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자노량진에서 수험생활을 하던 시절,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돈이 없었다. 많은 수험생들이 그러했듯, 빈 강의실을 찾아 학원과 학원 사이를 전전하며 그렇게 철새처럼 공부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학원이 문을 닫는 오후 9시 즈음에는 학원 문을 나서야했다. 그 시간쯤 돼서 학원을 나서면 저 앞에 천원~천오백원짜리 핫바를 팔던 길거리 노점상을 항상 지나치곤 했다. 그 노점에는 치즈핫바, 고추핫바, 맛살핫바 등등 화려한 핫바군단들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진을 치고 있었다. 주로 길거리 컵밥이나 주먹밥 등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집에 돌아가는 그 시간만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팠다. 그래서 저 멀리에 있는 노점상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핫바를 하나 사먹을까? 그냥 갈까?' 라는 고민을 걸음걸음마다 수십 번도 더했다. 그렇게 걸음마다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바뀌다가 때로는 명량해전을 눈앞에 둔 이순신 장군처럼 통 큰 결단을 내리며 과감하게 핫바를 집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됐다.. 그냥 집에서 밥통에 남은 밥이나 먹지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나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깟 천원짜리 핫바가 뭐라고. 그때는 그거 하나 먹는 일도 내겐 참 어려웠다.
그렇게 지난한 수험생활을 거쳐 시험에 합격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된 이후로 가장 기뻤던 일 중에 하나는 퇴근길 상록수역에서 마주치는 길거리 노점상의 떡볶이와 핫바를 맘 편히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게 참 좋았다. 이제 더 이상 저놈의 핫바를 하나 사먹을지 말지를 가지고 수십미터 전부터 골똘히 고민하며 고뇌하지 않아도 되었다. 직장인의 여유를 만끽(?)하며 그냥 사먹으면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매달 작은 금액이나마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게 밥을 사주던 친구들에게 이제는 내가 맘 편히 밥 한끼 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나 또한 이른바 '수험생의 설움'을 잘 알기에 주변에서 취업을 준비하거나 시험공부를 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 뭐라도 조금 더 챙겨주고 살펴주고 싶었다. 그런 주변의 취업준비생 중에서도 H는 나와 가장 친했다. 오랜 취업 실패와 연이은 공무원 시험 낙방에 좌절하는 친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내게도 녹록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결국 이기적인 존재인지라 내 앞가림에 바빠 친구의 외로움과 아픔을 종종 알면서도 외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내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어떤 날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쓸쓸하고 서러운 날도 있었을 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H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날따라 친구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지쳐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맥이 탁 풀려보인다고 해야하나, 느낌이 좀 이상했다. 국가직 공무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시험 때까지는 열심히 해보려구. 해보는데.. 그 이후에는 뭐.." 친구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요즘 같아서는 솔직히 누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엔 솔직히 무섭고, 그렇다고 기약없이 맨몸으로 홀로 세상과 맞서고 버텨내기엔 암담한 터널 같은 현실이 때로는 감당하기 버겁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이 한마디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말의 무게를 줄곧 기억하고 있던 나는 공무원 시험 이후를 기약하지 않는 눈앞의 친구에게 갑작스런 제안을 꺼냈다.
["야, 우리 일본 가야지?"] 몇 년 전이던가, 언젠가 한번 친구와 함께 일본을 가려고 계획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경제사정과 그의 어머니의 반대 등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었다. 그 이후로 내내 그게 마음에 걸리던 차였는데 나는 이번이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친구에게 삶의 희망 같은 거창한 것까진 아니더라도,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재미 정도는 주고 싶었다. 현실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 정도뿐이었다. 몇 년 전 계획 때와 마찬가지로, 항공료와 숙박비 등 우리들의 여행자금은 내가 충당하겠다고 했다. 대신 현지 여행계획은 친구가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친구는 어머니와 상의해봐야 한다며 말을 아꼈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다행히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친구는 본인 인생의 첫 취업에 성공하게 된다. 비록 본인이 평소 꿈꾸던 직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취업 소식을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위로 여행은 그렇게 취업축하 여행으로 바뀌었다. 친구는 우선 여권부터 만들었다.
개천절 연휴를 통한 2박3일 간의 짧은 도쿄 여행이었다. 나리타 공항을 통해 입국한 우리는 아키하바라를 시작으로, 신주쿠로, 다이칸야마로, 아사쿠사로, 오다이바로 그렇게 이것저것 검색해가며 열심히 도쿄 시내를 돌아다녔다. JLPT 1급을 보유하고 있는 친구의 일본어 실력이 일본 현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우리 여행의 훌륭한 가이드였다. 물론 여행기간 동안 때때로 이견 차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별다른 마찰이나 다툼 없이 2박3일의 일정이 즐겁게 잘 마무리되었다. 환전해온 엔화에 여유가 있던 나는 나리타 공항에서 선물용 먹거리들을 잔뜩 샀다. 하지만 친구는 한개 정도만 구입하며 더 이상의 구입을 망설였다. 아무래도 아직 첫 월급을 받지 않은 터라, 일본에서의 모든 게 빚으로 돌아오는 경제적 부담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수중에 돈이 있음에도 핫바 하나를 맘 편히 사먹지 못했던 수험생 시절의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으며 친구의 쇼핑백에 '도쿄 바나나빵' 한 상자를 넣었다. 나는 많이 샀으니, 직장동료들이랑 나눠먹으라고 얘기해줬다.
친구는 여행 마지막 날 한국에 돌아와서 내게 즐거웠다는 문자와 함께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는 나와 다르게, 그에겐 이번이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 친구의 삶에 있어 소소하지만 평생 기억될 나름의 추억 한 조각을 만들어준 듯 싶어 내심 뿌듯했다. 사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주변의 누군가는 내게, 친구를 위하는 마음은 좋지만 굳이 여행비까지 다 충당해가며 무리하게 여행을 갈 필요 있냐는 의아함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로 여행 스케줄을 급작스럽게 결정하고 잡는 탓에 예상보다 제법 많은 경비가 지출되었고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부담은 예상했던 바였고 이런저런 주변의 반응을 접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사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 엄마의 건강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얻을 순 없다. 물론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것이다. 돈이 넉넉하면 연애를 하는데 있어서, 병 치료를 하는 데 있어서도 제법 큰 도움이 될 순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일뿐, 돈이란 녀석이 우리 엄마의 건강과 내 연애의 모든 걸 결정지어주진 못한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돈의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이 무엇이건 내게는 가장 쉬운 일이다. 내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돈 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가진 약간의 돈으로 주변의 누군가가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아픔을 덜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러기 위해 돈 버는 것이라고, 나는 배웠다.
어쨌든 나는 같이 살고 싶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같이 살아내고 싶다. 친구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마음으로 전하고픈 얘기가 있다면 이 한마디뿐이다. '같이 살자'. 우리 같이 살아있는 한은, 서로 나쁜 마음 같은 거 먹지 말자. 한 손에 캐리어를 끌고 헤어지던 안양역 앞에서, 이 한마디를 마음에 담아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