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최소한 소주 두 병은 마신 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소희는 가볍게 소주 한 잔을 원샷하고 소주 잔을 머리위로 털어제꼈다.
"언니! 여기요!"
은성이가 잽싸게 안주하나를 집에 소희의 입가에 대령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기가 찼다.
"허."
누가보면 10년은 된 막역한 언니동생사이인줄 알겠다.
"제 것도 드셔야죠!"
연주 너 마저...
다시금 소희의 가공할 위력(?)에 몸이 으스스해졌다. 천하의 지연주조차 안주셔틀로 만들어버리다니, 그저 벙찔 뿐이다.
어느새 셋이 서로 그렇게 친해졌는지 웃고 떠드느라 술게임은 뒷전이 된지 오래다.
셋이 잘 노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나로서는 수영이가 굉장히 신경쓰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영이는 날 따라하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예쁜 목소리와 함께 좋은 향이 스며든다.
수영이도 술을 꽤 마셨을텐데 어떻게 술냄새기 하나도 안 날까.
"이현우! 근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잠시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소희가 치고 들어왔다. 소희는 슬쩍 자세를 바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왔다.
묘한 심리적 압박감이 느껴진다.
"내가 너 걸리게 하려고 그렇게 술병을 돌렸는데, 오늘 뭔 날인지 네가 한 번도 안걸렸잖아!"
그러고보니 오늘 운이 따랐는지 진실게임에서 한 번도 걸리질 않았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지 혼자 쏙 빼고! 남 비밀 듣고, 술 먹이고. 불공평하지 않냐?"
누가 들으면 내가 조작이라도 한 줄 알겠다. 그리고 애초에 게임하자고 한 건 소희야 너거든?
"뭘 불공평해. 그야말로 공평하고, 공정한 게임이었는데."
심드렁한 내 대꾸에 소희는 고개를 절레절레저으며 내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가까이서 보니 소희도 취기가 조금 올라왔는지 두 뺨이 발그레하다. 하긴 소희도 사람인데 술을 그렇게 먹고 아예 멀쩡할 순 없겠지.
"아냐 아냐. 어!? 그래도 이렇게 다 같이 게임을 했는데 한 번쯤은 재미로 걸려줘야지. 어! 안 그래?"
"맞아요. 맞아!"
"언니 말이 맞아요."
낸들 어쩌란 말인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을.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뭐?"
시야에 보이는 소희의 얼굴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뭔 말을 하려고 이러나 불안하다.
"질문 딱 하나만 하자!"
"대답해라 대답해! 혼자만 안 걸리고 치사하다!"
"..."
은성이 저건 내일 술깨고 오늘 일을 기억이나 할까 모르겠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얄밉단 말야.
어쨌거나 소희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할 도리가 없다. 맞고 하냐 안하고 하냐의 차이지.
솔직히 질문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
"정말?"
"응."
내 승낙에 소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째릿한 표정을 풀고 미소지었다. 저렇게 표정이 순식간에 바뀔 수가 있다니. 놀랍다.
"그래서 뭔 질문을 하려고?"
"음... 기다려봐! 솔직히 이걸 알았다고 할 줄은 몰랐지. 딱 한 번인데 제대로 써야지."
몰랐긴... 거짓말도 참 표정하나 안 변하고 잘한다. 서로 몇 년을 봐왔는데, 매번 이럴때마다 내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 못하리란 것
쯤은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뭘 그렇게 또 생각해."
"좋아. 정했다!"
"뭔데?"
"여기에서 좋아하는 사람있어?"
"..."
소희의 외통수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 나도 모르게 수영이를 슥 곁눈질했다. 내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 거기에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는 사교성. 마음 씀씀이까지. 얼마 전까지도 아무것도 모르던 남남에서 이렇게 술을 함께 마시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사람이다.
아직은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말하기에는 풋풋한 호감이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
함께할 시간이 주어질 수록, 이 여자에게 점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수긍해도 괜찮지 않을까? 반대로, 수영이는?
이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수영이가 된다면, 그녀는 내 감정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현우 오빠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요. 이현우는 빨리 대답을...!"
"있어."
"딸꾹!"
펄쩍거리던 은성이가 내 대답에 놀랐는지 딸꾹질이 들렸다.
"연주야...!"
"은성아, 그만."
은성이는 놀란 토끼눈으로 연주를 바라봤다. 연주는 소희와 함께 날뛰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로 은성이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