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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04 05:05
재밌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본건데 네이버 베도에 플린트 락 머스킷이란 수인 전쟁물을 연재하셨던 알파캣 님이 월오탱에 2차대전사를 연재하시는데 꽤 재밌더라구요.
16/08/04 10:13
독소전이 팔 게 정말 많긴 한데, 자료는 소련측 자료가 풀린 지 겨우 20년이라 독일측 자료에 경도되지 않도록 하는 주의가 필요하죠.
16/08/04 08:45
글 내용이 상당히 쉬우면서도 핵심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써 주신 내용을 근거로 어차피 소련과 일전할 운명이었다면 바르바로싸 개전은 전략적으로 95% 정도는 잘했다는 입장입니다. 양면전선이 병크는 맞는데, 시간 늘어진 후에는 스탈린에게 선공권 넘어가고 그 때에는 스탈린이 전쟁 걸었을 거라고 봐서요. 오히려 독일 입장에서 그리스, 유고에 발목잡히지 않고 1달 정도 빨리 침공했으면 역사가 더 끔찍하게 변했을지도.. 역시 양차대전에서 큰그림 그리시는 역사의 수호자 갓탈리아..
16/08/04 10:21
적어도 스탈린은 아무리 빨라야 1944년 이전에는 요새 축조 문제와 스탈린 자신의 독일과의 평화를 위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라도 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가 제 의견입니다.
그리고 발칸에서 낭비한 한 달이 소련을 살렸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을 가장 끔찍하게 괴롭혔던 것이 다름아닌 월동 준비였죠. 로코소프스키나 미하일 카투코프처럼 제한적인 시간벌이를 잘 활용하는 장군들도 있었고 바르바로사와 태풍 작전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진격을 둔화시킨 것은 명백히 소련군의 역량이긴 했습니다만, 그 조직력과 그 엄청난 피해를 복구할 시간 없이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었는지는... 좀 의문이 많이 드는 게 사실이죠. 당장 모스크바 전투에 동원된 병력도 예상과는 달리 소련 측이 적었던 판이었으니까요.
16/08/04 09:28
이렇게 긴 글 단숨에 읽었네요~~
어찌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쓰실 수가... 제가 가지고 싶은 능력입니다... 참 독소전은 역대급 대전이네요~~ 제가 알기론 가장 사상자가 많이 나온 전투 같은데 맞죠~??
16/08/04 10:36
제가 긴 글 사이에 딴소리를 넣어 주제를 흐리는 것이 전매특허라, 모쪼록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흐흐
독소전은 누가 뭐래도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참혹하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 맞습니다. 천만 단위의 사상자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나온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죠. 혹시나 해서 극히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ISIL과의 전투를 보니 놀랍게도 위키백과 기준 집계된 사망자 수가 모두 합쳐 대략 4만 가량이더군요. 그러니 수천만 단위의 사망자가 발생한 독소전쟁은 얼마나 처절한 전쟁이었을지는... 다만 워낙 데이터의 요동이 심해서 그렇기는 합니다만 만만치 않은 집계가 더 있는데, 13세기 몽골의 침략(누계 사망자 추정 6천만 명), 제1차 세겨대전(누계 사망자 약 4천만 명), 태평천국 운동(누계 사망자 최소 2천만 명) 등등이 있습니다. 또 2차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국가별로 보면 중국이 소련 다음가는데(최소 1천 5백만 명), 최소 730만의 전투원 손실과 일본군의 악랄함으로 인한 높은 비전투원 손실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의 인명이 목숨을 잃은 바 있죠.
16/08/04 10:47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얼마 전 월드오브탱크를 시작하며 관련된 역사지식(?)을 조금씩 읽고 있었는데 이 글로 정말 한번에 정리가 됬습니다!
그 동안 독일의 소련 침략은 독일을 패배로 이끈 히틀러의 실수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치 독일로서는 사상적으로 소련을 침략할 수 밖에 없었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소련 국방의 변격점에 침략한 시기가 약할 때를 노린 (어차피 침략할 것이라면 나중에 국방이 강화되었을때와 비교하여 더 나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시각은 새롭네요. 결국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실패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낳게된 것이지만, 전략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나 봅니다. 만약 독일이 1941년에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면 소련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16/08/04 11:06
음, 저는 모스크바를 설령 독일이 잡았다한들 전쟁이 독일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려 독일이 양면전쟁을 열어제낀 것 자체가 문제라는 '개전 불가론' 쪽에 가깝죠.
모스크바가 넘어갔다면 문자 그대로 대참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소련의 영토는 광대한 것이었고, 소련이 자랑하는 생산공장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있던 걸 마지막 순간까지 다 뜯어서 우랄 산맥 너머로 보내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들이 재가동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그 사이에 모스크바 전투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만 설령 모스크바에서 깨졌다한들 독일군의 병참 능력으로는 우랄 너머의 공장까지 건드는 건 무리였을 겁니다. 암만 잘해봐야 모스크바가 공세종말점이었을 거란 이야기죠. 모스크바가 독일군에 넘어가는 것은 재앙이 맞습니다. 헌데 세바스토폴과 로스토프를 위시한 남쪽 방면의 전선은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였고, 모스크바에 소련의 전군이 다 대기하고 있던 것도 아니니만큼 '한동안은' 소련이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한동안'은 독일군이 물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겠죠. 여기에 미국의 도움이 가세한다면... 즉, 모스크바가 설령 넘어갔다 한들 소련군에는 아직 싸울 힘이 남아 있었고, 소련의 영토는 지나칠 정도로 광대했으며, 병참의 문제로 인해 독일군은 그래봐야 모스크바가 공세종말점이었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미국의 존재가 있기에 결과적으로 시간과 그로 인한 출혈이 훨씬 더 심할 뿐 독일은 소련과 개전한 이상 패했을 것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16/08/08 09:50
모스크바 점령 후 인질 및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서 국경선 확장 및 군축 등,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는 없었을까요? .. 결국 히틀러는 필멸의 존재였는지요?
16/08/08 09:56
애초에 독일은 절멸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인질 따위는 거의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만 1942년까지 독일군은 포로를 자국의 노동력에 동원하는 것을 명백히 망설이고 있었죠.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더러운 볼셰비키 슬라브 족들'에게 자국의 '성전'에 참여하는 영광을 주지 않겠다는 쪽에 가까운 한심한 짓이었습니다. 더구나 애초에 강화조약 따위는 적어도 독일군이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라인(소위 A-A 라인)까지 진출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는데 독일군은 이미 공세한계에 도달하여 모스크바 점령 자체가 기적이 될 판이었죠. 실제로 그런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구요. 그러니 소련과 전쟁한 것 자체로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났을 수밖에요.
16/08/08 11:24
전 히틀러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냥 유희수준에서 독일군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승리의 조건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할 가능성은 없었는지 궁금한데, 단언컨데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말씀이신거죠?
16/08/08 13:21
1% 정도의 희미한 가능성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정도인데(대표적으로 <독소전쟁사>의 역자인 채승병 씨는 모스크바 함락을 전제로 희박한 가능성이 있기는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조차도 없었다는 축이죠. 저만의 생각은 아니고,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9~1945년>의 저자 제프리 메가기도 이쪽입니다.
16/08/04 11:18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글을 잘 읽히게 쓰시네요. 부럽습니다.
육상전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부 기록(빌헬름 카이텔의 구술을 정리한 'In the Service of the Reich' 등)에는 히틀러가 이미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직후부터 OKW에게 그리스-지브롤터 양면 공략을 41년 초에 실시하도록 지시했다는 언급이 있다는 듯 합니다.(물론 그리스군에게 이탈리아군이 삽질을 할 줄은 몰랐겠습니다만 이집트 방면 영국군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경계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지브롤터 공략은 40년 이탈리아 참전 시기부터 떡밥으로 심심하면 등판하던 이야기라(1941년 12월 알렉산드리아 공격처럼 MAS, 그러니까 자폭 모터보트 또는 유인 어뢰를 다량으로 투입하려 시도했습니다만 이 때도 그렇고 히틀러의 지브롤터 공략 결의때도 그렇고 프랑코가 결사반대해서 무산되었죠) 유고슬라비아-그리스 공략이 주체인 발칸 전역은 어느 정도 독일의 의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따라서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지연에는 히틀러 본인의 책임도 조금 있지 않나 싶습니다.
16/08/04 11:28
애초에 무솔리니가 건들지 않았으면 호의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으로 남아 있었을 그리스가 이탈리아와 붙은 게 40년 10월 말이었고, 등 뒤에 적을 놓고 싸울 수 없다는 의견 때문에(+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히틀러의 올바른 판단으로 인해) 이듬해 발칸 반도에 발을 들여놓게 되죠. 그리스가 연합군편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루마니아가 영국 공군의 폭격을 당하게 생겼는데 하필 독일군의 기름의 원천이 바로 이 루마니아의 플로에슈티 유전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러 모로 봤을 때 이왕 적으로 돌아선 발칸 반도를 즉각 점령하는 건 독일군 입장에서 올바른 선택이었으되, 무솔리니의 말도 안 되는 욕심이 아니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보기에 저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지연 책임을 전적으로 무솔리니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16/08/04 12:18
요즘 앤드루 나고르스키의 '세계사 최대전투 - 모스크바 공방전' 을 읽고 있는데, 과연 1943년 이전까지는 독일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주도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전까지 거의 소풍 다니듯이 소련군을 섬멸시키고 다녔다는 기존 인식이 올바른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책에서 받은 느낌은 독소전 시작부터 소련군의 저항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며, 독일군에게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강요했고, 1941년 겨울의 모스크바 공방전은 그 이후,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 이상으로 치열하고 쌍방이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그야말로 세계사 최대의 전투라고 봐도 부족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6월 개전 이후 모스크바 공방전까지 독일군의 사상자가 100만을 넘어선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1942년 봄의 독일군은 새롭게 채워진 인원이 다수라고 봐도.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쭉 밀리다가,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지옥이 되었다기 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지옥이었던 것 같습니다.
16/08/04 12:31
예,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독소전쟁사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공히 1941년의 독일군의 진격 둔화는 독일군이 아니라 소련군의 역량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절대 독일이 일방적으로 다 털고 다닌 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다만 1942년은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스탈린의 치명적인 오판의 결과로 모스크바가 아닌 남쪽에서 엄청난 구멍이 삽시간에 뚫려버리면서 소련군 전체가 흔히 모랄빵으로 통하는 극단적인 사기 저하 상태까지 밀렸고, 이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스탈린은 무진장 애를 써야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흘린 피가 헛되지 않은 이유죠. 사람에 따라서 최대의 전투를 가르는 기준은 다 다릅니다. 또한 독소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를 꼽으라면 또 답이 다 엇갈리죠. 저는 쿠르스크 전투를 가장 중요한 전투로 치는데, 이전까지 그래도 최소한 지엽적인 측면에서나마 반격이 가능했던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꺾어버린 전투이기 때문이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뒤에 붙어 있는 독일군측 인명 손실 자료를 따지면 1939년 9월부터 1942년 9월 1일까지 영구손실(사망, 행방불명, 영구 장애)을 입은 독일군 병력이 약 92만 정도 됩니다. 6월 개전 이후로 모스크바까지의 독일군의 사상자가 백만이라는 통계는 약간 과장되어 잡힌 수치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런대로 얼추 들어맞는 정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동 책의 6장에서 초반 6주간 독일군이 입은 인명 손실은 17만 명 가량이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백만을 넘어서지는 못하더라도, 동계 인명 손실과 모스크바 공방전의 치열함을 감안해보았을 때 100만에 육박하는 것은 사실이었을 겁니다. 여하간, 독소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옥이었죠. 어느 측면에서 보던지간에.
16/08/04 13:37
어제 하츠오브아이언 4를 소련으로 플레이했는데 대숙청 패널티가 어마어마한데 안할수도 없더라구요. 왜 이런짓을 하는지 전후 관계는 잘 몰랐는데 이 글을 보니 이해도 가고 흥미롭네요
16/08/04 13:43
스탈린은 자신의 안위, 나아가 자신이 거머쥔 것의 안위를 위해서 처절할 정도로 싸우고 의심하고 두려워했던 인간이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거죠. 여기에 볼셰비키 혁명부터 이어져내려온 "내부로부터의 중상"에 대한 위기의식 내지는 두려움이 더욱 스탈린의 두려움을 부채질했구요. 게임에서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에 역설사에서는 이벤트 하나로 퉁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만...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심리를 먼저 읽어야 이해가 가능하더군요. 그 행동의 합리성은 차치하고서라도요.
16/08/04 13:57
KV는 소수였고 T26과 BT전차가 개전 당시 소련군의 주력이었단 점을 보면 소련의 전차는 독일군의 전차를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다는 말에는 그다지 동의가 안 됩니다. 여기다 양측 전차병의 능력 차이 역시 압도적인 상황이었죠. 거기다 공군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양으로도 주체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질적 우세에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줄 요약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개전 당시 독일군의 장비 인력 통틀어 질적인 우세 역시 소련군 초기 대패의 원인 중 하나라고 봅니다.
16/08/04 14:10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전차라는 게 그런 쇼크 일으키고 다 휘저을 정도였으면 진작에 전쟁 끝났죠.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차의 질에서 밀려서 항복한 것도 아니니까요(마틸다, 샤르 등등). 독일군의 핵심은 전차의 운용이 선진적이었다는 점에 있었고 이 점에서 전쟁의 우세를 판가름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 모든 걸 소련의 전차가 다 후져서 그렇다는 말로 퉁칠 수 없다는 이야기죠.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양군의 병력은 모스크바 전투 이전까지 외려 독일군이 우위에 있었더군요. 그리고 독일군의 전력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4호 전차가 417대였는데(3호 개량형과 합쳐도 약 1천 1백 대), 이미 그 때 소련군에는 967대의 T-34와 508대의 KV 전차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물론 위키에서는 장비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있습니다만, 그와 함께 전술적 역량의 부족과 숙련되지 않은 전차병이 결국 교환비 7 : 1이라는 대참사를 불러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죠. 자료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34#Operation_Barbarossa_.281941.29 / http://www.panzerworld.com/barbarossa-1941#tank-strength 딴 소리이긴 합니다만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독일군이 동원병력이 더 많을 수 있었는지 그게 좀 황당하긴 하군요.
16/08/04 14:20
아, 제가 어느 말을 빼먹었는지 이제 좀 감이 잡혔는데, 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승무원의 역량이나 제공권을 싹 빼고 순수 전차 대 전차의 기술력 싸움에서 딱히 밀리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빼놓았으니 서로 이야기하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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