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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0/04 18:42:27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친구가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하다.
친구가 있었다. 이십 대의 어느 날인가 내가 연애로 힘들어할 때, 그는 나를 꼭 껴안아주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뭐 이렇게 감수성 터지는 새끼가 다 있나. 아무튼 같이 울어주다니 고맙기는 하고만.'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게이라고. 사실 너 힘들때 같이 운 것도 너때문에 운 게 아니라 내가 억울해서 울었다고. 이성애 하는 새끼들은 연애를 해도 지랄 헤어져도 지랄인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서, 서러워서 울었다고.

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노력한다. 물론 당신의 연봉 혹은 학점이 잘 보여주듯, 세상에 노력한 대로 되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도 많은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적어도 친구의 성적 정체성이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함부로 대화 소재로 삼는 일은 피해왔다. 하지만 이제 해도 된다. 정확히는 해도 되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나는 입과 손가락이 싼 편이라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 친구의 약점을 잡아 협박한 결과는 아니다. 친구가, 세상을 향해 커밍아웃했다. 그는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냈고, 이제 세상을 향해 그의 정체성을 알리고자 한다. 두 개의 공개적인 북 콘서트가 잡혀 있고, 그는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와 노래를 하게 될 것이다.

친구는 철저한 클로짓 게이였다. 철저하게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숨겼다. 그는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진지한 대학원생'이며, '한때 수도사를 꿈꾸었을 정도로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그 외에도 그의 보수적이고 엄밀한 생활세계를 나타낼 만한 일은 많지만 일단 책에 나온 이야기만 하자면 그렇다. 그런 세계 속에서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아왔다. 물론 철저함이란 노력과도 같아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술과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충분히 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경험담 중 제일 웃긴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 친구가 굉장히 보수적인 자신의 친구-아마 자신이 게이인 걸 알면 자신을 혐오할 거라고 생각한 수준의-에게 몇 주일간 고민하다가 결국 커밍아웃을 했다. 그 보수적인 친구는 커밍아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 너 그거 전에 술마시다가 이야기 했어. 기억 안나냐?'

커밍아웃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아 너무하네 진짜. 너랑 나랑 친구인 게 한두 해도 아닌데 그걸 왜 지금 와서 말하냐.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냐.' 운이 좋은 친구인지 사람이 좋은 친구인지, 세상이 조금은 좋아졌는지. 그렇게 이십대를 살아가며 그는 천천히 자신의 '철저함'을 깨나가기 시작했고, 게이 인권 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함께 들은 어느 수업에서, 그는 '공개적 커밍아웃'을 시도했다. 그는 어설픈 영어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 한국어 수업이면 못 했을 텐데. 교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외부로 발설하는 자에게는 F를 주겠다. 너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라도, 나는 반드시 내 권한으로 F를 줄 거고, 윤리위원회에 제보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 안 그러셔도 되니 교수님께 연락이나 드리라고 해야지. 그렇게 수공업적인 커밍아웃을 하며 이십대를 다 살고, 서른 몇 살이 되어 이제 그는 세상에 이야기한다. I am gay. 나는 행복하다고. 그의 커밍아웃 경험담들은 대체로 나름대로 재미있는 에피소드였는데 이제는 그걸 못 듣게 되겠군. 이건 좀 아쉽다.

딱히 나한테 좋을 일은 없는데 나도 기분이 좋다. '아 이제 그놈새끼가 그동안 해온 그 수많은 패악질에 대해 하나씩 글을 써서 복수해야지'하는 생각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막상 글을 쓰자니 기분이 좋아져서 쓸 말이 없다. 그저 그의 삶과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피지알의 오픈리/클로짓 게이 분들도 힘내시기를.


-

친구가 책을 냈습니다.

<사랑의 조건을 묻다 : 어느 게이의 세상과 나를 향한 기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546091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입니다. 히히, 많은 사랑 바랍니다.

-

더불어 이번 주 목요일인 10월 8일 늦은 아홉 시. 제가 운영하는 업장인 신촌의 '바 틸트'에서 간단한 출간기념회/북콘서트를 합니다. 책을 쓴 '터울'이라는 작자는 성가대에 노래패에 밴드까지 하던 열혈 음악청년인지라 노래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현금 2만원에 16500원짜리 책과 필스너 한 병과 공연과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자리. 관심 있으신 분들은 편하게 들러주세요.

10월 11일 일요일 오후 한시에도 서촌에서 출판기념회를 합니다. 서촌 기와하우스(GIWA HOUSE, 서울시 종로구 체부동 18-8)입니다. 여기에는 책에 사용된 사진의 전시까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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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witme
15/10/04 19:10
수정 아이콘
흑 조으다..
여자친구
15/10/04 19:10
수정 아이콘
사전신청없이 그냥가면되는건가요?
헥스밤
15/10/04 19:12
수정 아이콘
네. 둘다 그러합니다.
피지알중재위원장
15/10/04 19:12
수정 아이콘
멋있네요. 친구분, 주변사람들, 교수님까지요.
제리드
15/10/04 19:14
수정 아이콘
재밌는 친구분이네요
15/10/04 19:19
수정 아이콘
좋아요.
tannenbaum
15/10/04 19:43
수정 아이콘
책이 여성학 카테고리에 묶이는 게 좀 거시기하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누군진 모르겠으나 앞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대학 1학년 때 절친 네명에게 고백했을 때 너무 덤덤하길래 제가 더 놀랬던 기억이 나네요. 한명 빼고...
한편으론 부럽네요. 내가 나라고 세상에 선포하는 그 젊음이 말입니다.
전 제가 가진 쥐꼬리만하게 들고 있는 것들을 놓치기 싫어서 '내가 낸데 왜?' 외치지 않고 들고 있는거 오물오물 먹고 살고 있으니요...
친한 친구는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세상에 섞이기 위한것이라 말해줍니다만...
15/10/05 11:28
수정 아이콘
내가 나라고 말하는게.. 참 쉽지 않죠 흑흑
15/10/04 19:48
수정 아이콘
박수를 보냅니다.
미남주인
15/10/04 19:58
수정 아이콘
광고글이 이렇게 훈훈하긴 처음이네요.

추천 드세요.
파란아게하
15/10/04 20:01
수정 아이콘
아니 피지알에 뭐 이렇게 대놓고 노골적인 광고글 좋네요
15/10/04 20:13
수정 아이콘
목요일 몇시까지 그 행사가 진행될까요?
15/10/04 20:14
수정 아이콘
응원 및 축하의 박수를 보냅니다.
돌아보다
15/10/04 21:00
수정 아이콘
크크크 아 뭐.... 이런 유쾌한 광고 글이...
보로미어
15/10/04 21:40
수정 아이콘
좋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기분이 훈훈해집니다.
추천 꾹 누릅니다
몽키.D.루피
15/10/04 21:56
수정 아이콘
이딴 광고글은 추게로 꺼져야죠.
NLostPsiki
15/10/04 22:03
수정 아이콘
이딴 광고글은 추게로 꺼져야죠.(2)

세상엔 참 멋있는 사람들이 많네요. 멋있어요. 좋아합니다. 응원합니다.
*alchemist*
15/10/04 22:29
수정 아이콘
이딴 광고글은 추게로 꺼져야죠.(3)


:)
프루미
15/10/04 22:35
수정 아이콘
저는 왜 주변에 한 명도 커밍아웃 한 사람이 없을까 좀 아쉽기도 하네요... 이런생각하는거 진짜 안좋게 볼지 모르겠지만 동성애자 친구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의 완고함?을 좀 완화시켜줄것같기도 하고... 앞으로 열심히 사회생활하다보면 한번쯤 만나게 되겠죠~ 그 게이분은 참 좋은 친구들을 두셨네요.
cottonstone
15/10/04 23:51
수정 아이콘
크크크.. 술 마시다 이미 얘기했다는 거 너무 웃겨요.
아포가르토
15/10/05 00:40
수정 아이콘
광고글이라서 신고한다는데 실수로 추천 눌렀어요 운영자님 조치 좀 ㅠㅠ
실론티매니아
15/10/05 01:46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바에 가서 조용히 피지알러라고 피밍아웃 하고 싶습니다...
그럼 화장실 맘대로 써도 되겠죠?
人在江湖
15/10/05 07:55
수정 아이콘
책상을 맘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실론티매니아
15/10/05 09:16
수정 아이콘
책상은 다른분께서 사용하실 것 같아서 전 그럼 의자를?..
세인트
15/10/05 09:25
수정 아이콘
이딴 광고글은 추게로 꺼져야죠.(4)
켈로그김
15/10/05 11:46
수정 아이콘
평일 저녁인게 아쉽네요.
토요일 저녁이었으면 가서 술도 한 잔 하고, 노래용역도 뛰었을텐데..
이어폰세상
15/10/05 17:18
수정 아이콘
어유 일단 추천 누르고 시작했습니다.
아니 근데
글은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나요??
15/10/06 12:40
수정 아이콘
시간이 좀 지나고 글도 좀 파묻힌 타이밍에 댓글 답니다.
솔직히 전 지난 트위터에서의 에스크픔 사건 이후 헥스밤님의 모든 글과 트윗에서 그 때의 문구가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가 없네요.

그 때의 일이 진짜 '취기'에 벌어진 일이기만을 바라지만, 음주 후 범죄를 심신미약 사유로 감형해주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저도 응당 그걸 따라야겠지만, 너무나 큰 실망을 했기에, '쿨남' '진보남' 코스프레가 아니길 바라는 제 걱정이 얼토당토하진 않은거라고 혼자 생각해 봅니다.
헥스밤
15/10/06 22:13
수정 아이콘
애스크픔에서 제가 했던 데이트 폭력에 대한 실언은, 당시의 사과문에서도 밝혔듯 결코 제가 '술 먹고 실수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건 명백하게 제 평소의 고민과 실천이 모자랐기에 하게 된 잘못이지, 제가 평소에는 완벽하게 멀쩡하고 좋은 사람인데 술에 취해 순간의 실수를 한 게 아닙니다.

노력과 실천들이 다른 잘못을 덮어주지는 않지만 저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올바름'과 관련된 고민과 활동을 해왔고 간헐적으로 후원도 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철저하지 못했기에 그런 실언을 한 거구요.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착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은 할 겁니다. 물론 또 언젠가 잘못을 저지를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실망을 드린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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