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로 김덕령을 풀어주고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선조 29년 7월, 춘청도 어사 이시발이 급히 보고를 합니다.
7월 7일 군사 1천명이 홍산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이몽학의 난입니다.
이몽학은 한현이란 인물의 지원으로 세력을 키웠는데, 송유진의 난 때처럼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모았고
어사 이시발 밑에 소속되어 군사를 훈련 시킵니다.
이때 한현은 이몽학을 끌어들여 그를 무량사에 들어가 승려들과 인연을 이었고 동갑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휴전 중 난을 일으키는데 이전 송유진의 난 때와 다르게 5~6개의 고을을 합락하였고,
현감과 군수를 사로잡았을 정도로 세력이 컸습니다만....홍주 목사 홍가신의 군대에 의해 섬멸하게 됩니다.
난이 진압되면 당연히 관련자들의 처벌이 이루어져야 할 터인데, 문제는 그들이 난을 일으키며 떠든 이름들이었습니다.
조정대신으로는 병조판서 이덕형의 이름이 나왔고, 의병장들의 이름으로 곽재우, 홍계남, 고언백 그리고 김덕령의 이름이 거론됐던 것이죠.의병장들이야 전장에 있으니 이런 보고를 들을 수도 없었겠지만, 조정에서 보고를 다 듣는 이덕형은 매우 당황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관하더라도 역적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으니 체직시켜 달라 6번이나 부탁하는데
선조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직무나 잘 수행하라 합니다.(3번 넘어서는 굉장히 귀찮아 할 정도입니다.)
또한 같이 이름에 나왔던 의병장들도 모두 불문에 붙이라고 명하지만 단 한 명은 예외였습니다.
예상하셨듯 김덕령입니다...
권율은 김덕령을 바로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합니다.
수사 내용을 보니 가담자의 모든 입에서 한 목소리로 나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역시 김덕령이었습니다.
“역적 한현(韓絢)·이몽학(李夢鶴) 등과 결탁하여 몰래 통하여 모의(謀議)하여 성세(聲勢)를 만들고, 국가가 위태하고
어지러운 때를 당해 불궤(不軌)를 도모한 사실이 모든 역적들의 공초에서 셀 수 없이 나왔다.
한현의 공초 내에는
‘장수는 김덕령이다.’ 했고, 또
‘이몽학과 박승립(朴承立)이 김덕령을 찾아가 만나보고 함께 거병(擧兵)하는 일을 모의했다.’ 하였으며,
유규(劉赳)의 공초 내에는
‘전라도에 김 장군이 있는데 장군의 명칭은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다.’ 했고,
이업(李業)의 공초 내에는
‘장후재(張後載)가 김덕령에게 왕래했는데, 덕령이 「사세를 보아가며 하라. 」고 했다.’ 하였다."
고 증언이 나옵니다.
이에 김덕령은 소스라치며, 자신이 능력 이상의 허명을 얻어 역적들이 국가에서 자신을 쓰지 못하게 하려 한 적의 흉계이며,
자신은 역적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에 따라 역적을 토벌하러 갔으나 이미 진압되어 다시 돌아왔을 뿐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이미 그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류성룡은 송유진의 난 때에도 역적들의 공초에서 김덕령이 언급됐음에도 그 때는 넘어갔으나 이번에 또 나왔으니
그가 살 방법은 없을 거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김덕령은 6차례의 형문을 받고는 결국엔 형장에서 사망합니다.
이 사건에서 재미있는 건 김덕령이 고문을 받았을 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완전히 상이하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 라고 말해 마치 김덕령을 무조건 죽여야 할 것처럼 묘사합니다.
반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내용이 정 반대인데, 기록을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전략) 덕령이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었는데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이에 덕령은 사실대로 답변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선조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이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이 사람이 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는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은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드라마 징비록과 정 반대의 내용입니다.
선조는 그래도 김덕령이 아까워 살려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데 류성룡 외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 드는 모양새입니다.
선조실록과 수정실록은 각각 북인과 서인의 주도하에 편찬됐기에 인물의 평이나 누락되어 보충하는 것은 모를까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정 반대의 내용을 담는 경우는 의외로 드뭅니다.
하지만 사실 선조실록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상이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정실록에서 김덕령을 바로 형신할 것을 청하고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말했던 판의금 최황의
선조실록의 졸기에 사신의 평이 하나 들어가 있습니다.
(전략)
호남에 김덕령(金德齡)이라는 자가 있었다. (중략)
뒤에 역적의 무함을 받아 금부(禁府)에 나치(拿致)되니,
사람들이 누구나 그 정상을 억울하게 여기고 용맹을 아까워하였으며 상도 풀어주려는 뜻이 있었으나,
최황이 상에게 그 용맹 때문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여 목에 칼을 씌우고 손에 수갑을 채워서 끝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억울함을 가엾이 여기고 최황에게 눈을 흘기고 있다.수정실록과 거의 완벽히 똑같은 내용입니다.
선조는 김덕령이 아까워 풀어주려고 했던 뜻도 있었으나, 최황 등의 모함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김덕령을 살려준 것으로 묘사된 류성룡의 모습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실록의 기록이 거의 흡사합니다.
그가 살 방법은 없다는 것이지요.
두 번의 역모사건과 한 번의 살인 사건...그리고 너무 심한 군율 적용과 본인도 감당못할 허명을 가졌던 김덕령.
그는 본보기가 되어 희생된 것도 아니었고 선조의 시기로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 방법은 없다 여겼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었습니다.
.....
여기까지가 선조가 의병장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여 탄압한 사건으로 알려진 김덕령의 죽음의 전말입니다.
정말 선조는 알려진 것처럼 의병에 대한 두려움에 쌓여 불안감에 떠는 왕이었을까요.
오히려 꾸준히 그에게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된다 말하고 때로는 용서치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래도 그라면... 이라는 느낌으로 김덕령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가진 왕이었을까요...
또 정말 김덕령은 모두의 안타까움에 억울하게 죽은 의병장이었을까요.
아니면 모든 조정 대신들이 그가 그 상황에서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죽은 것일 뿐일까요..
어떠한 선입견에 근거하여 그럴듯하게 연출되어진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어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김덕령의 죽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