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날이었다. 장문인의 칠순을 축하하는 잔치의 준비로 제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바삐 움직였다.
원체 떠들썩하니 남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스승님이었다. 심지어 환갑마저도 무림동도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폐관수련을 핑계 삼아 슬쩍 지나가버렸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우리 제자들도 녹록치 않았다. 나를 필두로 한 일곱 제자들이 나서서 칠순마저 그대로 넘어가는 건 현 무림의 무수한 선후배들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또한 제자들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라고 우리는 강변했다. 스승님은 급기야 역정을 내기까지 했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스승님도 마지막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고희연(古稀宴)의 개최는 받아들이마.”
스승님은 여전히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은 채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한 문파에서 절대 세 명 이상은 초대하지 마라. 안 그래도 좁은 산이 북적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마음 같아서야 오대문파(五大門派)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의 잔치를 벌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문파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요, 제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문파의 명성도 비록 소림이나 무당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천하에서 열손가락 안에는 넉넉히 들어갔다. 그러나 스승님의 태도는 완강했고 결국 우리 제자들은 그 정도 선에서 타협해야 했다.
환검문의 대제자(大弟子)이자 장문인대리로서 스승님의 손님맞이와 잔치 준비는 응당 내가 맡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칠순 잔치의 마지막 순서는 차기 장문인을 정하는 검술 대결이었다. 그 준비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사제들의 배려로 나는 행사 준비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물론 칠사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스승님의 칠순을 맞이하는 날에도 내가 행사 준비를 하는 대신 방 안에 정좌한 채 내력을 순환시키고 있는 이유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사제(二師弟)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사형. 이제 나오실 때입니다.”
“벌써 신시(申時)인가?”
“예. 무림의 선배님들께서도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이사제가 간단히 보고했다. 모두 예순두 개의 문파에서 백육십삼 명에 달하는 축하단을 보내왔다. 그중 장문인이 직접 찾아온 곳도 무려 스물여덟 곳이나 되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스승님의 높으신 명성에 절로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거의 서른 곳에 달하는 문파의 장문인이 한 곳에 모이는 건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나는 약간 긴장감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 많은 선배들 앞에서, 그 무수한 고수들 앞에서 나의 검술을 펼쳐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짐직한 것인지 이사제가 살짝 웃어 보였다.
“긴장되시는 모양입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칠사매는 어때?”
“대사형께서는 칠사매가 긴장하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사제의 반문에 나는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천만에. 그래. 그 아이가 그럴 리 없지.”
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침상 옆의 검을 집어들었다.
“고마워, 이사제.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어.”
이사제는 씩 웃으며 앞장섰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좁은 복도를 지나 마침내 넓은 연무장으로 나섰다.
장관이었다. 항상 한적해 보였던 너른 마당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잇대어진 차양 아래로 수십 개나 되는 상이 놓였고 다시 수백 개의 의자가 늘여져 있었다. 엄청난 양의 음식은 딱 봐도 정성들인 태가 역력했고 은은히 풍겨오는 술 향기는 비장(秘藏)의 물건이 분명했다.
나는 차양을 올린 기둥 사이의 길로 나아갔다. 스승님은 한가운데 위치한 상에 앉아 계셨다. 양쪽에 앉은 사람은 나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왼쪽의 승려는 소림사의 부방장이자 나한당(羅漢堂)의 당주인 대각(大覺) 대사였고, 오른편에 앉은 도인은 무당삼검(武當三劍)의 일인으로 꼽히는 현경(玄景) 진인이었다. 그 외에도 스승님과 친밀한 관계인 숭산파의 장문인인 벽허자(碧虛子), 신선도의 도주(島主)인 황의사, 곤륜파의 장문인으로 멀리 서역에서 온 피지알리일(避智斡里壹)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명성이 쟁쟁한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아챌 수 있었다. 모두 검을 주력으로 쓰는, 검법에 능한 자들이었다. 모두가 순수하게 스승님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온 것만은 아니었다. 무림에 명성 높은 환영검법을 직접 목도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음이 분명했다.
“오. 왔느냐.”
내 도착을 알아챈 스승님이 손짓하여 나를 불렀다. 나는 멀리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가까이 다가가 포권하며 선배들에게 두루 예를 갖추었다. 선배들의 시선이 나를 꿰뚫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것은 중요한 대결을 앞둔 후배에 대한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스승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부담가질 것 없다. 그저 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여 주거라.”
“알겠습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손아귀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칠사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칠사매의 얼굴은 여전히 해맑기 그지없었다.
나는 비무대 한쪽에 섰다. 칠사매가 반대편 끝에 자리 잡았다. 오른손에 느슨하게 검을 들고 양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 채 편하게 선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 차 있던 경내가 지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에 손을 댔다. 손바닥에 와 닿는 익숙한 감촉과 함께 긴장감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나는 본래 장사치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대대손손 물려받은 작은 포목점을 크게 일으켜 모두 서른일곱 곳의 분점을 내며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거부(巨富)로 성장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마흔이 넘어서야 뒤늦게 본 하나뿐인 자식이 장사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아들은 주판을 놓는 대신 나무작대기를 휘두르며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에 골몰했다.
아버지는 이러다가 대를 잇는 건 둘째 치고 자식이 사람 치는 건달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당시 열 두 살이었던 나를 환검문의 제자로 밀어 넣는 결단을 내렸다. 불과 한 달 전에 새로 취임한 장문인의 직계 제자로 삼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문파에 삼천 마지기의 논밭과 삼백 마리의 소, 그리고 은자 십만 냥을 기증한다는 조건을 덧붙여서.
일개 문파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으리라. 더군다나 별다른 부담도 없었다. 장문인의 첫째 제자가 으레 적통을 이어받곤 하는 타 문파와는 달리, 환검문은 이백여 년 전 창설되었을 때부터 항상 가장 강한 제자가 차기 장문인이 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환검문의 계승자는 제자들의 검술 대결을 통해 결정된다, 그것은 결코 어길 수 없는 조사(祖師)의 유언이었다. 그러니 어디선가 굴러들어온 내게 대제자의 자리를 내주더라도 딱히 문제될 건 없었다.
나의 스승님은 그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고 훗날 회고하기를 불과 이틀 후에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열 두 살짜리 꼬마가 평생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든 빼어난 자질을 지녔음을.
거상(巨商)인 아버지의 눈은 적확했던 것일까. 나는 환영검법을 처음 접하자마자 그대로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내게는 나조차도 몰랐던 자질이 있었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자질이. 입문한 지 고작 사 년이 지났을 때 이미 환검문 내에서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검술로 내게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십 년이 지났을 때 스승님은 자신조차 능가하는 데 성공한 뛰어난 제자를 키워낸 것을 자축하며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그 누구도 내가 차기 장문인이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때쯤 스승님은 일곱 번째 제자를 들였다. 부모를 잃은 고아였고 여자였다. 그녀가 스승님의 제자로 거두어진 것도 우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해가 흘렀을 때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일흔 살이 된 스승님에게는 거의 비등한 실력을 지닌 두 사람의 제자가 존재했다. 서른네 살 된 남자 제자와, 고작 스물한 살인 여자 제자였다.
비무대 반대편에 선 칠사매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카락도, 번거로움을 막고자 소매를 끈으로 질끈 동여맨 우스꽝스러운 옷매무새도 평상시 그대로였다. 헐렁거리는 옷은 그녀의 깡마른 몸을 감추지 못했다. 바짓단은 수련장 바닥에 수만 번이나 스쳐 흡사 걸레처럼 헤진 상태였다. 검을 들지 않은 칠사매는 언뜻 보기에 농사를 짓고 소를 치는 농가의 평범한 아낙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손에 검을 든 그녀는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나도 귀가 있는 사람이었다. 칠사매의 실력이 급격히 성장한 이후로 문파의 높고 낮은 제자들이 쑥덕이는 소리는 내 귀에까지 들려 왔다. 개중에는 순수한 걱정도 있었고 비웃음 섞인 빈정거림도 있었다.
‘저러다가 대제자가 밀려나는 거 아니냐?’
‘이러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여자가 차기 장문인에 오를 꼬락서니군.’
‘대사형의 속이 새까맣게 타고 있겠는데? 칠사매가 정말 밉겠어.’
‘자기도 어린 나이에 나이 많은 사람들을 제쳤으니 이제는 거꾸로 당할 때도 되었지.’
그러나 그렇게 수군대는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애초에 나는 장문인 자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 내가 검법의 수련에 매진한 것은 오직 환영검법이 나를 매료시켰던 까닭이었다.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장문인 자리 따위는 원하는 사람 아무에게나 줘 버려도 나는 아무 상관없었다. 내게 장문인의 지위가 주어진다면 그건 단지 내가 칠사매보다 강하다는 증명일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칠사매를 미워하거나 증오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칠사매가 좋았다. 환영검법에 있어 유일무이하게 나와 비등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경쟁자인 동시에, 적어도 하나의 초식에 있어서만큼은 나보다 분명 반 발짝 앞서 있는 그녀의 존재가 내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나의 지금 경지는 오로지 그녀라는 경쟁자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비무장 건너편에서 칠사매가 미소 짓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주 웃어보였다.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래. 애당초 긴장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승패 따윈 중요치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대결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도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였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단지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펼쳐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즐거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무(比武)의 시작이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오타가 있네요.
"거상(巨商)인 아버지의 눈은 [적확]했던 것일까." - 정확이겠죠?
헐~ 사전을 검색해보니 [적확하다(的確--) 뜻 : 조금도 틀리거나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고 확실하다.] 로 나오네요. 뻘쭘~ ^^;;
인물의 성격과 나이차이가 다르지만 군림천하의 진산월과 임영옥 같군요. 군림천하의 종남파에서 장문인의 딸인 임영옥이 실질적인 검술의 일인자였죠. 진산월이 삼 년 동안 석굴에서 피나는 수련으로 검정중원을 깨닫고 종남검법의 새로운 체계를 완성하기 전까진... 물론 이 이야기는 내용이 전혀 다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