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야근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은 처지라 마음은 힘들지 않은데. 한 주 내내 몸살감기 때문에 앓았던 몸이 고된 건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집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서 도중에 내려 택시를 탔다. 미열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한참 잘 가던 택시가 집 근처 도로에 잠시 멈춰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탄 택시 앞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내려요?"
어처구니 없는 일에 이게 뭔가 싶어 힘겹게 떨궜던 고개를 드니 웬 남자 한 명이 갑자기 차 앞문을 벌컥 열어제끼고 뭐라 하고 있었다. 빈 택시인줄 알았던지 아니면 내가 내리는 줄 알았던지 둘 중에 하나겠거니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제대로 택시를 타려는 것 같지는 않다. 기사님도 황당했는지 왜 손님이 타고 있는 택시 문을 여느냐 하고 말했는데. 이건 뭐 뀐 녀석이 성낸다고 갑자기 그때부터 쌍욕을 하기 시작하더니 문을 쾅 닫고는 또 욕을 하는 게다.
그걸로 끝났다면 어떤 정신머리 없는 인간이 잠시 헛짓거리 했겠나 싶었는데. 갑자기 다시 와서는 뭘 보냐는 식으로 와서 문을 쾅 열어서 쌍욕을 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이건 고의다. 제 딴에는 분이 안 풀리는 양 쌍욕을 하고 문을 쾅쾅거리기를 몇 차례. 그 일이 거듭되자 '내가 입이 없어서 욕을 안 하는 것이 아닌데' 하고 순간 치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아마 그 인간이 한 번쯤 더 그랬다면 내 우산이 날아가든 욕설이 날아가든 아니면 길 건너로 멱살을 잡고 끌고 가든 셋 중에 하나는 했을 것 같다.
살짝 벌개진 얼굴을 겨우 진정시키며 "술을 자셨는지 아니면 정신이 나가신 건지"... 하고 혼잣말에 가깝게 한 마디 하자. 기사님은 자기가 일진이 안 좋아서 저런 녀석이 꼬인다고 말하신다. 일진 탓이라고 자책하는 기사님과 아직도 길가를 배회하며 헛짓거리를 하는 그 인간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며, 아까 그런 쌍욕을 내뱉으며 택시를 험하게 다룬 그 인간이 어찌나 한심했던지 내 입에서는 혼잣말에 가까운 다음 말이 나오고 말았다.
"경찰서가 코앞인데 왜 저리 정신나간 짓을 하지. 나이를 헛드셨나..."
그럴 만도 한 게. 내가 탄 택시가 멈춰 있는 바로 맞은 편 길엔 불 켜진 경찰서 건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저 인간... 거기에 칼만 들었으면 택시 빼앗을 기세던데요."
"허허 참... 제가 오늘 정말 일진이 안 좋은가 봅니다. 오늘 하루 종일 저런 이상한 녀석들만 만났는데. 손님까지 피해를 보네요."
뭐 기사님 일진까지 내가 알 리야 없지만 설령 기사님의 일진이 안 좋았다 한들 어디 기사님 탓일까. 잘못한 것은 지나가다가 애꿎은 택시 안의 기사와 손님에게 쌍욕을 하고 지나간 저 작자 탓이지. 그리고 혹시 또 누가 알겠나...... 내 일진이 더 거지같았을지.
"수고하셨습니다."
덜 걸었으니 피로가 줄어야 할 터인데, 요금 3700원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고 힘들다. 야근의 피로 때문만은 아니다. 개념도 상식도 없이 지나가던 택시에 쌍욕을 퍼부은 어떤 나이값 못하는 작자 때문에 하루의 마무리가 완전히 거지 같이 끝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을 풀 데는 어디에도 없어서 마음이 매우 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한 나쁜 기분을 남에게 덮어씌우지 않고 잠을 자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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