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간 시라쿠사를 지켜온 에우리알로스 요새가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였다.
그러나 에우리알로스의 옛터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일요일 아침. 맑은 햇살이 베란다 통유리를 지나 거실을 푸근히 감싸 안았다. 동장군도 빨간 날에는 쉬는 걸까? 지난 밤 창문을 두드리던 매서운 바람도 자취를 감추었다. 뽀글머리 파마를 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소파를 등지고 바닥에 앉았다. 다리를 덮은 담요가 보일러의 온기를 가지런히 모아주었고, 통유리를 건너온 햇살이 아주머니의 등을 따스히 보듬었다. 그 상태로 귤을 까먹으며 <동물농장>을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사치이자 행복이었다.
"와장창."
사치는 죄악이라더니, 징벌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아주머니는 황급히 소리 난 곳으로 달려갔다. 딸아이가 바닥에 떨어진 액자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멀쩡히 매달려있는 액자는 왜 떼느라고 박살 내고 앉았냐."
"..."
딸은 대답이 없었다. 긴 머리가 푹 숙인 머리를 가리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녀리게 떨리는 어깨가 그녀의 표정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왜 울어? 다쳤어?"
"더는 달 일 없어서... 그래서 내리려다가. 못에 걸려서. 잘 안 빠져서 당기는데..."
"아니 왜? 무슨 일인데? 승희야. 이리 와봐. 유리 조심하고. 이리 와서 엄마한테 말해 봐."
"오빠가... 헤어지재."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사귄 지가 몇 년인데?"
"6년."
"그렇게 사귀어 놓고 왜 헤어져!"
"어제 말인데..."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하필 어젯밤부터 시작된 생리가 밤새 배를 쿡쿡 쑤셔대는 통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그래도 직장인이 별수 있나 출근해야지. 그나마 지하철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 들숨 날숨을 정돈하자 아픈 배가 조금은 진정되었다. 주중이었으면 사람에 치이고, 생리통에 치이고, 공복에 치여 출근하면서 녹초가 됐으리라. 그래 좋게 생각하자. 그나마 토요일이라 다행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다 집에 있느라 이리도 한산하니 얼마나 좋은가. 하...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럽다. 왜 나는 남들 다 쓰는 생리휴가도 못 쓰고 주말에 출근까지 해야 하나.
출근하자마자 100m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감사는 2주나 남았지만, 부장은 조급해했다. 똑같이 생긴 서류를 반년 어치나 뒤적이다 보니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이대로 계속하다가는 쓰러지겄다... 싶을 때쯤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한숨 돌릴 때가 되니 다시 아랫배가 쿡쿡 쑤셔 왔다. 입맛은 없었지만 어거지로 밥을 쑤셔 넣었다. 밥심이라도 있어야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야... 승희 씨는 밥 먹는 거 보면 아주 장군감이야. 히프 봐봐. 애도 쑴뿡쑴뿡 잘 낳겄어. 술도 그렇게 잘 먹으면 얼마나 좋아?"
"... (우적우적)"
김 차장 개저씨 씨발새끼. 나만 보면 궁둥짝 말고 할 얘기가 없냐? 허리를 반절 접어서 아가리랑 똥구멍을 꼬매불라.
"에... 승희 씨 또 삐졌어? 사람 무안하게 대답도 없어."
"아니요. 입이 꽉 차서요. 밥풀 튈까 봐..."
"허허. 이럴 때 보면 천상 여자야. 허허."
그리고 넌 천상 개저씨다. 이 씨발새끼야!
주말 근무는 퇴근 시간을 지나도 계속되었다. 저녁도 못 먹고 죽어라 뺑뺑이 돌다 보니 어느새 7시였다. 눈치 없는 부장은 오늘 같은 날에는 회포를 풀어야 한다며 달려 보자고 만세를 불렀다. 이대로 회식까지 끌려갈까 봐 절망에 허우적대던 순간, 반가운 전화벨이 울렸다.
"승희야. 오늘 잠깐 보자. 나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그럼 같이 저녁 먹을까?"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아니. 회사 근처 카페서 보자. 골목길에 있는 조용한 곳. 너가 좋아하는 데."
"그래. 일단 만나서 정하자."
나는 다시 동문서답을 큰 소리로 뱉었다.
"부장니임. 저 오늘 남자친구가 중요한 일로 보재요."
"아니 승희 씨는 맨날 그렇게 뺑끼야?"
개저씨 김 차장이 또 지랄이다.
"그래. 회포도 좋지만, 승희 씨 이제 결혼도 생각해야지. 오늘은 봐 줄게 어서 가봐."
"진짜 부장님 최고!"
"대신 좋은 소식 좀 가져와. 요즘 좋은 일이 없잖아."
"네. 그럴게요."
나는 김 차장이 또 뭔가를 이죽거리기 전에 냅다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회사 건물을 나서고 겨울바람에 허연 한숨을 토해내고 나서야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발랄한 걸음걸이로 회사 뒤 골목길을 향해 방방 걸어갔다.
"오빠 방금 뭐라 그랬어?"
"우리 헤어지자고."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지?
"아니 왜? 왜 갑자기?"
"승희야.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내가 죽일 놈이다. 그러니 곱게 헤어지자."
"아니. 무슨 이유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내가 싫어졌어? 우리 저번 주만 해도 좋았잖아."
"..."
"아 좀 얘길 해봐. 왜 그러는 건데?"
"나... 애 생겼다."
이건 뭐지? 날벼락 곱빼기?
"실은 지난달에, 그러니깐 정확히 6주 전에 동창을 만났어. 고등학교 동창. 왜, 그 송년회 한다던 날 있잖아."
"그래. 나도 기억나."
"그날 늦게까지 술 먹는다고 너 먼저 자라고 전화했던 거 기억나?"
"응. 기억나."
"그날 밤에 그 애랑 잤어."
나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래서?"
"그런데 그제 그 애 아버님이 우리 집으로 전화하셨더라. 애가 애 뱄는데 어쩔 거냐고."
"그래서?"
"그래서 그 애를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아."
되도 않는 소리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그날 한 번에 임신을 해?"
"..."
"어쩐지 너 요즘 이상했어. 예전처럼 조르지도 않고, 콘돔도 알아서 꼬박꼬박 끼고. 하루는 나랑 자고, 다음날은 걔랑 자고. 아주 좋았겠다? 혹시 같은 날 둘 다 만난 거 아니야?"
"아니야. 그건 진짜 아니야. 다시 만난 건 부모님 연락받은 후였어."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넌 내가 등신으로 보이니? 그 애도 웃겨. 무슨 6주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떡하니 니 애라고 들이대냐? 정말 니 애는 맞데?"
"맞아. 아닐 수가 없어."
"너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나 아니면 남자 만날 일 없는 애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아 몰라. 신경 끌래. 걔보고 애 지우라 그래."
"야. 어떻게 그래..."
"야. 그러면 나한테는 어떻게 그러냐? 너 군대 간 거 포함 6년 기다린 나는 뭔데? 우리 여기서 끝내? 못 끝내. 내가 너랑 살려고 구상한 비전은 어쩌고?"
"그놈의 비전, 비전. 이젠 아주 넌덜머리가 나. 솔직히 제대하고 너 만났을 때부터 부담스러웠어. 그 이후로는 더 했고. 왜 너가 내 인생까지 마음대로 재단하려고 하는데?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어. 너 말 따라 졸업하고, 취업하고, 그러는 건 내 인생이 아니야. 20년을 엄마의 꼭두각시로 살았는데, 이제 남은 일생을 너의 꼭두각시로 살 순 없어."
오빠를 본 이래 이토록 격하게 말을 뱉었던 적이 없었다. 난 그의 일갈에 말문이 막혀 눈만 껌뻑거렸다.
"미안하다. 솔직하게 말하고 너랑 헤어져야 했는데. 미안해서. 미안해서 헤어지지 못했어. 군대도 기다려주고, 졸업도 기다려주는데 차마 헤어지자는 소리를 못 했어. 그게 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미안해서 말을 못 했어. 미안하다."
눈물이 한 방울 오른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오빠가 그 애를 책임질 필요는 없잖아. 우리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 6년을 고작 6주 때문에 무너뜨릴 순 없어."
"아니야. 이런 짓까지 저지르고 너를 볼 면목도 없다. 그리고 결정권은 내 손을 떠났어. 이미 집안 문제야. 서울에서만 자란 너는 모르겠지만, 시골은 그런 곳이야."
오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갑자기 걸어와 오빠의 팔을 끌어당겼다.
"은혁아. 그쯤 하면 됐어. 저희 이만 가볼게요. 미안해요."
그 여자는 먹이를 사냥하는 물수리처럼 날렵하게 오빠를 낚아채 갔다. 그녀를 보자 오빠의 말이 이해가 갔다. 말 그대로 메주같이 생긴 년이었다. 나는 떠나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먹이를 빼앗긴 나무늘보처럼 허공을 향해 느릿느릿 왼팔을 허우적댔다.
아주머니는 어느새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깨진 액자를 쓸어담았다. 물론 사진도 함께. 딸은 침대에 앉아 벌게진 눈을 연신 훔쳐대고 있었다.
"우리 딸! 잘했어. 그 새끼 생긴 것도 꼭 기생오라비 같은 게 사내다운 면이라곤 하나도 없었어. 잘 헤어졌어. 그러니깐 울지마."
"전에는 잘 생겨서 좋다매. 결혼하면 잘 생긴 게 다라매."
"그건 맞지..."
아주머니는 자신이 별로 위로가 못 된다는 걸 깨닫고는 부리나케 방을 빠져나갔다. 거실로 돌아와 TV를 보고는 <동물 농장>이 끝났다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쓰레받기를 비우고는 다시 담요에 들어가더니 채널을 돌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틀었다. 그리고는 다시 귤을 까 드시기 시작했다.
딸은 휴지로 코를 한번 팽하고 불고는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앨범을 꺼내 그와의 사진을 빼다가 앨범 전체가 그와의 사진밖에 없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앨범째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책상의 조그만 액자도, 그와의 커플티도, 반지도 모두 쓰레기봉투에 쑤셔 박았다. 그렇게 6년의 추억을 모두 모았는데도 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다 채우지 못했다. 딸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쓰레기봉투를 현관에 대충 던져 놓고는, 다시 방으로 쿵쿵쾅쾅 돌아갔다. 평소라면 "이년이 또 쓰레기봉투를 낭비하네."라고 잔소리를 퍼부었겠지만, 오늘은 아주머니도 별말씀 없이 조용히 바라만 보셨다.
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6년의 추억들이 사라졌지만, 별반 달라진 것도 없었다. 조금은 허전할 줄 알았는데, 그냥 그대로였다. 다만 액자가 걸려있던 자리가 눈에 띄었다. 주변 벽지는 햇살에 누레졌건만, 액자가 걸린 자리만 때 하나 안 타고 뽀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딸은 물티슈를 한 장 뽑아 들고 액자가 걸렸던 주변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나 수년간 쌓여온 햇살이 그리 쉽게 지워질 리 만무했다. 딸은 벽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문득 창문을 바라보았다. 계절에 안 어울리는 푸근한 햇살이 야속하게도 방안에 넘실거렸다.
Written by 충달
http://headbomb.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