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병(beriberi)이라는 이름은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할 수 없어(I can't, I can't)'를 의미하는 스리랑카 원주민의 언어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형적인 티아민(비타민 B1) 결핍증은 정제된 쌀을 주식으로 먹는 경우에 나타나며, 수 주일간 정제된 쌀만 먹으면 발생할 수 있다. 신경계, 피부, 근육, 소화기처럼 열량대사와 중요한 곳이 비타민 B1 결핍에 더욱 민감하여, 이들 장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증상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식욕저하, 체중감소, 무기력증, 무감각, 단기 기억력 상실, 혼돈, 소화기계 통증, 과민, 말초신경 무감각, 근육약화 등을 들 수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은 아시아죠. 각기병은 아시아에 집중적으로 나타났고, 이 때문에 그냥 아시아의 전염성 풍토병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세균설 등 여러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답이 나올수가 없었죠. 비타민의 존재를 몰랐으니까요.
근대화가 진행중이던 일본에게 이 각기병은 큰 문제로 다가옵니다. 특히, 일본 해군에게 말이죠.
일본도 쌀이 주식인 나라, 각기병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쌀을 제대로 못 먹는 백성들에겐 이것조차도 부자병이었습니다. 쌀밥만 먹고 살 수 있는, 에도(현재의 도쿄)의 부자들이나 걸리는 병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에도병이라고도 했답니다.
에도 시대에 이런 각기병 사태를 해결해준 게 바로 소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관동엔 우동집보다 소바집이 더 많다고 하는군요. 이런 경험이 있었지만 유신 후의 일본은 이걸 무시했다 합니다. 비과학적인 것이라면서요.
에도 시대와 유신을 거치면서 서민들의 삶도 나아졌고,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각기병은 더 늘어만 갑니다. 한국이 그렇듯 일본도 밥 위주의 식단이었으니까요. 더 가난할수록 반찬은 더 줄었고, 미소시루(된장국)부터 아예 간장에 단무지 약간 정도만 됩니다. 딱 쌀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살만해졌을 때, 이게 원인이 되었죠. 잡곡? 현미? 먹는 게 몸에 좋다는 게 밝혀진 현대에도 싫어하는 사람 많잖아요. 이러면서 다이쇼시대(1912~26)에는 결핵과 함께 2대 국민병으로 불릴 정도였다 합니다. 다이쇼 말기에는 한 해에 2만 5천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하고, 중일전쟁부터 2차대전이 되면서 역시 해마다 1~2만 정도가 죽었다 합니다.
가장 심각했던 건 해군이었습니다. 교육, 훈련, (조선이나 대만 -_-;) 원정 등의 목적으로 원양항해를 하면서 말이죠. 임오군란 때도 한달만에 함마다 30~50% 정도가 각기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 시기 매년 천명 이상, 해군 정원의 30% 이상이 각기병에 걸렸고 해마다 30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네요. 1882년에는 연습함 류조가 뉴질랜드-칠레-하와이로 긴 원양항해를 떠납니다. 그 피해가 충격적이었죠. 378명중 169명이 걸렸고, 23명이 사망합니다. 이쯤되면 해군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정도죠.
이미 77년부터 정부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밝혀내지 못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1879년, 영국에 유학갔던 다카기 가네히로가 귀국합니다. 사쓰마번 출신으로 의학을 배우러 갔다 온 것이죠. 그는 오자마자 의무국 부장에 취임했고, 각기병의 치료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가 알아낸 건 장교들은 거의 걸리지 않고 수병들에게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항해중에 일어나고 항구에 정박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그 외에 병이 일어날만한 요소 - 장소, 계절, 기온 등 - 와는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죠. 이렇게 먹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해군은 계급별로 식비를 책정하고 쌀을 준 다음 나머지는 돈으로 줘서 부식을 사게 했습니다. 수병들이 받는 돈은 적었고, 이걸로 부식을 제대로 사먹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군대에선 삼시세끼 쌀밥 먹을 수 있다고 온 가난한 이들이 많았고, 부식비를 최대한 남겨서 저축하고, 집으로 보내는 이들이 많았거든요.
그는 여기서 나온 영양,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불균형에 집중합니다. 이걸 개선하기 위해서 돈 대신 부식의 양을 정해서 현물로 주고 식단을 각기병에 걸리지 않는 양식으로 바꿀 것을 주장합니다. 전자는 받아들여졌지만 후자는 역시 힘들었죠.
빵과 고기 스튜 등의 양식은 지금도 특별식이라면 몰라도 계속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겁니다. 치킨도 밥이랑 같이 먹는 저같은 사람이 있죠. 지금도 밥심이라고 하는데 그 땐 어땠겠습니까. 수병들은 물론이고 윗선에서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빵을 줘도 버리기만 할 뿐, 수병들의 사기는 더 떨어질 뿐이었죠. 군대에서 밥이라도 맛있게 먹어야 되잖아요. 이걸론 안 되겠다 해서 보리도 효과가 있으니 보리를 쌀에 섞어 혼식을 먹게 합니다. 역시 저항이 컸죠. 쌀밥 먹으려고 군대왔는데 군대에서까지 보리를 먹어야 된답니다. 좋아할 리가 있겠어요. 지금도 몸에 좋으니까 먹으라 해도 안 먹는 저같은 사람이 널렸는데요.
반론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건 없었으니까요. 비타민을 몰라서 그랬겠지만 그의 주장도 틀리긴 했습니다. 단백질 부족을 각기병의 원인으로 봤거든요. 물론 각기병을 떠나서 단백질이 극히(탄수화물의 1/15였다 합니다) 부족한 것도 큰 문제긴 하죠. 여기에 가장 큰 문제, 돈문제도 있었죠. (...) 조리시설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야 했으며, 일본엔 부족할 고기도 많이 보급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이것을 밀어붙였고, 1884년 츠쿠바의 항해에서 대성공합니다. 2월부터 11월까지의 항해에서 각기병 환자는 단 15명, 사망자는 없었던 것이죠. 다카기의 주장대로 일본식이라도 양식 수준의 영양을 가진 식단을 짜고 빵과 비스킷 등 양식들도 도입한 덕분이었습니다. 저 15명도 양식이 싫다고 안 먹은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받아들일수밖에요. 83년 23%였던 발생률이 85년에 1% 미만이 되었고, 84년 이후 사망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대성공이었죠.
이후 이걸 지키면서 수병들의 입맛에도 맞추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주말에 군대리아가 나오듯) 빵 등의 양식은 지정된 날만 하고, 양식을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서 개량하는 거였죠.
그게 바로 카레라이스죠. 기원은 인도의 커리입니다. 영국 해군은 비프 스튜에 커리를 넣어 먹었고, 이걸 식단에 넣습니다. 인도 요리가 영국인을 구한 케이스 중 하나죠 ( ..). 이걸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서 바꾼 것이죠. 더 걸쭉하게 만들어서 밥과 같이 먹을 수 있게요. 이걸 라이스카레라 불렀다가 앞뒤를 바꿔 카레라이스라 합니다. 이게 큰 인기를 끌었고, 해군에서는 토요일마다 먹었다 합니다. 지금은 주 5일이라 해상자위대에서 금요일마다 먹는다는군요.
이게 일본 국내에서도 유행했고 국민음식이 되었죠. 이게 한국으로 넘어왔구요. 한국에는 유명하지 않지만, 비슷한 걸로 역시 영국의 스튜를 현지화한 니쿠자가(고기감자조림)가 있습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영국 유학 때 먹은 걸 잊지 못해서 요리사를 시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죠.
한국인으로서는 기원을 생각하면 좋지 않은 요리일 순 있겠습니다. 나치가 만든 환타와 비슷하다 할까요? 아무튼 카레라이스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돈가스, 고로케와 함께 양식이 일본에서 잘 현지화된 3대 요리로 꼽히죠. 인도를 떠올리지만 그냥 일본 요리로 봐야죠. 저도 참 좋아합니다. ( '-') 몇날며칠 삼시세끼 먹을 정도로요.
일본 육군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해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죠. 그 대표가 모리 오가이입니다. 소설가로서는 많은 명성을 쌓은 그지만 군의로서는 어마어마한 실책을 저지른 것이죠. 일본군 전통의 육군 vs 해군 대립도 있었고, 그는 독일 유학, 다카기는 영국 유학이었던 것도 있었나 봅니다.
그는 세균이 원인이라는 설을 계속 밀고 나갑니다. 환자가 생기면 약을 처방해줬죠.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청일전쟁 때는 환자 4만명에 사망자 4064명, 의화단 운동으로 파병할 때 환자 2351명, 러일전쟁 때 25만여의 환자 중 2만 7천여명이 사망합니다. 반면 러일전쟁 때 해군의 환자는 87명뿐이었다 합니다. 가벼운 증상을 가진 사람도 포함시켰고, 상황이 안 좋아서 온갖 병에 같이 걸린 병사들이 많아서 사망자도 더 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든 엄청난 수치라는 건 확실하죠.
육군이 해군에 비해 각기병을 덜 신경쓰긴 했을 겁니다. 배 위에 있는 해군보다야 부식을 구하기 쉬웠고, 정량대로라면 영양이 충분해 각기병에 걸릴 걱정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일본을 떠나 원정을 가게 되면서 그 문제점이 아주 제대로 드러나게 된 거죠. 각기병이 아니더라도 온갖 병들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게 일본군의 열악한 보급, 의료상황을 잘 보여준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리해서 피해를 더 크게 만든 것도 문제구요. 이런 피해를 입으면서 육군도 해군의 방식을 따라갑니다.
이후 에이크만이 닭에게 백미와 현미를 먹여서 각기병의 원인을 분석했고, 20세기가 되면서 비타민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각기병이나 괴혈병의 원인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죠.
뭐 그렇다고 각기병을 완전히 퇴치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식단을 바꾸긴 역시 힘들고, 전쟁 등으로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각기병은 다시 유행했죠. 군에서도 그랬습니다. 보리나 현미는 병사들이 싫어하고, 수송과 조리도 쌀에 비해서 어려워서요. 50년대에 비타민 영양제가 개발된 후에야 제대로 없앨 수 있었답니다. 현재 일본에서 초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노년층에서 각기병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하네요. 역시 몸에 좋은 잡곡을 먹고 고기 채소 다 골고루 먹고 살아야 하나 봅니다.
의외로 괴혈병 얘기는 없더군요. 채소류를 많이 먹어서 그런 거려나요. 러일전쟁 때 이에 관한 얘기는 있습니다. 일본군은 콩나물을 먹어서 괴혈병 피해가 없었는데 러시아군은 그걸 몰라서 콩을 쌓아두고도 괴혈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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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큰 문제였죠. 보통 전투병의 두 배는 넘는 인원이 군량을 지고 뒤따랐어요. 가축들을 끌고 가면서 잡기도 했구요. 안 되면 현지 약탈이지만요. -_-; 돈 주고 사기도 했지만. 이래서 수가 많을수록 행군은 느릴수밖에 없었구요. 유목민들이 강했던 게 안 그래도 말 타서 빠른데 약탈 위주라서 그런 게 컸습니다. 물론 얘네도 양 끌고 다니면서 먹긴 했죠.
국경에서는 둔전했구요 '-'a
내부의 평가라거나 외부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일본 국민들에게 확실히 일본 해군은 당시 최첨단의 상징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카레라이스를 포함해서 많은 서양문물이 일본 해군을 통해서 변형되어 들어오기도 했고 속 빈 깡통이라지만 세계 최대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야마토는 이후 일본어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일본국민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죠. 거기다 일본 육군이 할힌골에서부터 계속 삽질을 거듭하기 이전 부터 일본 해군은 일본군의 역사를 개척하는 역할을 해오다보니 일본 해군은 아직까지도 일본 내에선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나쁜 건 다 육군에 떠넘기고 해군은 잘났다는 해군선옥(선역)론이 나올 정도니까요 뭐. 이유야 여러가지겠죠. 실제로 잘났던 모습, 크고 아름다운 군함들, 육군과 달리 주변에 없었으니까 등등이요. '-'a 이래저래 영향을 안 받을수가 없네요 =_=a
야마토가 일본어에 영향 줬다는 건 어떤 건가요? '-'
일본어중에 엄청 커다란 걸 초노급 (일본어 발음으로는 쵸도큐..정도일겁니다) 이라고 하는데 이게 야마토급의 전함을 가리키는 초월 드레드노트급에서 왔거든요. 그래서 도아호나 도헨타이(...)처럼 오오 (큰 대자) 대신에 붙는 접두사로 쓰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야마토가 일본인에게 준 충격이 그정도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