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요약 : 이 모든 게 다 음주운전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배자, 윌리엄 웰레스
스털링 브릿지 전투의 대승 이후, 윌리엄 웰레스는 10개월간 스코틀랜드 정부를 장악하며, 사실상 '왕' 이나 다름 없는 위치에 있었다. 웰레스의 '통치' 시기에 발행된 4개의 영장과 칙서가 이를 증명한다. 바로 이 시기가 웰레스 인생의 최전성기였다.
당초에는 윌리엄 웰레스와 앤드류 머레이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 왕국의 보호자' 직을 하고 있었지만, 앤드류 머레이가 스털링 브릿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한 뒤, 웰레스는 그야말로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헌데, 아직 앤드류 머레이가 생존해 있고 각종 공문서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언급될 무렵, 당시 발행된 공문서에는 이런 표현이 발견된다고 한다.
"존 1세의 이름으로, 왕국의 공동체의 동의 하에"
이 사람 기억날지 모르겠다
존 1세는 에드워드에게 잡혀가 왕위를 빼앗긴 바로 그 인물. 웰레스는 자신의 행위에 그 존 1세의 이름을 내세웠다. 머레이가 사망하고, 웰레스가 스코틀랜드의 대표가 되었을 무렵에도 이런 표현은 계속 등장한다.
"기사이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보호자이고 군대의 사령관인 윌리엄 웰레스가 존 1세의 이름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의 공동체의 동의 하에"
이런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러할 것이다.
"내 주군은 오직 잉글랜드 왕에게 잡혀가 고초를 겪고 계신 그 분 뿐이고, 나는 그 분을 대신해서 이 왕국을 잠깐 맡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부분이, 스코틀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이 윌리엄 웰레스는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뒷날 잉글랜드 군을 패퇴시키고 웰레스보다 더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 로버트 1세는,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 셈이니, 중세 시대의 권력 쟁탈전을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헌데, 웰레스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다.
스코틀랜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이 스코틀랜드 공동체로부터 나온 것이고, 이를 존 1세의 이름으로 행사한다고 지적했으며, '왕' 이 없는 상황에서도 스코틀랜드 왕국의 존재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우린 모두 스코틀랜드 왕국의 신하다!"
국왕의 부재 속에서도 실질적 통치자는 왕국의 공동체에 책임을 져야만 하고, '스코틀랜드 왕국' 이라는 공동체의 동의 속에서 자신의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가 웰레스의 독특한 면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웰레스는 과거 국왕이 발행한 영장등을 발행하며 왕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에도, 왕국의 통치권은 부재한 존 1세에게 있다는 점을 초지일관 강조했다.
이런 점 때문에, 웰레스를 "까짓 뭐 중세인들이 다 권력 따먹으려고 한거지 무슨 독립영웅?" 이라는 식으로 평가절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웰레스는 영웅적인 기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더 해 굳이 민족주의적 독립 영웅으로 보려고 해도 그럴법도 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겐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젠 우리가 공격할 차례다
아무튼 스털링 브릿지 전투 이후에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한 웰레스는, 단순히 잉글랜드의 영향권을 스코틀랜드에서 일소한것 뿐만 아니라 되려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일개 레지스탕스의 리더에서, 이제는 국력도 수배에 달하는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부대의 지휘관이 된 웰레스였다.
웰레스의 주 공격대상이 된 노섬벌랜드 지역
웰레스는 잉글랜드의 북부 노섬벌렌드 지역을 마구 공격했으며, 이후엔 서쪽 경계지역을 노렸다.
"기왕 공격을 한 것, 칼라일과 뉴캐슬은 손에 넣고 싶은데... 그 곳은 군사적 요충지란 말이지."
"그럼, 공격할까요?"
"아니. 탐나긴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지. 우리 부대의 무장으로 저 정도로 방비된 도시를 공략하는건 무리야. 그보다는, 군자금을 노리자."
현실적인 지휘관이었던 웰레스는 칼라일과 뉴캐슬 등에 항복 제안을 하면서도, 소용없는 공격을 퍼붓는 것은 피했다. 그 대신, 방비가 허술한 잉글랜드 북부 지역과 북서부 컴벌랜드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 시켰다. 말하자면 약탈 한 것이다.
요즘 시대 기준으로라면야 "아, 깬다. 결국 칼 쥐니 에드워드가 한 거랑 똑같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 시대의 도덕성을 지금 관점으로 보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역공을 취하자 웰레스의 입지가 더 단단해지는 측면도 있었다.
아무튼,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스코틀랜드를 지근지근 밞아주던 잉글랜드가 오히려 공격을 당하자, 국경 도시의 주민들은 "세상에, 이게 뭔 일이야" 하고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반응에 대한 연대기의 묘사는 이러하다.
"노섬벌랜드인들은 공포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부인과 자녀들을 재산과 함께 시골로 피난시켰다. 당시 하느님에 대한 찬미의 소리가 뉴캐슬로부터 칼라일에 이르는 수도원들과 교회들에서 멈추었다. 수도사들도 스코틀랜드인들의 면전에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웰레스의 악명이 퍼졌는데, 레너코스트 연대기(Chronicle of Lanercost)에는 이런 말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윌리엄 웰레스는 그의 앞에서 수녀들을 발가벗겨 춤추게 한, 괴물과 같은 존재이다."
요렇게 놀았단 말인가?
단 이는 상당히 극단적인 묘사고, 당대의 또다른 연대기 작가인 귀스버러의 연대기에서는 다른 식의 묘사도 나온다. 웰레스가 대략적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헥섬 수도원의 제단에 있던 성배를 병사들이 훔치자, 웰레스가 이에 대해 수도사들에게 정중히 사죄했다는 것이다.
"저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한 만행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깊이 사죄드리겠소."
여하간 웰레스의 이런 원정으로 스코틀랜드의 영토가 넒어졌다거나 확실한 독립이 담보되었다거나 하는 큰 성과는 없었지만, 어쨌건 많은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적들에게 공세를 취했다는 자신감은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잉글랜드 왕이 돌아오고 있었다.
야이 반란군 놈의 자슥들아 내가 지금 기사들 데리고 간다
1298년 3월 14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서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프랑스와는 1299년 1월 6일 까지의 휴전 협정을 체결한 참이었다.
"아...젠장. 이번에는 잘 되나 싶었는데. 저 촌놈들이 껄적거려서 영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네."
에드워드는 프랑스 원정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한 참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분노를 잉글랜드의 북방에 토해낼 만한 여력이 생겼다.
물론 잉글랜드라고 여건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플랑드르 지역의 군사적 원정, 잉글랜드 바론들의 저항, 그리고 전비 마련을 위한 경제적 어려움 등 난관은 있었지만, 그래도 에드워드는 항상 윌리엄 월레스보다 강력한 대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지 고작 한달된 시점인 4월,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 원정 준비를 위한 통치 기구를 요크에 설치했다. 그리고, 런던의 재무성과 법정마저 요크로 이동시켰다. 그야말로 쇼부를 보자고 하는 심정이었다.
"저 놈들 아주 박살을 내놓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두달 정도 시간을 줄테니, 전군은 6월 25일까지 록스버러에 집합하라!"
그렇게 소집된 군대의 면면은,
"웨일즈에서 10,900여명의 보병이 도착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징발한 병사 14,800명, 지금 도착!"
"영주들이 3,000여명의 기병을 데리고 왔습니다!
귀스버러 연대기에 따르면, 총 합류한 병력은 무려 3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고 한다(Chronicle of Guisborough, pp. 324.) 그 외에의 다른 자료들의 경우, 최소 1만 5천으로 당시의 병력을 보고 있다. 어찌되었건 엄청난 숫자인 것은 변함이 없다. 에드워드는 그야말로 스코틀랜드를 쓸어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에드워드의 소집 명령에 많은 영주들이 호응했지만, 몇몇 전쟁을 꺼리는 사람들이나 주교들은 머뭇거리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에드워드는 가히 세기말 패왕이나 할법한 명령을 내린다.
"종교적 자비는 필요없다. 최대한 잔인하게 한다면, 이 몸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성을 셋 이상 불태우기 전까지는 나를 볼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그야말로 스코틀랜드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만한 수준의 병력이 북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총지휘관은 바로 잉글랜드의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