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중훈의 영화를 많이 챙겨보진 않았다. 전성기 시절 <투캅스> 시리즈나 <할레루야>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고, 나머지 흐릿한 부분들은 그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인상과 비슷한 정도로 채워져있다. <게임의 법칙>이나 <라디오스타> 처럼 연기가 호평받은 작품들을 봤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더 객관적일 수 있었겠으나, 어차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배우로서의 박중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어떤 배우의 필모를 다 흝고 있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연기력 운운하며 기술적 성공을 측정할 수도 없다) 다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악바리 형사 배역이 남긴 인상은 진하게 남아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고,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목표를 쫓아 깨지든 박살나든 물고 늘어지는 그 캐릭터가 배우 자체의 싸움처럼도 보였던 것이다. 나는 코메디 배우가 아니다, 남들이 안된다 해도 나는 그저 각본이 시키는 대로 연기할 뿐이다, 나는 기어이 연기를 할 것이다. 이런 외재적 감상이 바람직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쫓고 있는 안성기란 선배와, 그를 따르는 장동건이란 후배 사이에 있는 이 구도가 자꾸 이 영화를 자전적으로 읽게끔 만들어버린다. <라디오 스타>를 보면 아마 이런 자전적 요소의 투영이 훨씬 더 심할 텐데, 그 걱정은 나중에 영화 볼 때 해도 될테니 미뤄두고.
배우의 GV보다는 감독의 GV가, 감독의 GV보다는 평론가의 GV가 더 좋고 그 중에서도 감독과 평론가가 함께 하는 GV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의 GV는 현장에서의 고충과 연기에 대한 고민에 함몰되는 경향이 큰 편이다. 그러나 박중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박중훈은 80년대에 튀어올라 90년대 중반까지는 충무로의 캡짱 자리를 고수하던 배우다. 현재 그는 이전만큼의 폭발적 도약력은 없어도 여전히 현역으로 장거리 경주를 계속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생각이 많고, 대단히 똑똑한 배우"라고 평한다. 누군가는 그를 쌍팔년도 옛날 연기만 해대는 배우라 하고 누군가는 실패한 토크쇼 호스트로 기억해도, 그는 여전히 변화를 추구하는 "젊은" 배우다. 초짜 감독의 타이틀까지 걸고 있으니 배우로서만 떠들지도 않을 것이다. 역시. 박중훈은 재미있었다. 이 사람은 이야기를 잘 한다.
박중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것은 <라스트 홈>의 두 주연배우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다. 공격수와 수비수라는 비유는 지극히 일반적이었고 뒤이은 이야기는 어떤 디테일보다는 배우로서의 개인적 욕심에 관한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배우라는 직업 자체의 고충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박중훈은 <라스트 홈>에서 마이클 섀넌의 귀신같은 연기를 두고 "아직 이미지가 소진되지 않아 그렇게 관객들에게 먹힐 수 있었다" 라고 했다. 배우로서 가진 힘이나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배우와 캐릭터, 그 사이에 있는 관객의 관계도에 가까운 설명이었다. 누군가가 강렬한 캐릭터로 뜰 수 있는 이유는 그 배우의 연기 자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관객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미지의 한계 효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제는 지겹다" "왕년의 코메디 스타" 라는 박중훈이었다.
박중훈의 이 주장을 뒷받침할 여러 증거들이 떠오른다. 비속어의 통제가 엄격하던 십몇년 전 토크쇼에서 최민수는 "괜히 연기변신하려다 병신 되지 말고" 라며 변신 강박을 가진 후배들에게 매우 쎈 충고를 날렸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이 때 공교롭게도 류시원은 터프가이 캐릭터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안소니 홉킨스는 한니발 캐릭터 이후 이거다 싶은 홈런을 때린 적이 없다. 넓은 간극을 뛰어넘는 새무얼 엘 잭슨은 늘 특유의 억양과 눈알을 굴리는 연기로 캐릭터를 만든다. <라듸오 데이즈>나 <방자전>에서 류승범은 꽤나 멀쩡하고 신사적이며 때로는 비겁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그는 늘 양아치 연기의 1인자라고만 불린다. 그리고 그가 호평을 받은 가장 최근의 캐릭터는 류승범의 시그니쳐 캐릭터에 훨씬 더 많은 비열함을 섞은 <베를린>의 동명수 역이다. 아마 크리스토퍼 왈츠가 맡을 미래의 배역들은 한스 란다 대령이나 닥터 킹 슐츠의 캐릭터와 완전히 다른 무엇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셀 수도 없는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들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미세한 차이점을 가지고 연기 커리어를 이어나간다. 한번 박힌 이미지를 "변주" 수준에서 질리지 않게 관객들에게 팔고 있는 셈이다. 이 배우들은 다른 배우들보다 정말 무시무시한 연기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동시에, 관객의 뇌리에 음각으로 새긴 캐릭터 자체가 쉽게 지워지지 않아 그 배우를 영화 속에서 보는 게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때로 배우의 연기력이나 (무슨 전투력도 아니고 이런 말을 진지하게 연달아쓰려니 슬슬 우스꽝스러워진다) 진심을 뒤덮을 정도로 후자의 조건은 강하게 작용한다.
박중훈이 마이클 섀넌의 릭 카버 역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듣는 나조차도 반신반의했다. 짜증을 억누르고, 기계적인 태도로, 장롱과 화분과 함께 사람까지도 집에서 치워버리는 마이클 섀년의 냉혈한을 박중훈이 과연 연기할 수 있을 것인가. 냉정히 따지면 이는 박중훈이라는 배우의 연기력(...)과 과연 크게 연관이 없을 것이다. 내 의심은 몇편 보지 않은 채로 그 배우가 주는 "인상"에 따른 것이었다. 박중훈이 릭 카버 역을 못할 것 같은 나의 이유는 "박중훈이 그 역과 안어울려서"이고 이는 전적으로 박중훈이라는 배우의 이미지와 연관된 것이다. 박중훈이라는 배우의 소시민적이고, 털털하고, 그래도 미워할 수 없는 개구진 모습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박중훈씨는 매우 동안이었고 저 늙어보이는 마이클 섀넌은 박중훈보다 동생이다) 이미지의 접착력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주성철 편집장이 짚어주기 전까지는 아마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까먹고 있었을 것이다. <깡패수업>과 <세이 예스>에서 맡았던 박중훈의 캐릭터가 마이클 섀넌의 릭 카버보다 훨씬 더 강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배우가 익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미지 변신이 실패로 끝날 때는 과연 이 모든 것이 온전히 배우 혼자의 책임일까.
"황정민씨가 열혈 형사 영화의 주인공을 또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게 지겹지 않겠어요?" 황정민을 대변하는 박중훈의 말이었다. 황정민에게는 시그니쳐 캐릭터가 있다. 성질 고약하고 능글거리지만 그래도 뭔가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1000만, 1000만, 800만, 900만이 본 영화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캐릭터들은 다들 공통분모가 있었고 대중들이 기억하는 황정민은 얼추 그런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배우가 되었다. 물론 이미지 변신도 배우에게는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과연 배우가 어느 정도의 변화를 추구하고, 어느 정도로 한번 자리잡힌 시그니쳐 캐릭터를 포기해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헐리우드의 배우들은 시그니쳐 캐릭터를 쭉 가지고 간다. <헝거>를 본 사람들은 패스벤더가 연기하는 매그니토가 꽤 눈에 익을 것이다. <어톤먼트>를 먼저 봤던 사람들은 매카보이의 자비에르 교수가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와 <온리 갓 포기브스>에서 <드라이브>의 주인공과 형제뻘쯤 되는 것 같은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황정민에게 항의한다. 이쯤에서 연기 변신을 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미지가 생각보다 빨리 닳아버린 배우에게 사람들은 "게으르다"라는 딱지를 붙인다. 돈 맛좀 봤느냐, 그 연기가 그 연기다 라고. 이미지의 소비라는 건 배우의 노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메쏘드 연기의 대척점에 있는 송강호를 두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비판을 하는 걸 난 별로 본 적이 없다. 황정민의 변신을 따지는 기준점을 도입하면 송강호는 지긋지긋한 배우가 되는 게 당연할텐데도. <괴물>과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들은 다르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치면 <달콤한 인생>의 황정민과 <베테랑>의 황정민은 다르지 않은가? 필모상에서 연속되는 <설국열차>와 <관상>과 <변호인>의 송강호는 무엇이 그렇게 달랐을까? 흥행정도도 지금의 황정민과 비슷한데 송강호는 그런 자가복제의 비판에서 비켜가고 있다. 이것은 과연 황정민의 연기력이 아직 송강호만큼은 안되고, 송강호는 이미지 소진을 적절히 잘 해서 그런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황정민은 어떤 책임을 지고 무슨 노력을 더 해야 할까. 노먼 베이츠 같은 정신병 환자나 로버트 드 니로 같은 체중변화로 연기변신을 꾀해야 한다는 건 정답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배우가 가진 이미지의 소진과 고착화는 배우가 알아서 잘, 영리하게, 전략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미지를 소진해갈 수록 대중들의 눈높이는 높아지며 배우에게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요구한다.
"전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를 배우로서 믿지 않습니다. 배우란 다 같이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마라톤 러너로서의 근육을 갖춘 배우도 있고, 100미터 단거리 주자로서의 근육을 가진 배우도 있는 거죠. 배우라는 게 모든 역을 다 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박중훈의 이와 같은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우리는 천의 얼굴을 부정하는 사례들을 숱하게 봐왔다. 그러나 천의 얼굴이라는 환상은 아직도 어떤 경지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 번에는 이 역할, 저 번에는 저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이 전에 했던 역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의 변신이 진정한 배우로서의 능력치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욕심이 과연 즐거운 소비태도인가는 차치하고, 이것이 공급자들에게 가능한 일일지 미심쩍다. 아무리 다른 연기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한 사람이, 자기가 겪은 인생과 자기의 상상력을 동원해 각본을 해석하고 살을 입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명의 사람 안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극단적 차이가 돌출될 수 있을까. 아무리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해도 그 근원은 결국 연기자 한 사람의 안에서 나온다. 그리고 배우들마다 각자의 특기가 있고 하고 싶은 연기가 있다. 이 조건들의 공통집합은 과연 어느 정도로 망망대해라서 서로 다르게 생긴 물고기들을 낚을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말을 박중훈이 했다. 무리한 변신 욕심으로 괜한 영역을 넘보다가 큰 코 다쳤다며 바가지로 욕을 먹던 그 박중훈이 말이다.
GV 초반 박중훈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했다. "헐리웃에서 히어로물의 주연을 맡을 정도의 배우라면, 자기가 원하는 배역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배우가 이런 소규모 영화에 기꺼이 출연했다는 것은 꽤 높이 사줄 수 있는 일이죠." 이를 더 깊게 파고들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우는 예술가지만 동시에 돈을 버는 일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기도 하다. 어떤 영화를 하면, 크게 돈을 벌고 유명세도 제법 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영화를 하지 않으면 미래가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개인으로서의 욕심을 과연 "진정성"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흘려보내야 할까? 배우도 사람이다. 사람은 욕심이 있고 일이란 게 항상 자신의 소명과 예술가로서의 목표와 일치하지 않는다. 상업적 성공은 배우에게 매우매우 중요한 일이다. 연기를 하고 싶고, 연기를 잘 한다고 사람들이 항상 써주는 직업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는 뭘 보여줘야 돈 벌려는 사람들이 믿고 맡기는 프리랜서다. 류승완은 <베테랑>이라는 작품으로 천만 관객을 찍었고 그는 다음 작품부터 "투자자를 오프닝 크레딧 맨 앞에 띄우는 만행을 허락하지 않겠다"라고 천명할 수 있었다. (이동진 평론가에 따르면 이는 우리나라 영화에만 있는 기이한 풍습이다) 강동원, 최민식, 송강호, 이런 배우들은 이제 개똥같은 시나리오를 받고 울며 겨자먹기로 연기를 하는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배역,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골라 좋은 영화를 만드는 데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조재현이 연극에 몰두하고, <파리의 한국 남자>같은 다소 비상업적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정도전>에서 빵 터트렸기 때문이다. 작가정신을 불태우던 김기덕은 한국 땅에서 영화를 안찍고 있다. 안 팔렸으니까. 임권택의 서편제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다들 알테고. 여기에 소속사, 연예인으로서의 이미지, 스케쥴 이런 거 다 따지면 배우의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끝도 없을 것이다.
배우 자신의 숙고를 거듭한, 이 악물고 덤빈 캐릭터와 연기는 늘 결과론으로 빠진다. 이걸 하면 안됐었다고. 도전하라, 변신하라, 라는 메아리가 늘 울리는 직업이 배우다. 도전 자체가 실패의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걸려있는데도 변덕스런 관객은 늘 손을 뻗고 그것을 잡아내라 말한다. 왜냐면 지겨우니까. 배우는 늘 달라야 하니까. 이러한 논란에 가장 많이 시달렸을 배우로서, 박중훈씨의 애환은 팬도 아닌 내 귀에도 꽤나 절절하게 들렸다. 지금의 황정민, 지금의 하정우 못지 않은 위상을 노렸던 그 배우가 이제 박중훈은 한물 갔어, 박중훈은 후배들처럼 이렇게 못해,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충무로를 걸어왔을려나. 허나 박중훈은 아직 서있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계속 덤비고 있다. 막막하다고 말 하는 이 사람의 하소연이 사치라고? 누구나 자신만의 막막함이 있다. 엉킨 고민거리를 부여잡고 눈이 감기지 않는 밤과 씨름을 한다. 잘 나간다는 배우들부터 못 나간다는 배우들까지 연기자로서의 고민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연기는 쉽지 않고, 연기 잘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지겹다는 이야기를 각오해야 한다. 늘 열심이고, 늘 고민해도 관객들은 그런 걸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하는 배우들에게는 박수가, 당연하지 못한 일을 잘 해내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박수가 필요하다. 배우로서의 박중훈과, 감독으로서의 박중훈, 그리고 박중훈이 잠깐 대표했던 모든 배우에게 짝짝짝.
@ 그리고 주성철 편집장의 섬뜩한 말. "마이클 섀넌의 저런 연기도 이제 좀 익숙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가 <테이크 쉘터> 및 다른 영화들을 아직 안봐서 이렇게 마이클 섀넌을 즐길 수 있었을 지도. 영화는 매우 좋았다.
@ 이야기꾼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한다 해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만 할 수 있다고 하던데, 이를 박중훈에게 적용하면 그가 하고 싶은 궁극적 이야기는 페이소스가 아닌가 싶었다. 웃긴데 슬프고, 슬픈데 웃긴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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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 영화중에 [내 깡패 같은 애인] 좋아합니다. 박중훈 연기중에 제일 편한 느낌 받았습니다.
황정민과 송강호에서 사람들이 황정민에 피로감 이야기하는 건 연기톤 보다 작품 코드에 반복적인 것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천만 영화가 대중에 주고자 하는 감동이 너무 뻔할때가 많거든요.
황정민한테 연기변신하라고 영조나 광해군 역할을 시키기는 애매하죠.
사극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정도면 충분히 변주를 줬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