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찾아오는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그리고 5년마다 찾아오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우리는 후보자의 얼굴을 인쇄한 포스터가 거리에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치곤 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 포스터가 바로 선거벽보이다. 선거벽보란 공직선거법의 규정에 따라 후보자의 사진, 이름, 기호(정당 또는 후보자의 개제순위). 정당후보자의 소속정당명, 경력(학력을 개제하는 경우에는 정규학력), 정견 정책을 작성하여 지역별로 붙이는 홍보물이다. 선거벽보는 이처럼 후보자의 대한 정보가 압축적으로 드러난 홍보물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결코 적지 않다. 특히 선거벽보에 적힌 짧고 강렬한 메시지는 유권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열쇠이다. 본 기사에서는 정부수립이후 화제가 되었던 선거벽보가 전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해보고자 하며 민주화 이전의 메시지와 민주화 이후(87년 이후)의 메시지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1954년 헌법에 규정된 2번의 임기를 모두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소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였고 이승만의 장기집권 야욕에 대해 반발한 한민당과 반이승만계 보수 세력은 민주당이라는 거대 야당을 만들고 신익희를 유력후보로 내세운다. 1956년 5월 15일 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짧고 도발적인 문구를 내거는데 이는 이승만 정부의 실책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비전을 제시하는 효과적인 문구여서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반면 이승만 후보는 “갈아봐야 더 못산다”는 구호를 통해 민주당의 정책이 자신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선명성 있는 선거 구호 덕분인지 당시 유권자의 무려 94%가 투표에 참여하는 진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치열한 표 대결이 예상됐던 3대 대통령 선거는 신익희 후보가 유세 중 급사함에 따라 손쉽게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신익희 후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은 무효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개혁을 강조하는 참신한 구호가 어느 정도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1971년의 제 7대 대통령선거는 여러모로 3대 대통령 선거와 비슷한 면을 보인다. 당시 법에 규정된 임기를 모두 채운 박정희는 변칙적인 표결을 통해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킨 상태였고 이에 대한 반발 심리로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후보를 내세웠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40대로 비교적 젋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과감한 개혁을 약속했다. 김대중 후보는 “10년 세도 썩은정치 못참것다 갈아치자!”라는 문구로 박정희 정권 심판을 강조하였으며 박정희 후보는 “보다 밝고 안정된 내일을 약속합니다”라는 문구로 안정, 성장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 후보는 자신의 메시지를 구체화하기 위한 정책으로 예비군 폐지, 노사공동위원회 설치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정책 공약을 제시하였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 후보는 경제정책과 안보문제를 이슈화하여 열띤 공방을 벌였다. 이러한 양상은 종전까지 압도적인 지지율로 무난히 당선되던 박정희 후보에게 긴장감을 주기 충분하였고 다양한 정책 공약이 이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상 살펴본 두 사례를 살펴보면 민주화 이전의 선거는 독재자와 그에 대응하는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선거벽보의 메시지 역시 그에 맞게 명확한 대립구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기 집권을 하고자하는 여당 후보는 자신들이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에 대응하는 야당 후보는 자신들은 여당과 다른 참신한 개혁세력임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의 메시지 전달 방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987년의 6.29 선언 이후 민주화의 두 거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노선의 차이를 보이며 갈라서게 되고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의 당수가 된 김영삼과 통합야당의 당수인 김대중 그리고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의 3자 대결구도가 성립하였다. 이러한 3자 대립구도는 이전 독재 정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新한국 창조!”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는 바꿉시다” 정주영 후보는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구호로 내세웠다” 일단 김영삼과 김대중의 구호는 표면적으로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양 후보 모두 독재 정권을 몰아냈으니 새로운 한국을 만들겠다는 대의명분에는 의견이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정주영 후보는 자신이 기업인 출신임을 강조하며 경제 성장을 내세우며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정책의제를 제시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선거결과는 김영삼이 42%의 득표를 통해 김대중과의 격차를 벌리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정주영은 16%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다음으로 엄청난 화제를 끌었던 선거는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16대 대통령 선거가 화제가 된 이유는 당시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 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에는 거물급 정치인인 이인제가 대선 출마를 시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치 신인이었던 노무현의 승리는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이에 대응하여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청렴함을 강점으로 내세운 이회창 후보를 내세웠으며 민주노동당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으로 권영길 후보를 내세웠다. 이회창 후보는 “나라다운 나라” 노무현 후보는 “새로운 대한민국!” 권영길 후보는 “일하는 사람들의 대통령”을 내세웠으며 각 후보의 메시지만 놓고 봐도 각자가 지향하는 가치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회창은 깨끗한 보수를 추구하는 반면 노무현은 진보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권영길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가장 치열한 선거였으며 1위와 2위 후보의 격차가 불과 2%정도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결과 민주화 시기의 선거벽보가 전하는 메시지는 독재시기에 비해 조금 더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유권자의 사회적 요구가 다원화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국민 경선을 통해 신인 노무현이 후보로 나온 것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가 나타난 것은 가히 전향적인 사건이다. 이처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선거벽보가 전하는 메시지는 역동적으로 변해왔고 좋은 메시지가 나온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뜨거운 참여가 있었다. 약 1년 앞으로 성큼 다가온 19대 선거, 유권자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누가 제시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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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랑 좀 다른이야기여서 죄송한데
김대중의 저 40대 기수론... 참 신기한것 같아요.
2016년 지금에 와도 40대가 대통령하겠다고 하면 40대가 뭘 아냐고 너무 젊다고 할건데
지금 비교적 젊은 정치인으로 여겨지는 안희정, 이재명같은 정치인들도 다 50대고
70년대에 40대가 저렇게 경선뚫고 했던거, 김대중 김영삼같은 인물들이어서 가능했던건지, 아니면 오히려 당시에는 분위기가 더 진보적이었던건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도 딱 이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데, 큰 이유 중 하나는 평균수명의 급격한 증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1950년대 말에 한국인 평균 수명이 고작 50세를 약간 넘더라고요. 65세까지 늘어난 게 1980년대고, 현재 평균수명이 82세던가...
당시 사람들이 40대 인물에게 느끼는 감정과 지금 50대의 그것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찌보면 지금 50대가 오히려 사회 기준에서는 더 젊은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