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무술에는 본격적으로 상대와 겨루기 전에 먼저 공격적이지 않은 초식을 통해 예의를 표하는 기수식(起手式)이 있다. 그것은 환영검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것은 시전자의 의도에 따라 충분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예컨대 지금처럼.
칠사매가 고개를 숙이며 검날을 뒤로 하는가 싶더니, 옆구리 아래에서 번개 같은 일격이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젖히며 맞찌르기로 대응했다. 그러나 칠사매의 검은 도중에서 멈칫하더니 방향을 바꿔 오히려 나의 손목을 노렸다. 속임수. 허초 후에 뒤따르는 실초.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끝에 힘을 주어 몸을 뒤로 날리며 연달아 두 개의 원영(圓影)을 그린다. 쌍륜접목(雙輪接木). 두 개의 원으로 나를 지킬 수도 있고 적을 공격할 수도 있는 공수겸장의 초식이다. 처음 것으로 공격을 쳐내고 두 번째 것으로 칠사매의 팔을 노린다.
첫 번째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원을 미처 절반도 그리기 전에 칠사매의 검이 또다시 변화했다.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몸을 앞으로 굴려 나의 검을 흘려보낸다. 그리고는 곧장 뻗어 나오는 오른발이 있었다. 미처 오른손을 거두어들일 여유가 없어 나는 왼손바닥으로 그 공격을 맞받았다.
탕!
내공이 깃든 다리와 손바닥이 부딪히며 강렬한 소리가 났다. 왼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공중에서 검을 반 바퀴 돌려 거꾸로 쥐었다. 그러자마자 바닥에 절반쯤 누운 칠사매의 배를 내려찍는다. 하지만 칠사매가 살짝 몸을 뒤트는가 싶더니 세 줄기의 검광(劍光)이 연달아 날아들었다. 그중 단 한 줄기만이 실초일 것이지만 창졸간에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검을 위로 치켜들며 그 기세를 빌어 뒤쪽으로 한 바퀴 재주를 넘어 거리를 벌렸다.
“아니, 검술 대결이 아니었습니까?”
귓가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무당파의 현경 진인이다. 다시 스승님의 대꾸도 들렸다.
“본파의 환영검법은 비록 검법이지만 각법(脚法)과 장법(掌法), 지법(指法)도 함께 있습니다. 검법이라는 형식에만 얽매이면 그 이치를 모두 펼칠 수 없다는 것이 조사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 검법을 쓴다면 오직 한 자루 검에만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파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나아가서는 오직 검만이 무학의 원종(元宗)이라 주장하며 다른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맨몸을 쓰는 권장각지법(拳掌脚脂法)을 대 놓고 천시하는 문파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환검문은 그렇지 않았다. 검(劍)이 주공(主攻)이되 때로는 오히려 검이 허초가 되고 권각이 실초가 되는 초식도 여럿 있었다.
나는 가볍게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앞으로 날렸다. 왼손을 들어 칠사매의 오른쪽 어깨를 낚아채려 한다. 칠사매는 오른쪽 어깨를 아래로 내리며 팔을 굽혀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그러나 내 공격은 허초였다. 난 급히 왼팔을 거두어들이며 오른손으로 칠사매를 비스듬하게 베어 갔다. 순간 칠사매의 눈이 살짝 빛나더니 놀랍게도 검로(劍路)가 급변하여 나의 검을 튕겨냈다. 뒤이어 칠사매의 발이 옆구리를 노렸지만 나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짝 피해낼 수 있었다.
내가 칠사매에 비해 가진 유리함은 팔과 다리가 길다는 것. 칠사매가 나에 비해 가진 유리함은 나보다 움직임이 가볍다는 것. 나의 장점을 살리면서 상대의 장점을 무력화하는 것은 무학의 기초였다. 나는 나의 검이 미치는 거리보다 가깝고 칠사매의 검이 미치는 거리보다 먼 간격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칠사매는 빠른 몸놀림으로 나의 틈새를 파고들려 시도했다.
칠사매가 몸을 낮추더니 스치는 듯한 보법으로 다가오며 연달아 세 번의 검격을 날렸다. 일매삼화(一枚三花), 세 번의 공격 가운데 단 하나의 실초가 숨어 있다. 나는 첫 번째 공격이 실초임을 알아채고 그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반격을 가하려는 찰나 번뜩이는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급히 검을 세로로 들어 두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허중실(虛中實). 허초 속에 또다시 실초가 숨어 있었다. 초식의 변화에 또다시 변화를 가한 것이다. 등골이 서늘했다.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내 잘린 팔이 비무대에 나뒹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감탄사를 내뱉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그 순간 호승심이 솟구치며 두려움을 물리쳤다.
‘나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등허리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서로 대련한 적은 무수히 많았지만 언제나 목검이나 날을 세우지 않은 검을 사용했다. 서로가 진검을 들고 생사를 넘나드는 대결을 펼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맹렬하게 돌격하며 검을 연달아 여섯 번이나 내리쳤다. 허초에 허초. 실초에 실초. 그리고 다시 허초와 실초. 칠사매는 허초를 흘려보내고 실초를 받아치며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반격을 나는 피했고, 재차 반격을 가했으며, 또다시 공격을 피하고 혹은 받아쳤다.
무아지경. 나는 검을 잊었다. 상대를 잊었다. 본능이 나의 손을 이끌었고 감각이 나의 몸을 움직였다. 허초가 실초를 만들어내고 실초가 허초로 돌변하는 검무(劍舞)를 펼치며 나는 나 자신조차 잊어갔다. 기쁨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또 하나의 경지를 넘어섰음을 나는 깨달았다. 내게 새로운 검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칠사매 또한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나는 검과 하나가 되어 흐름을 타고 나아갔다 물러섰다. 수십 합의 겨룸이 어느덧 백 합을 넘어서고 삼백 합을 넘기더니 마침내 오백 합을 돌파했다. 내게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게 보이는 것은 오직 칠사매의 움직임뿐이었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것은 검과 권각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그 외에는 천하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검을 똑바로 내뻗었다. 가장 빠른 경로를 따라 가해진 일격이었다. 칠사매는 막아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단지 고개를 비틀었다. 내가 놀라기도 전에 나의 검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베어져 허공에 흩날렸다. 나는 반대쪽 장을 내밀며 예상되는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칠사매는 반격하는 대신 오히려 뒤로 반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허공을 향하는 찰나 나는 다음 초식을 알 수 있었다.
일휘소탕.
맞받을 수 없었다. 단지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훗날 돌이켜 보면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행동처럼, 나는 나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나의 손이 그녀를 따라 공중으로 올라갔다. 왼손이 오른손을 따라가며 검 손잡이 아래쪽을 움켜쥔다. 그 찰나 기합과 함께 나는 검을 그대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일휘소탕이었다.
찰나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칠사매의 검격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아름답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직 일직선으로 내려치는 일격이 하늘과 땅을 한꺼번에 가를 기세로 밀어닥쳤다. 나의 초식도 동일했다. 나의 검 또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올곧게 공기를 갈랐다.
아니다.
같지 않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의 일휘소탕은 칠사매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다. 나의 초식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다. 털끝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망설임이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이 검의 움직임을 미세하게나마 둔하게 했고, 검로를 흔들리게 했다. 나와 칠사매는 동시에 검을 내리쳤지만 그것이 도달한 시간은 같지 않았다. 칠사매의 검이 나보다 빠르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는 웃었다. 아쉽지만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 할 만큼 했다.
내력이 실린 검과 검이 부딪히며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검 한 자루가 허공을 날았다. 거의 칠팔 장이나 날아간 검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정적이 남았다.
나는 멍하니 칠사매를 바라보았다. 왼팔 소매가 길게 베인 곳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피가 왼손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나의 손에 들린 검을 인식했다.
왼손을 텅 빈 오른손으로 감싸 쥐며 칠사매는 나를 향해 포권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제가 졌습니다, 대사형.”
새로운 장문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나는 거의 자시(子時)가 되어서야 간신히 사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수련장이었다. 어제처럼 횃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 빛 아래에서 한 사람이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 팔을 다쳐 붕대를 감은 탓에 움직임이 평소보다 둔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칠사매.”
“대사형.”
칠사매가 나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잔치가 벌써 끝났습니까?”
“......어째서야?”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칠사매가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대사형은 속일 수 없군요.”
“나만 그런 건 아냐.”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격렬했던 대련 탓인지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여전히 수련을 빼먹지 않는 칠사매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스승님은 알아채셨을 거야. 그리고 아마 대각 대사나 현경 진인도.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 순간, 일휘소탕과 일휘소탕이 격돌하고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그 마지막 순간에 칠사매는 손목을 살짝 틀었다. 본래대로라면 나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놓았어야 할 칠사매의 검은 대신 나의 검과 부딪혔고 그녀는 검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그녀는 깊은 상처조차 감내해야 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필시 나의 공력이 그녀보다 깊은 탓에 같은 초식으로도 승리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본 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승리를 양보했다.
“어째서야?”
나는 재차 물었다. 칠사매가 머리를 긁더니 뜻밖에도 혀를 낼름 내밀었다.
“화나셨습니까?”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단지 이유가 궁금해서.”
“장문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라고 말씀드리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장문인이 되면 책임이 주어진다. 무림의 명문정파인 환검문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때때로 나도 그 부담감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스승님께서 검이 아니라 논밭의 관리와 제자들의 뒤치다꺼리에 골치를 썩이시는 모습을 보며 장문인이라는 게 남들 생각처럼 편하기만 한 자리는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야?”
“아니요.”
칠사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열린 창 너머로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는 천하를 주유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진지한 목소리였다.
“환검문 밖에서 무림의 다른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며, 저의 경지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제가 어째서 검을 연마하는 것인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장문인을 결정하는 대결에서 패한 자는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수련을 하게 된다. 그것이 조사 이래로 내려온 불문율이었다.
“칠사매가 원한 게 그거였어?”
“예.”
그녀가 답했다.
“제가 원한 건 처음부터 그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애당초 제가 장문인 같은 걸 잘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하잖습니까. 그건 대사형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긴 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장문인이 되면 내가 문파의 불문율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곁에 남아 최선을 다해 보좌할 계획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이미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칠사매가 말했다.
“오늘 대사형 덕분에 저는 검의 더 깊은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돌아올 거지?”
“예?”
그녀는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나는 반복했다.
“환검문으로 다시 돌아올 거지?”
“......환검문은 제 고향입니다.”
칠사매가 대답했다. 나는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럼 잘 다녀와.”
나는 말했다.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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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안에서는 저 뒤에 더 붙어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냥 잘라냈습니다. 대충 칠사매가 손목을 비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한 대화라든지, 칠사매가 문파를 떠나는 모습의 묘사라든지 그런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괜히 잘랐나 싶기도 하네요. 그걸 붙여두었으면 지나친 졸속마무리로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