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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6 14:04
음.... 그건 아니었는데;;;
저는 곡성의 가치를 클리셰와 장르 파괴 사이를 넘나드는 현혹술이라고 봤거든요. 따라서 모호함이 곡성의 핵심이라고 봤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호함을 없애기 위해 비개연적 서사에 개연성을 부과했습니다. 이 점이 아쉬웠어요. 모호한 대로 두어야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16/09/16 14:42
충달님 말씀에 공감하게 됩니다. 곡성은 큰 주제는 모호함이고, 그걸 더 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명확함의 숨김이 아니라 모호함의 공개라고 봤는데 영화보고나서 여친님께서는 아주 열심히 블로그 뒤지면서... 이래서 이런거다 이런걸 아주 적극적으로 찾으시더라고요. 여친에게 어차피 서사적인 연결장치들을 보는 것도 재미지만 차라리 왜 이런 연결장치를 찾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면 재밌을거 같다고 했었네요.
16/09/16 13:47
네, 그게 참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왕년에(?) 에반게리온 해석질 꽤 해봤더래서 떡밥 놀이가 얼마나 즐거운지 알죠.
이유를 찾는 즐거움, 그게 인간사의 가치가 아닌가 싶네요. 항상 즐겁지는 않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요.
16/09/16 15:01
크흐흐흐흐.
재밌죠 해석놀이. 근데 국어 선생님이 얘기하시기를 '작가가 의도치 않은 해석이라하더라도 의미가 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맞는거 같다고 생각이 문득 드네요.
16/09/16 15:07
영화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감상은(본문작성자님의 글을 포함하여) 존중합니다만
"과학적 신빙성이 사라진 라캉"을 논하는게 지적유희라는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내요 어떤 대단하게 생각하시는 과학이 존재하기에 (그래봐야 실증주의적 과학관일텐데 ..) 정신분석과 현대철학사유에 줄기를 대고있는 라캉의 사유들을 단칼에 자르고 지적유희로 바라봐야한다는건지 더 설명을 부탁드려 보고싶습니다
16/09/16 15:37
심리학이 점차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프로이트나 라캉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은 의사과학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일단 "틀린"내용이 많고 탐구 과정도 비과학적이라서요. 철학으로서 논하기에도 정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의견도 있고요. 주류 사상으로 이어오고 있지도 않고요. (물론 근대에 혁명적 인식 변환을 이뤄낸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줘야 하는 각이긴 합니다.)
대신에 정신분석학은 문학적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유의 현학성 때문에 지적 유희 혹은 지적 허세로 비판받고 있기도 합니다.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나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를 참조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16/09/16 15:57
푸코가 말하는 과학의 권력화 같은 뉘앙스를 본문포함 충달님의 답글에서도 느끼고있는데요.. 한국에서 라캉의 유일한 저서라 부르는 에크리도 원전 번역이 안된상태로 알고있고 몇안되는 한국에서 공부하신 라캉의 해석자들도 서로 해석을 달리하는 마당으로 알고있는데요. 진행중인 사유에 대해 지적유희로 치부되는건 부당하지 않나 하는겁니다 설마 영미분석철학이 주류고 나머지는 지적유희에 불과하다는뜻도 아닐테구요. 그렇게 따지면 아무리 공평하게 생각해도 주류과학적 접근방식이나 학문적 성과도 전부 지적유희에 불과하죠. 제 이야기는 어떤 상태로 두어야한다는겁니다 재단하기엔 아직 일러요
16/09/16 16:31
대륙철학에서도 주류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주류가 아니라고 가치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연구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으로 보면 별 무리가 없겠죠.
16/09/16 17:48
뭐 연구하는 사람이 적다는 얘기가 그만큼 아웃오브안중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공계도 그런 분야 많으니까요. 뭐 이쪽은 돈이 안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16/09/17 03:27
뭐, 사실 일반인인 저의 입장에서는, 주류도 모르는데 비주류까지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은 있지만, 그래도 생각을 좀 유연하게 가져야 겠네요. 그런데 제가 원래 알기론, 라캉은 주류/비주류를 떠나서 정말 하등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받던 것 같던데..흠;;
16/09/17 03:36
저도 별로 가치없는 학자로 보긴 합니다. 위키백과를 보면 라캉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을 인용했는데, 그 모든 주장에 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16/09/16 16:25
네. 어떤 사상이든 가능성은 있으니 재평가의 여지는 항상 열어두어야겠죠. 이를 비판하는 의견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리셔서 설명해드린 것 뿐입니다. 딱히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판단은 프리온님의 몫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를 비판하는 주장 모두는 결국 주장일 뿐입니다. 그게 단호할 수도 있고, 다소 여지를 남겨놓을 수도 있죠. 사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재평가는 언제나 귀기울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떤 사상에 관한 단호한 평가를 '재단'이라며 거부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대신 그 단호함이 굳어져 깨지지 않는 신념이나 과도한 숭상을 부르는 종교적 영역이 된다면 그때는 단호함도 비판받아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과학의 권력화 같은 부분이 그러하겠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종교화 성향은 도리어 라캉 지지자들에게서 더 많이 보여지고 있죠.
16/09/16 18:58
진행중인 사유기만 하면 지적유희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적용하면 판타지 설정놀음도 똑같이 학문이고 날아다니는 스파케티교도 학문이 되죠. 이런 극단적인 상대주의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중에 하나로 꼽히기도 하죠. 자연과학 하는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사회나 자연을 이해하는데 1g이라도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실 별로 할말이 없는게 포스트모더니즘이기도 하죠.
16/09/16 23:24
문학박사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라캉에 대한 몇몇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그쪽 미학을 자신의 주요 비평자원으로 활용하고 계신 교수님 밑에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저도 많은 영향을 받은 편입니다.
최근 자연과학 전공자들과 스터디를 진행하면서 인지과학 쪽 책들을 접하고 그쪽 담론을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문학적 시각의 협소함을 많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중적 인기의 문제보단, 인지과학의 발달로 인해 해명되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담론에서 기인하는 것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지적평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자신의 철학을 개진한 랑시에르의 애잔한 변명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죠. 종교의 체계적 서사와 그것을 믿음으로서 가능해지는 위로와 구원의 실질적 효능과 같은 층위에서 여전히 정신분석학은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진리보단 상상력과 그것을 믿는 것으로의 관계가 더 중요한 종족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인문학/사회학은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를 줄이고, 상호간에 이뤄낸 학문적 성취를 잘 활용하는 것이 오늘날 더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16/09/17 00:59
저도 해당 전공자로서 참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인지과학이 과학이라면 임상은 서사가 아닌가 합니다.
라캉이 더이상 자연과학만큼 마음의 작동 원리를 설명해주지도 못하고 설명 과정도 과학적이지는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기계인 동시에 내러티브라는 점에서 라캉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16/09/17 01:49
음... "라캉이 마음의 작동원리를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못하고, 설명 과정도 비과학이지만, 라캉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말씀 같아서;;;
라캉으로 심리를 파악하려 한다면 이는 방식부터 잘못되었으니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의 방식으로 서사를 파악하는 것은 이해의 방식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봐요. 라캉을 통해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는 비평이 여전히 유효한 점이 그 증거겠죠. 마음의 서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기 보단, 서사의 마음(핵심, 구조 등)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그 이전에 과연 마음의 서사라는 게 무엇인지, 이것이 실재하는 지도 좀 의문입니다.
16/09/16 15:10
작품이야 세상에 내놓는 순간 생명력을 얻죠. 해석을 이렇게 하는 사람 저렇게 하는 사람 해석이 왜 필요하냐는 사람 모두 각자의 근거가 있기때문에 존중받을만 한데 그걸 이해석이 맞다 저해석이 맞다 해석이 왜 안중요하냐 이렇게 대단한 영환데 하는 싸움질을 하는게 문제죠. 제가 그래서 라캉을 안좋아합니다. 제가 생각할땐 하나도 안중요한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때문에...
16/09/16 15:28
영화를 보고 쉽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사람의 해석을 보고싶은 욕구가 생기고 자신의 해석을 보여주고 싶은거죠
곡성은 해석하는게 더 재밌는 영화인거 같습니다 물론 영화를 통해 감독이 하고자하는 말이 세월호 사태인가는 알 수 없지만 어느정도 통한다고 봐요
16/09/16 18:15
감독의 생각을 알려고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이 작품 자체로부터 가능한 가상의 세상을 자기 머리속에서 재구성하기 위해서 작품을 보는 것..이니까,가 아닐까요?
16/09/17 01:03
저는 개꿈이라는 게 영화가 사용하는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는 관객들과 곡성의 해석자들이 완성시킨 게 아닌가 했어요.
16/09/16 18:08
종교적 해석을 보고 싶은데 기독교를 몰라서 감독 의도를 모르겠더군요.
이 부분은 확실히 감독 의도가 있는 것 같아요. 다른건 시작화면이 낚시 미끼끼우는 거로 시작하는 걸로 끝난거 아닌가요 크크 개연성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죠 떡밥을 무냐 안무냐
16/09/17 00:48
악한 일광은 종구가 미끼를 물었다고 현혹하지만 무명은 종구에게 니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라고 명확하게 진실을 이야기해줍니다.
이유도 있고 의미도 있습니다. 단지 인간은 멍청해서 이성넘어에 있는 신의 뜻을 이해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뜻을 오해하고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말해줘도 안믿을텐데'라고 외지인 말하는것, 무명이 그냥 믿으라고하는것도 다 이런이유 때문이죠 영화를 다시보세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일본인을 죽인것은 누구였으며. 시퍼런 낫을들고 동굴로 찾아간 부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16/09/17 01:18
그 넘은 사람이 아니여, 귀신이제
하는 무명의 진술은 충돌적입니다. 신의 뜻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비개연적인 것이고 모순적인 것이죠. 해서 멍청하고 이성적인 인간들은 그 신묘한 이치를 이해할 수가 없어, 극에 개연성을 찾고 곽도원은 인생에 개연성을 찾습니다. 외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지인의 그 대사 자체가 곡성의 주제라고 생각해요 "말해줘도 안 믿을 텐데" 관객들과 해석자들이 극의 개연성을 두리번거리듯, 곽도원도 자기 딸이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자기네 가족들이 왜 이런 참극을 당하는지 계속 따집니다. 일광에게 따지고, 무명에게 따지죠.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낚시 타령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무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일광이 사진을 떨어뜨릴 때 무명은 다시 한 번 패러독스가 됩니다. 곡성의 개연성(왜 내 딸이 이런 일을 당하느냐)은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개연성이란 실은 비개연적인 것이라는 비유 말입니다. 이유가 없거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라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딸의 귀신들림-곽도원의 관계성과 곡성-관객들의 유사함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영이 아니라면서 낄낄거리는 일본인의 악귀 같은 모습에서는 초현실과 반어만 느껴졌습니다
16/09/17 12:34
설정상 무명은 곡성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실체를 목격하는 존재로 고넘이 귀신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종구와 종구의 플롯을 따라서 영화를 따라온 관객과는 달리 무엇이 사람이고 귀신인지 정확히 인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종구에게 말해주려고 애쓰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명의 진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모순된 것처럼 해석된다는 겁니다.(물론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의도 즉 아주 치밀하게 설계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들은 종구나 관객들의 눈에는 동일한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하나가 아닙니다. 무명이 바로앞에 있는 종구를 두고 '네 딸 애비'라고 지칭하거나 효진을 두고 '요만한 애'라고 표현하거나 일본인을 죽는놈이 아니라고 했다가 종구에게 죽임당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를 암시하죠. 스크린에서 다같은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무명의 진술을 통해서 귀신과 귀신아닌 것, 귀신에 홀린 것과 홀리지 않은 것으로 구별 할 수 있게 됩니다. 다시말해 무명의 말은 개연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연성을 부여하는 아주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09/17 14:27
사실 하나가 아니라는 것부터가 독거노인님의 뇌피셜이죠. 무명의 진술이 하나가 아닌 것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이고 개연성 있는 사실인지, 아니면 동일한 대상에 대한 충돌적인 진술인지 어떻게 아나요. 그걸 알 수 없는 지점부터 곡성의 낭만적 아이러니가 시작됩니다. 문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다의적 상황 연출인 거고 부조화 형성인 거죠. 거기에는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서로 얽혀드는 맥락의 소용돌이가 있는 거지 선후 관계에 대한 팩트가 있는 게 아닙니다
무명의 입장보다 관측자의 존재가 더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16/09/17 16:54
감독이 인터뷰로 밝혔습니다. 무명은 신이라고. 이건 그냥 설정입니다.
충돌적 진술이라.. 무명의 진술에 따르면 일본인은 죽는놈이 아니면서 종구에게 죽어버린놈이 되는데 이걸 충돌적 진술이라고 여지를 만드는게 더 웃기죠. 그리고 뭐 결국 믿는 사람 마음이라서 주저리 주저리 떠들고 싶지 않습니다만 하나가 아니라 둘임을 암시하는 것은 무명의 진술 뿐만이 아닙니다. 중간에 종구의 플롯이 이탈하는 장면이나 첫번째 무명과 종구의 대화가 끝나고 일본인이 등장하는 장면등등 말씀하신대로 팩트가 아니라 맥락상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거죠.(물론 저는 팩트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팩트라고 진술하는 것으로 읽어내는 관측자가 있을뿐이죠.) 곡성은 아무 의미없는 영화 , 그냥 낚시영화,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영화라는 식으로 해석 아닌 해석(마찬가지로 뇌피셜이 되는...)을 하면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죠. 무수하게 많은 영화의 상징,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니깐요. 그런데 실제 영화가 그런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중요한 어떤 메세지가 있다면? 그건 영화를 곡해하고 영화의 가치를 심각하게 깍아내리는 셈이 되는거죠. 물론 저는 나홍진 감독이 관객 낚시나 하려고 수년간 시나리오를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6/09/17 20:45
감독이 무명을 신이라 한 인터뷰는 저도 이미 봤구요
그렇다고 해서 무명의 진술의 명쾌해지는 게 아닙니다. 무명의 진술 대상이 하나인지 아닌지와 무명이 신이라는 것은 별개의 사실입니다. 신이라는 것과 신의 개연적인 진술 사이에 인과가 있나요? 그 둘 사이에 인과가 있다는 것은 독거노인님의 뇌피셜에 의한 세계의 재구성 내지는 극의 재구성입니다. 곡성을 그렇게 해석하셔도 저는 딱히 부정하진 않아요. 다만 제가 보기에는 곡성의 비합리성 자체가 비유고 상징이고 알레고리입니다. 솔직히 극의 개연성과 극의 가치 사이에 인과를 설정하는 것도 50년은 늦은 발상이죠. 장르와 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해서, 저는 감독이 관객 낚시나 하려고 오래간 시나리오를 썼다고 생각하지만 그거 자체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이었던 거죠. 낚시 자체가 비유의 기반이었니까요. 문학어는 다의어고, 그건 아이러니고, 아이러니는 부조화이고 무이고, 그게 곡성의 알레고리 그 자체입니다.
16/09/18 02:58
진술 대상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무명이 신이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무명의 진술이 충돌적일 수도 있다라는 식의 엉뚱한 해석의 여지를 두지 말자는 취지에서 제가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감독도 그런점을 염려했는지 영화 속 대부분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진술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명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신이라고 밝힙니다.
다시말씀드리지만 저는 여기서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뿐입니다. 이 영화가 개연성이 없고 비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Samothrace님의 뇌피셜이 되겠지요. 곡성에는 상징적의미들이 셀 수 없이 뒤얽혀져 있으며 그 상징들을 통해 감독은 오히려 지나칠정도로 개연성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다의적이라고 하기에는 그 많은 해석들이 무명의 진술과 모순되고 말죠. 아무 의미없는 영화라고 잘라말하면 잘 설계된 상징적의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영화의 중요부분을 통째로 편집하면서까지 플롯에 집착하면서 연출효과를 극대화하고 어떤 메세지를 던지고자한 감독의 의도와 노력 역시 똥이 되는거죠. 영화 그자체가 무를 지향하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영화를 그렇게 재구성 할 뿐이죠.
16/09/18 03:07
텍스트는 작가와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무명이 신인지 아닌지와 진술 대상이 하나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사실이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무명의 진술 대상이 하나인지 하나가 아닌지 알 수 없는데 그 자체가 충돌이고 모순이고 부조화고 아이러니인 겁니다. 충돌이고 모순이고 부조화이고 아이러니이기 떄문에 영화는 비개연적인 서사로서 드러나는 거죠.
작가의 입장은 텍스트가 나온 이상 관측자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오독 그 자체가 긍정되는 시대인데요. 극적 구성이 다의적인 이상, 여기에 감독이 어떤 각주를 붙이든 관측자 의견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관점이죠. 독거노인님이 작가를 언급하시는 것도 비평의 한 관점일 뿐, 절대적인 게 아닌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극의 다의성과 관점의 다양성이 의미 있는 거겠죠. 그리고 계속 말씀드리지만, 아무 의미 없는 영화라는 게 아니라 곡성의 비개연성 자체가 의미고 그게 아이러니 기법이라는 거죠. (애초에 비유니 상징이니 하는 수사적 기법들의 존재 양상이 다의적 속성을 지닙니다) 무를 지향한다는 것도 영화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아이러니의 속성인 겁니다. 문학에서 아이러니란, 말의 수사법이(극으로 치면 연출이) 조화/합리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모순 역설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부조화 상태가 무의미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곡성이 비개연적인 서사라고 하여,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거죠. 충돌과 모순, 역설과 반어, 부조화와 무 그 자체가 곡성의 비유고 상징이고 알레고리입니다. 비개연성 그 자체가 의미입니다. 물론 무명=신 같은 기본적인 설정상의 비유마저도 다의성이 크다는 건 아닙니다. 그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무명이 신이라는 것과 무명 진술의 개연성은 서로 인과가 없습니다.
16/09/18 03:45
작가주의를 지향하는게 아니라 작가의말이 가장 효과적이라서 차용을 했을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명의 진술이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적이다와 같이 엉뚱한 해석은 지양하자는 의미에서 말씀드렸을뿐입니다.
다의적으로 재구성하고 노력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명백하게 특정한 의도를 가진 텍스트를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읽어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상징이 다의적으로 읽혀질 수는 있어도 상징과 상징이 만나면 특정한 의미와 개연성이 부여됩니다. 뭐 어쨌든 그런 외적인 이야기를 하자는게 아니고 논점으로 돌아와 이 곡성이라는 영화가 Samothrace님이 주장하는대로 정말 개연성이 없고 비합리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점입니다. ( 제가 말하는 의미없음은 아이러니적의미마저도 없다는 게 아니라 개연성을 갖추는 서사적의미없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모 비평가는 2시간이 넘는 비평 영상을 만들었던데 저는 그거보다 더 길게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개연성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Samothrace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말하지 않으면서 판만 벌인것같군요 그점에 대해서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밤 되십시오.
16/09/18 03:56
독거노인 님// 곡성 같은 비개연적인 서사에도 맥락이라는 건 있어서 그 맥락을 따라 의미를 읽어낼 수는 있죠.
저도 그런 것까지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사실주의극처럼 현실의 모방에 충실한 리얼리티 감각이라는 게 없다는 겁니다. 물론 당연히 의도된 거라고 보고 이 자체가 곡성의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곡성의 모순과 아이러니 그 자체가 비유인 거죠. 보수적인 서사의 개연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곡성의 핵기능 단위들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제가 보지 못했던 걸 수도 있지만요.
16/09/21 13:05
Samothrace 님// 서사적 개연성은 리얼리티와 꼭 관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사적 개연성은 리얼리티가 있다기 보다 이야기의 메세지를 해석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약속된 문법과도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리얼리티와 교집합적인 측면이 당연히 존재하지만, 꼭 리얼리티를 따라야 개연성이 있다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곡성은 두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객들을 현혹시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으로 전면에 노출되는 층위입니다. 이것들의 개연성은 불완전하거나 모순되어있습니다. 외지인의 집에서 찾은 실내화와 효진의 노트에서 찾은 음란한 낙서들을 종구의 의심이라는 접착제를 통해 결합시켜서 마치 외지인과 효진 간에 성과 관계된 부적절한 무언가가 있을 것처럼 관객들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더이상 설명되지 않죠. 마찬가지로 영화 말미에 동굴 속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외지인을 악마로 변하는 장면과 파국적 결말을 맞이한 종구의 상황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그래서 마치 외지인과 일광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종구는 그저 피해자가 된 것처럼 관객들을 오해하도록 만들죠. 하지만 이러한 해석도 무명의 진술과 모순되기 때문에 개연성이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층위에서의 개연성의 모순, 불완정성으로 말미암아 관객들은 Samothrace님이 말씀하시는 서사의 재구성(뇌피셜)을 하려고 합니다. 말이 안되는 걸 말이 되는 식으로 자꾸만 보충하게 되는거죠. 아마 여기에 대한 저의 생각과 Samothrace님의 생각이 일치할거라고 봅니다. 두번째는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서사전체를 관통하는 개연성을 지닌 완성된 이야기의 층위입니다. 하지만 첫번째 층위와 딜리 은닉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묘사되어서 관객들이 보지 못하거나 오인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영화 곳곳에 숨어 있으며 마치 퍼즐처럼 조각들을 맞춰나갈 때 영화의 진짜 의미기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층위를 왜 드러나지 않게 숨겨놓았는가? 결국 관객들이 진짜 이야기를 알 수 없도록 은닉된 것은 개연성이 없거나 약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은닉, 오해 그자체가 개연성을 부여하는 장치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창동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전도연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죽인 가해자의 딸과 자꾸만 만나게 되는데 그 계속된 만남에는 어떠한 설명도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두사람의 만남은 개연성이 없는 것이죠. 하지만 개연성 없는 만남 떄문에 전도연의 미친행동들이 개연성을 얻게 됩니다.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으니깐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곡성에서는 종구 눈에 사건의 진짜 이야기, 즉 진짜 원인 자체가 은닉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혼란스럽기 때문에 종구의 행동들과 사건의 결과들이 개연성을 얻습니다.
16/09/21 19:09
독거노인 님// 네 서사적 개연성이 곧 극의 리얼리티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장르에 따라 극이 추구하는 리얼리티는 달라집니다. 사실주의 극에서는 개연성이 곧 리얼리티이며 그 있을 법함이 근대 소설의 미덕이었죠. 곡성이 추구하는 리얼리티는 다릅니다. 곡성이 추구하는 리얼함이란 초리얼함입니다. 이른바 하이퍼 리얼리티라는 것이죠.
두 번째 문단과 같은 주장을 계속 하시는데 보다 보면 참 의아합니다. 그건 무명을 개연성 그 자체로 보기 때문인데요. 그 말인 즉 무명을 중심으로 극을 해석하고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텍스트 그 자체겠지요. 물론 그러한 독거노인님의 해석 방식은 존중합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문제죠. 극은 있는 그대로 그냥 있는데 무명의 말에 따라 어떤 것은 걸러내고 어떤 것들을 취합해서 일련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뇌피셜이죠. 물론 저는 뇌피셜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뇌피셜들이 난무했던 곡성이란 영화를 좋아하구요. 위에서도 계속 하는 말이지만 신의 진술이라고 해서 개연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제가 답변해드릴 건 곡성에는 보수적인 서사의 개연성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이야기의 핵기능 단위들 사이에 그토록 강력한 연결고리는 없다는 거에요. 단지 판타지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컬트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사실주의극에서 리얼리티가 곧 개연성이라는 말과 취지가 비슷합니다.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 같은 거 보면 비현실적이지만 인물 관계나 이야기에 현실적인 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게 이른바 개연성(있을 법함)이죠. 오컬트도 영화도 마찬가집니다. 단지 극이 묘사하는 대상이 비현실적일 뿐, 서사의 작동 방식에는 현실적인 논리가 있습니다. 그게 보수적인 서사에서 나타나는 개연성이죠. 근데 곡성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물론 맥락은 있겠죠. 이건 모든 서사에 들어 있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 흐름이 현실적인 논리에 입각해서 드러나면 보수적인 서사의 개연성이 되는 거고, 아니면 곡성 같은 초현실극이나 마술적 현실극이 되는 것이겠죠.
16/09/22 11:09
Samothrace 님// 저는 모두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명의 진술은 부분에 불과하구요. 아무 이유없이 무명은 신이고 개연성 그자체로 보는것 역시 아닙니다. 단지 길게 주저리 주저리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앞서 말씀드렸지만 죄송하고 또 Samothrace님이 충분히 오해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Samothrace님의 말씀하시는 현실적인 개연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소재가 초현실적이고 그 논리들이 은닉되거나 추상화 되어있다는거죠. 가령 무명을 들어봅시다. 전체적인 영화의 의미망과 연출 장치를 고려해볼 때 무명의 등장과 퇴장의 아귀가 논리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단지 잘 보이지 않을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첫번째 층위에 포섭된 관객이나 Samothrace님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처음 무명이 등장했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왜 요괴와 같은 외지인이 등장하는지에 대해서 읽어내지 못합니다. 또 종구의 플롯에 벗어나서 무명이 등장하는 이유, 외지인이 죽고나서 다시 종구앞에 등장하는 이유 모두 논리적입니다. 지나칠정도로요 해석을 하기 위해서 어떤 것은 걸러내고 어떤 것들은 취합해야하는게 맞습니다.영화 부산행을 봤는데 "왜 하필 KTX를 타지?"라고 생각하고 "KTX를 타는 이유"라고 영화를 해석하면 곤란한거죠.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개연성이 있냐일뿐이죠.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봐야된다는 건 달리 말하자면 모든게 의미가 될 수 있거나 모든게 의미가 될 수 없다는 말 즉 해석은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공허한 말로 들립니다. 말씀하신대로 모든 해석이 뇌피셜이고 재구성이 되겠지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반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거라면 제가 여기서 더이상 떠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의미로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무명의 진술에 대해서 조금 해명했다면 반대로 저는 Samothrace님에게 왜 무명의 진술에 대해서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여지를 두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의적이다, 그래서 단일한 의미는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이며 영화의 텍스트 일부를 배제하는 재구성이고 뇌피셜이 되게됩니다. 굳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도 무명이 무언가 말하고 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후반부에는 노골적으로 부제와 외지인의 씬, 종구집에서 일어나는사건들을 무명의 진술과 의도적으로 교차하여 보여줍니다. 가령 종구에게 고놈이 네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어라는 무명의 진술 다음에 바로 부제가 외지인을 찾아가는 장면을 보여준다던지, 지금 들어왔어라고 하면서 종구의 집을 보여준다던지 무명의 진술을 통해 각 사건들의 시간적, 인과적 개연성을 부여합니다. 그걸 보지 못하고 오히려 배제하면 이상한 영화가 되는거고 다의적이게 되는거고 재구성이 되는걱요
16/09/22 11:42
(수정 완료)
독거노인 님// 은닉되어 있거나 추상화되어 있는 코드를 논리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개연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곡성의 개연성을 논할 때는 그런 코드 읽기를 논하는 게 아니죠. 곡성에서 보수적인 서사의 개연성만큼이나 강력한 인과의 연결고리를 연결하는 것과 곡성의 코드를 개연성 있게 읽어내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물론 코드를 아무리 개연성 있게 읽어도 그건 결국 다의성에서는 결단코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구요. 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는데 독거노인님은 그럴 수는 없다, 딱 하나의 논리-즉 명백한 개연성만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유를 물어야 할까요 맥락은 서로 읽어내는 게 비슷할 순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곡성의 맥락이 보수적인 서사에서 말하는 그 개연성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개연성이 없다고 이상한 영화가 되지도 않구요 저는 뇌피셜이라고 해서 그게 쓸데 없다거나 해석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래도 뇌피셜은 뇌피셜이고 곡성은 관객들의 뇌피셜을 통해 알레고리를 완성한 영화였다, 뭐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명 진술의 모순은(그게 표면상의 모순일 뿐이고 실은 독거노인님 말씀대로 모순이 없다 한들) 그 자체가 하나의 비유라는 거죠. 다시 말해, 곡성을 보고 "개연성 x같은 영화!"라고 말하는 관객들이나 "x같은 개연성"을 나름의 뇌피셜로 끼워맞추는 해석자들의 모습이 극중의 곽도원과 유사하다는 겁니다. 이를 유추하는 게 제 나름의 코드 읽기였고 맥락 파악이었고 뇌피셜이었지요.
16/09/22 12:13
독거노인 님//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관점의 전제 없이 어떤 주장을 당연한 것처럼 하셔서 계속 저도 다른 관점에서 반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관점의 여지는 무수하고 이미 세상에 통하는 썰만 해도 내재적 비평 외에도 열 손가락을 넘습니다. 적어도 뇌피셜은 이미 원리가 돼버렸고, 작품의 본질은 따로 찾을 수 없게 돼버렸죠. 다만, 그래도 보수적인 서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반적으로 개연성이라고 할 만큼의 강력한 연결고리는 없어 보입니다. 개연성 있는 맥락 파악에 대한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곡성의 개연성 없음 그 자체가 개연성 있는 맥락을 만들었다고 보지만요. 원래 서사의 흐름이란 게 바로 아이러니고 역설이고 조화 지향과 부조화 지향의 연속이자 자기창조와 자기파괴의 연속이지만 곡성은 특히나 아이러니와 역설이 부각된 서사고 그 부각된 연출은 현실에 대한 비유로서 의미를 가진다, 라는 게 제 뇌피셜입니다.
16/09/18 03:32
예전에 친구랑 이야기한 게 떠오르네요.
"신의 입장에서 신의 말씀은 모순될 게 없어." "그게 먼 소용이냐. 모순이라는 거 자체가 사람의 말이고 사람의 생각을 표현한 건데." 뭐 대충 이런 대화였습니다. 무명의 입장에서는 무명의 진술에 모순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초월적인 인식인 거죠. 무명의 대사를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인간이 말할 건 못 됩니다. 저도 무명 자신은 모순적인 진술(개연성 없는 진술)을 한 건 아니라고 봐요. 다만 사람의 입장에서는(독거노인님 표현을 빌리자면, 곽도원의 플롯에서는) 그게 모순(비개연성)입니다. 곽도원의 플롯이라는 것부터가 현실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되네요. 이런 맥락에서 곡성은 보수적인 서사(개연성)를 지향하는 오컬트 영화라기 보다는 초현실극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곡성의 개연성은 초현실적이고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비개연적인 것입니다.
16/09/21 16:11
말씀하신대로 컨셉을 빌려온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보는 것이기에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무명의 진술을 모순되거나 오해 될 수 있도록 비틀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거지 실제로는 모순 된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장면들, 상징들과 관계해서 본다면 모순없이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저도 무명의 진술 일부를 해석하지 못했음을 고뱃합니다)
16/09/21 19:14
독거노인 님// 대체 그 모순되지 않은 무명의 진술이라는 걸 정리 한 번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애초에 장면 연출이나 그 연출의 상징성을 해석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에 다의성이 없다고 단언하실 수 있나요? 님이 말하시는 코드가 사실주의극 하나를 그런 코드(님 표현을 빌리자면 장면들, 상징들의 관계)로 분석한 것과 뭐가 다르나요? 개연성이라는 건 그런 코드 해석이 아니죠. 그걸 맥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보수적인 서사의 개연성은 그런 코드 읽기 이전에 존재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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