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말에는 또래답지 않은 '힘'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하면 시덥잖게 넘어갈 말도 허투루 들을 수 없게 하는 마력 같은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이 녀석의 진중한 언행 때문인지, 아니면 말쑥한 외모에서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녀석의 말에는 팥으로 메주를 쏜다해도 믿게되는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녀석의 말에 '니가 감히?'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가도,
끝에는 '설마.', 혹시.'가 붙는 것이었다.
"안 믿는 눈치네."
녀석이 벙쪄있는 내게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확실히 쉽게 믿기도 어려웠다.
아무리 녀석의 말이라고 해도, '오히려 쉬울 것 같다는 상대'가 무려 주은호였다.
학교의 여신. 완벽한이라는 수식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나 같은 범부들은 어지간해서는 말 한 번 걸어보기도 어려운,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애석하게도 '오르지 못 할 나무', 그 자체였다.
"혹시 너도 주은호를 좋아하는 거야?"
"글쎄, 남자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는 뜬금없는 녀석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은호와는 제대로 대화해본 적도 없다. 같은 반이어서 무심코 그녀를 지켜봐왔던 것도 아니다.
단순히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주은호라는 사람을 겪어보지도 않고, 내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제야 은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온전히 깨달았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습지만, 주은호란 사람은 아마 나의 존재 자체도 모를 것이다.
비참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외모가 예쁘다는 이유로, 모두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남자라면 누구나(나를 포함해서) 은호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 감정인데 타의에 휘둘려 좋아하는 척을 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아니다. 이건 좋아하는 게 아니네. 그냥 연예인을 보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녀석은 담백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 그거야. 주은호는 그냥 주은호일 뿐이야. 사람들이, 소문들이 만들어 낸
환상 속의 누군가가 아니지. 아직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걸 깨닫는 게 주은호라는 사람의 마음의 열쇠를 얻는 가장 첫 단계가 아닐까 싶다."
팔꿈치 언저리에서 짜르르한 전기가 흘렀다.
주은호는 그냥 주은호일 뿐이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나는 주은호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닌, 만들어진 허울 따위를 좋아하고 있었다.
관계보다는 대상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깨닫고나니 원래도 컸던 녀석이 더 커보였다.
놀랐다. 도저히 같은 또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가 느껴졌다.
설령 녀석의 말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생각의 방법이 유별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남자들은 첫 단추도 꿰질 못하니, 주은호에게 다가가 말도 걸기 어려웠겠지.
어렵게 용기를 냈다해도, 주은호 입장에서는 호감이 생길래도 생길 수가 없었겠지."
녀석의 한 쪽 입꼬리가 조소처럼 말려 올라갔다.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녀석은 은호에게 차인 남자들을 비웃는 게 아니었다.
단지 녀석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을 맞닥뜨린 것 뿐이었다.
이럴때마다 이상하게 나는 녀석에게 말려들었다.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하루살이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알면서도 녀석이 설계한 현장의 인부가 되었다.
"니 말이 다 맞다고 쳐도, 고작 그런 걸로 주은호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까지 녀석의 설계일지 몰랐다.
하지만 주전자에 담긴 물처럼 끓어오르는 호기심은 통제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주은호의 마음을 사긴 어렵겠지..."
"그럼?"
나는 뜸들이는 녀석 보챘다.
"아직 주은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바가 얼추 맞다면, 사귀는 것도 마냥 허황된 얘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하하..."
그것은 일종의 선언같기도, 주문같기도 했다.
나는 탄식처럼 헛웃음을 뱉어냈다.
아무리 녀석이라지만, 이렇게나 파격적인 말을 어떻게 표정변화 하나없이 말 할 수 있는걸까.
그 주은호를 사귈 수 있다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녀석의 말을 인정했다고 해서 모든 의구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작고 어렸던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외모나 평판 따위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 애써도 어느새 머릿속으로 주은호와 녀석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아직 의심하구 있구나."
"그야 뭐..."
"음."
나의 미심쩍은 태도에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해야 이 놈이 나를 믿을까 궁리하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는 지 녀석은 말아쥔 오른손을 왼손바닥에 쳤다.
"역시 가장 확실한 건 보여주고거겠지."
"뭐?"
"내기하자."
"뭘?"
"나는 내가 주은호와 사귀게 된다에 걸게."
"...!"
4월 중순의 초록 봄. 나는 돋아나는 새싹처럼 경악했다.
내가 뭘 들은거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녀석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한다고?"
"응. 너는 사귀지 못한다에 걸어."
"내기라면, 뭘 걸어야 하지?"
목석같은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 그랬을까. 지금은 단지 추측할 뿐이다.
초록 봄바람이 잔잔한 호수에 살랑였던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단 하나의 의심도 좌시할 수 없었던걸까?
확실한 것은 '무언가'에 내기까지 걸 정도로 녀석 특유의 흥미가 발동했다는 것이다.
"생각, 믿음?"
"뭐?"
내기에 뜬금없이 생각과 믿음을 걸겠다니. 좀처럼 녀석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긴다면, 내가 맞았던 거고, 그 의심의 눈초리도 사라지겠지."
"내가 이기면?"
"그럼 내가 제대로 쪽팔린거지. 제대로 주은호에게 차이고 전교에서 알게 될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녀석은 나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키득거렸다.
녀석이 소리를 내어 웃을 줄도 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정말로 이 내기를 할까싶은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언제부터 시작인데?"
내가 할 일이라곤 구경 뿐이 없을텐데, 묘한 기대감에 나도 모르게 녀석을 보챘다.
"지금!"
언제나 그랬지만, 녀석은 정말이지 기대감만큼은 저버리는 일이 없는 놈이었다.
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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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자꾸 늘어지고 늘어나는 이유 무엇...?
이제 3편으로도 완결을 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ㅠㅠ
목표는 제발 깔끔하게 10편 이하로 끝내고 싶습니다.
(뼈대만 짠 얘기에 아주 약간의 살만 붙여 쓰려 했는데, 자꾸 살을 덧 붙이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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