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한 살이 깡패나 다름없던 유년 시절, "엄마 나 백 원만"을 주문처럼 읊고 살았다. 그렇게 받은 돈의 쓰임새는 군것질이 대부분이었으며 무조건 PX에서 해결했다. 군부대 옆에 사는 군 가족 자녀들이 보통 그렇다. 값이 저렴해서 더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어느 날 우리는 작당을 했다. 그리고 PX에서 과자를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그 몇백 원 받는 용돈이 다 떨어진 게 발단이었을 거다. 밥보다 과자가 더 좋은 시기였으니 무리도 아니지. 게다가 어디서 수박 서리 같은 말을 주워들어서는, PX도 가능할 거라나 뭐라나.
계획을 세웠다. 신호와 임무를 숙지하고 잘 아는 동선을 토대로 시뮬레이션도 했다. 이미 간단한 내용이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재빨리 들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게 전부다. 곧 실행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지형지물은 아직도 선하다.
PX는 3층 막사건물의 2층 구석에 있다. 평소처럼 들어갔고 또 평소처럼 군인들은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과자를 고르는 척 만지작거리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야! 지금!!"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대로 줄행랑을 놨다.
지금이나 그때나 새가슴이긴 마찬가지라 겨우 쌀로별 한 봉지만 꼭 붙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 뒤돌아보니 2층 창문으로 내밀어 진 군인 아저씨 얼굴이 보였다. 당황과 황당이 뒤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어릿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는 PX병을 뒤로한 채 계속 달음박질쳤다. 잠시 후 아버지는 1층 사무실에서 전령을 통해 사건을 전해 들으셨는데, 훗날 당시를 술회하시기로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이없었던 것만은 또렷하시다고..
어쨌든 그때 우리는, 우리가 굉장히 날쌘 줄 알았다. 그 큰 PX 아저씨가 우리를 못 쫓아올 정도라니, 햐~. 31사단 정문 신작로를 지나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숨을 골랐다. 그제야 쥐고 있던 과자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전리품이 따로 없다.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과 알 수 없는 고양 감에 서로를 바라보며 실실 쪼개는 꼬맹이들.
사실 평소에도 들쑤시고 다니다가 혼나기는 예사였다. 학교에서 분필을 색깔별로 훔쳐와서는 BOQ 벽, 바닥에 온통 낙서하면서 놀았고 잘 정돈된 테니스장은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다. 국군의 날 행사 때 차려놓은 탁자 위 과자, 음료수들은 말할 것도 없어서 그때 찍힌 사진이 아직도 사진첩에 있다. 담당 병사들 입장에서는 아마 소악마가 따로 없었을 정도.. 는 아니고 다소 성가셨을 테지. 그래도 건빵 얻어먹으면서 나름 잘 지냈다. 그냥 미운 놈 떡 하나 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편 대대장 아들과 부대대장 아들이 PX를 털었다는 둥 별 웃기지도 않은 말이 영내를 휘돌았고, 과연 그날 저녁 집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위병소 앞에서 폭죽을 터뜨렸다가 꾸지람 받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벼락. 울고불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다리 몽둥이 부러진다는 말의 뜻이 다리가 부러진다는 건지 몽둥이가 부러진다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뚜드려 맞았고, 덕분에 한동안 안티푸라민을 종아리에 달고 살아야 했다. 특유의 약 냄새에 코가 무뎌짐에도 다리의 아픔은 오래갔다. 바로 누우면 무척 쓰라렸기에 잠은 엎드려서 잤던 걸로 기억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과 그 풀이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나 모두에게 아픈 교육이었으며 추억으로 변모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올 초에 민간위탁으로 PX 관리병이 없어진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니 이제 이것도 진짜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다. 대형 마트에서와는 달리 동네 슈퍼에 들어가면 과자가 쌓여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어릴 적 소행이 문득 스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살면서 실행력이 그때만큼 뛰어났던 적이 또 있을까 싶다. 어쩌면 너무 심심해서였을지도..
요즘 들어 더위가 한풀 꺾인 게 느껴진다. 무더웠던 여름이 뉘엿대려는 시기. 담소 한 토막으로 아주 잠시나마 흔쾌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