아일보』, 「오리 사천수 향항에 수출」, 1962.01.10. “일개월에 이만수의 오리와 연간 삼십톤의 국산 돼지고기 쏘세이지 수출계약이 향항에 있는 중국인 업자들과의 사이에 체결”
13) 『동아일보』, 「돼지고기 수출」, 1968.07.12. “농림부는 지금까지 생돈으로 수출해온 돼지 수출방법을 바꿔 앞으로는 지육으로만 수출하기로 하고”
『매일경제』, 「밝아진 돈육 수출 일본서 부분육 요구로 수요 늘어」, 1969.06.16. “일본은 6백톤중 4백톤을 부분육으로 요구하고 있는데”
14) 『동아일보』, 「돼지고기 대일수출중단」, 1978.01.10.
『경향신문』, 「농수산부 제구실 못하는 가격안정대 정책」, 1979.05.04. “농수산부는 돼지고기의 대일수출을 재개할 방침이나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아 실현되기 힘든 형편이다”
15) 김태경, 『삼겹살이야기 첫번째, 삼겹살의 탄생』
https://brunch.co.kr/@brunch9uz5/1916) 『매일경제』, 「육류수급 대책 갈팡질팡」, 1978.01.09. “작년 봄 일시적으로 국내가격이 떨어지자 대일수출을 독려했다가 추석을 전후해서 값이 오르자 수출을 중단하는 단견을 드러내”
『매일경제』, 「농수산부 돈육 백톤 대일수출 - 농수산부 돼지값 하락 방지위해」, 1979.08.11.
17) 『동아일보』, 「횡설수설」, 1979.08.25. “그간 우후죽순처럼 주점가에 늘어가던 삼겹살 집에도”
1980년 개업한 1세대 삼겹살집 ‘개성집’의 하정복 사장 인터뷰. “삼겹살이 우리가 하기 한 1년 전에도 영동서 하는 집이 있었다.” 이규진,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2009,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p. 208
18) 『경향신문』, 「쇠고기값」, 1981.09.23.
“돼지삼겹살은 반주로 마시는 소주와는 뗄 수 없는 안주로 되어있다.”
『경향신문』, 「개그맨 김형곤군 돈지갑 잃고 울상」, 1982.06.04. “‘공포의 삼겹살’이란 별명을 가진 개그맨 김형곤이 최근 현금 20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려 울상.”
『동아일보』, 「지하철시대 (7) 지하 데이트」, 1983.06.02. 이들 철새파의 목적지는 대개 유행의 중심지인 명동이나 삼겹살골목인 삼각동, 종로대학인 관철동, 또는 낙지골목인 무교동이다.“
19) 87년 기사에서 삼겹살 값(1400원)이 불고기용(1300원)보다 비싸게 팔리던 것을 볼 수 있다. (『매일경제』, 1987.11.13.) 그러나 10%가 채 안 되는 가격 차이를 봐서는 삼겹살이 여타 부위에 대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93년 기사에 주부의 45.8%가 삼겹살을 선호한다는 기사가 보이고 (2위 목살은 19.3%. 『매일경제』, 1993.05.19. 양돈협 설문조사), 94년에 안심 520원 vs. 삼겹살 630원으로 20% 수준의 가격 차이를 보인다 (『매일경제』, 1994.02.03.). 이로 미루어 보아, 압도적인 삼겹살 선호가 나타난 것은 90년대 초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2000년부터는 삼겹살 가격이 혼자 엄청나게 오르는데, 비선호부위를 수출하여 채산을 맞추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안 팔리는 부위는 그냥 포기하고 삼겹살에 마진을 몰아서 매기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 천만달러 이상의 수출액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기간은 이때뿐이다. 00년부터는 구제역을 시작으로 돼지열병(구. 돼지콜레라)등이 해마다 발생하여 수출이 거의 중단되었다.
21) 삼겹살 수출이 한국 돼지고기 소비에 미친 영향은 분명 크다. 냄새를 없애기 위한 수퇘지 거세가 일반화되었고, 삼성을 위시한 대기업의 양돈업 진출이 이어지며 돼지 사육의 표준화가 시작되었으며, 90년대 들어서 정부 지원 하에 대규모 정육업체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일련의 현상들이 내수 증진이 아닌 수출 촉진을 위함이었음은 명백하다. 삼겹살 수출이 삼겹살 소비를 촉진시킨 공적은, 국산 돼지고기의 품질 및 유통 개선에서 찾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22) 관세청 통계연보 및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K-stat; stat.kit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