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경부터 눈팅을 했었는데 중간에 아이디를 까먹어서 재가입하고 하스스톤 관련 글 몇 개 외에는 쓴적이 없는 눈팅족입니다. OrBef님이 주신 기회를 이용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글은 제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13개월동안 남극 세종기지에서 제 20차 월동대 의사(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면서 있었던 소소한 episode들을 일기처럼 썼었던 글인데 시리즈로 기획한건 아니지만 반응이 괜찮으면 시리즈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자가 대부분인 PGR(?)의 특성상 처음 에피소드가 축구한 이야기인 만큼 폭망하고 접을 수도 있습니다.
*반말로 썼음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그 당시 대원들의 얼굴이 공개된 사진이 가끔 있는데, 어차피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다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지우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썩 볼만한 얼굴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Winter Extreme Sports - 설상축구
백만 삼천년 전 개그이긴 하다만, 썰렁한 이야기 하나 하고 시작하자.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 베스트 3
3위 축구이야기, 2위 군대이야기....
1위..............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그나마 2002년 월드컵이후, 그리고 몇몇 해외에 가서 성공한 축구선수들 덕분에 축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긴 했다만 그래도 아직은 '아 히밤, 어제 호날두 봤어? 그 예술적인 칼패스라니.. 못 받아먹은 루니가 찐따야 그건..'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성은 그닥 많지 않은것은 사실이다.
어쨌거나 나도 계약직 공무원이긴 하지만, 병무청의 관리감독을 받는 일종의 군인인데다 축구 이야기 까지 하려니 제일 싫어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꺼려지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남극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아무나 못쓸듯 하여 그냥 써본다.
숨쉬기 운동 외에는 전혀 아무런 운동을 하지 않는 몇몇 대원들때문에 특별히 수요일 오후를 체육의 날로 정하고 실내 체육관에서 족구나 하던 몇 주.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터라 체육관에서 족구하기는 아깝다고 생각되어 밖에서 축구를 하기로 하였다.
축구 하자고 외친 사람들이 착각했던 몇 가지...
착각1. 눈위에서 뛰어다니는게 그렇게 빡셀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모래사장에서 '나 잡아봐라. 잇힝' 이짓거리 하다가 숨이 넘어갈뻔했던 경험이 있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발 푹푹 빠지는 상황에서 뛰어 댕기는게 얼마나 힘든것인지를..
착각2. 날씨 좋은날이라고 밖에서 장시간 하는 운동을 선택한건.. 피부를 생각한다면 슬픈 선택이었다. 누가 쓴 프레온 가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존층에 빵꾸 지대로 뚤린 남극에서 쏟아지는 자외선은 울트라 초강력 선크림을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착각3. 푹신푹신한 바닥으로 인해, 하고 있는게 축구인지 미식축구인지 분간이 안 될정도로 전투적이 되어버린 축구. 자빠져도 아프질 않으니 몸을 날려 서로 태클을 신나게 날린다! 때론 발뒤꿈치를 정확하게 노리는 핀포인트 태클을 날려 헤벌떡한 포즈로 자빠지기도 한다. 물기만 안할 뿐이지 완전 개싸움.
월드컵 구장과 비교해 봐도 외관상 별 차이 없는 세종경기장. 주위의 경사와 지형지물이 게임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저쪽에 보이는 상자 모서리에 찍힌 대원만 5명이다.
어찌 되었든, 팀플레이 인지라 편을 나누고 축구 시작.
세속적인 두뇌를 사용해서, 난 반드시 3명과는 같은 편을 먹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1번 대장님. 누가 감히 대장님이 드리볼을 하시는데 막을 것인가. 정명석 대주교님이 한 시합에 100골 이상 득점이 가능한것도 대장효과 아닌가. 무조건 대장님이랑은 같은 편 해야 한다. -> 결과적으로 이건 나의 판단 미스였음. 세종기지는 무쟈게 민주적이더라. 대장님이고 뭐고 그냥 빽태클..덜덜덜..
2번 총무님. 0.1톤의 헤비함을 자랑하는 총무님. 받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무조건 같은 편 되어야 한다;;;
3번 고층대기 막내 이XX대원. 지칠줄 모르는 이시대 최후의 변강... 나이가 깡패라고 어린애는 무조건 잘뛰고, 저넘이랑 다른 편 되면 저넘 쫓아 다니느라 힘 다쓸거 같아서 무조건 같은 편이 되고 싶었다.
신나게 잔머리 굴려서 3명과 같은 팀이 되는데에 성공! 왠일로 시작이 상쾌하다.
밝게 웃고있는 태극전사팀(가칭). 윗 줄 제일 좌측 까까머리가 본인이다. 아직 뜨거운 맛을 못봐서 웃고있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전반전 시작.
발은 푹푹 빠지고, 작업복은 땀에 젖어 들어가고, 햇살은 눈부시니 참으로 아름다운 오후인걸. 처음에는 웃으면서 즐기던 대원들 사방간데서 난무하는 빽태클 속에 우정이 싹터오기 시작한다. 순간순간 씨름기술과 레스링 기술을 쓰는 대원들도 보인다.
드디어 터진 첫골. 첫골은 누가 어시스트했고 누가 골을 넣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개떼같이 몰려있던 와중에 누군가 맞고 넣은듯.
전반 30분이 종료. "풋 전후반 30분 씩이면 너무 짧은거 아닌가효?" 라고 말을 했던 내가 찐따같이 느껴질 정도로 긴 30분이었다. 이미 팬티까지 촉촉히 땀으로 젖어있어 후반 30분을 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반 끝나고 운기조식중인 본인. 왼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것이 보인다. 운동 중간중간에 적절한 담배는 너무 건강해 지지 않도록 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더라.
약간의 운기조식, 휴식이 끝나고 곧바로 후반전 시작. 역시나 전체적으로 체력이 떨어진 대원들 얍삽이를 쓰기 시작한다. 아웃라인이 없다는 걸 이용해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공을 몰고 나가서 산책을 즐기다 돌아오면, 그 사이 다른 대원들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뿐이다...
안드로메다까지 공을 몰고가 아무도 없는 와중에 여유로히 어디로 찰지 고민하고 있는 대원. 나머지 대원들은 먼산 바라보듯 여유를 부리고 있다. 골대에 기대 쉬는 대원도 보인다.
평균연령은 우리팀이 낮아서 전반전에는 팔팔했지만, 역시 아저씨 축구포스는 대단하다. 후반전이 되니 저쪽편이 지능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고층대기 변강..아니 이xX대원을 철저히 막고(주로 씨름기술로..) 전원공격을 쓰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2골을 넣어 역전에 성공한다. 태극전사팀은 그저 망연자실....후럴..
어쨌던 오늘의 체육행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고.. 고층대기 변..아니 이XX대원만이 뭔가 아쉬운듯 "너무 빨리 끊나서 아쉬운데.. 발야구라도 한판 하죠?" 라고 말해서 모든 대원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경기가 끝나고 떡실신 된 대원들. 하늘이 노래진다.... 아 저기 김태희가 보이는거 같기도 하고. 태희야 오빠 여기있어.. 얼른 만나러......와줘
오늘의 교훈.
1. 눈위에서 함부러 뛰어 댕기지 맙시다.
2. 자외선 나쁜넘
3. 걸리지 않는 반칙은 반직이 아니다. (특히 군대축구에서)
마무리 사진 : 간지 센터링을 날리는 본인. 말하기 부끄럽지만 사실 안드로메다로 공 몰고가서 아무도 없는 와중에 날린 센터링임
PS
혹시나 이 글의 호응이 괜찮으면 차기작은 남극에서 만난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