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 이건 무조건 백퍼센트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희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싸늘할 리 없으니까.
불같이 화난 소희의 모습은 익숙하지만, 이렇게 차게 식은 소희의 모습은 낯설었다.
뭔가 평소랑 달리 정말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닌데?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없다고했잖아. 왜 그래?"
그러니까, 그 표정 좀 풀고 얘기하라고.
욱하는 심정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꺼내선 안될 것 같은 직감에 억지로 꾹 눌러 참는다.
솔직히 왜 이렇게까지 소희가 차갑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정말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어떻게든 용서를 구하겠지만 뭘 잘못한 건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후우. 미안한데 나 먼저 들어가볼게."
소희는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머리속에서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봐도 도대체 나의 어떤 행동이 소희를 화나게 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오늘 즐거웠어요. 연주야, 은성아 나중에 기회되면 또 보자."
소희는 내게 말할 때와는 달리 연주와 은성이를 향해 싱긋 웃어보이고는 유유희 자리를 벗어났다.
"저.. 현우 오빠."
"응?"
"따라가야하지 않을까요?"
글쎄. 솔직히 '내가 왜?'라는 심정이 먼저 든다.
그와 함께 이대로 소희를 혼자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도 문득 들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소희를 따라가자니 옆에 앉은 수영이에 눈에 밟혔다.
나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있는데, 나 빼고 초면인 사람들 사이에 두고 가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영이가 빙그레 웃어보였다.
"소꿉친구분이 저렇게 화났는데 따라가서 안 풀어줄거에요?"
"응?"
"저는 여자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토라져도 잘 달래주는 남자가 좋던데."
"아. 잠깐만 있을래? 금방 갔다 올게!"
그래, 일단 내가 뭘 잘못했든 안했든 소희와 얘기는 해봐야겠다.
수영이의 말덕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현우가 사라지고, 테이블에 고요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에효. 현우 오빠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고요한 적막감을 깨며 은성이는 좌우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게... 선배는 참..."
"하, 저 자식 진짜 친구지만..."
연주와 주찬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은성이의 말을 거들었다.
"?.. 뭐야, 뭔데?"
그 와중에 현중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자기만 빼고 다들 뭔가 알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휙 젓고 있으니 자신만 소외된 기분이랄까.
"에효. 너도 진짜 답이 없다. 답이!"
주찬이는 현중이가 불쌍하다는 듯이 그 탐스러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아, 진짜 뭔데요! 나만 빼고!"
- - -
잽싸게 술집에서 튀어나왔지만, 소희의 모습이 골목에 보이질 않는다.
나보다 짧은 걸음인데도 그새 여길 벗어났나.
알 수 없이 커지는 불안감에 걷던 걸음이 빨라지고, 이내 뜀박질로 바뀌었다.
골목을 벗어나 저만치 보이는 소희의 모습에 소리친다.
"은소희!"
잠시 걸음을 멈칫한 걸 보면, 분명히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텐데
소희는 마치 보란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간신히 소희의 손목을 낚아챈다.
"야! 은소희. 내 말 안들려?"
"놔."
힘들게 잡았더니 돌아오는 건 전보다 더 싸늘한 반응이다.
순간 소희의 반응에 참았던 억하심정이 터져나온다.
"오늘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그랬잖아. 너답지 않게 왜 이러는데?"
"놔. 놓으라고!"
소희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알았어. 놓을테니까 얘기 좀 해. 잠깐이면 되잖아!"
양 손을 위로 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소희는 제 분을 못 이기겠는지 잔뜩 씩씩거리고 있었다.
"너랑 할 얘기없으니까. 그냥 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얘기 좀 하자."
다시 뒤돌아서서 가려는 소희의 팔목을 잡는다.
"놓으라고! 네 잘못 하나도 없으니까! 그냥 내가 병신, 바보인 거니까. 좀 꺼지라고!"
이렇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소희는 처음이다.
생전 처음 겪는 낯설음에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른채 멍할 뿐이다.
"왜... 그러는데..."
"하아..."
소희는 답답하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진짜,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거야?.. 아니다.. 니가 그럴 깜냥이 될 리가 없지. 이 눈치 없는 놈아!"
소희가 꽉 말아쥔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댄다.
나는 그런 소희의 양손을 낚아챘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그래 진짜 내가 문제다. 다 내 잘못이야. 어디 이렇게 답도 없이 눈치도 없는 놈을 좋아해서... 놔. 갈거야."
"뭐?"
순간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충격에 멍해진다. 지금 내가 뭘 잘못들은건가 싶어서.
"놓으라고!"
"소희 네가 날 좋아한다고?"
"다시 말하기 싫으니까. 놔. 갈거야."
나도 모르게 움켜쥐고 있던 소희의 손목을 놔버렸다.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항상 같이 지내던 소희의 고백은 놀람을 넘어서 충격이었다.
소희가 설마 나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순간 소민이가 매번 꺼내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 매형은 형뿐이라고!'
'우리 누나도...!'
"하하."
벙찌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었어?
멀어지는 소희를 잡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소희가 감정이 격해질 정도라니.
나는 뭘 어떻게 해야할까.
선뜻 쫓아가 소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를 여자로써 좋아하는지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친구로서는, 우스갯 소리로 무섭다며 소악마라고 별칭을 붙였지만 좋아한다.
하지만, 여자로써는 모르겠다. 한 번도 소희를 여자로 의식하고 행동한 적이 없으니까.
소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마냥 서있을 뿐이었다.
43끝...
44에 계속...
- - -
후.. 완성도 보다는 성실연재부터 해야하지 않나 반성합니다.
질려서 떨어져 나가시고, 안 읽으셔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읽어주시고 응원남겨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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