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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08 16:32:41
Name 눈시BBbr
Subject [일반] 불굴 - 3. 횡성 참사, 지평리 전투
"중공군은 그냥 밀리지 않았다. 평원에서 밀고 올라오는 미 1군단의 예봉을 피해 그들은 산악 쪽으로 주력부대를 옮겼다. 산악지형에서 펼치는 그들의 전술에 국군과 미군은 다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 백선엽


작전에 참가한 것은 중공군 4개 군 12개 사단, 약 11~12만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동쪽에 북한군 3, 5군단 5개 사단이 참가했죠.

이 중 40군은 10연대와 21연대 사이를 정면 돌파, 66군은 21연대를 돌파한 후 동쪽으로 포위, 이후 국군 5사단을 상대하기로 했으며 42군은 횡성과 지평리 사이를 돌파해 서쪽으로 포위하기로 합니다. 39군은 지평리의 UN군을 포위하기로 했죠. 8사단은 7배의 적을 직접 상대해야 했죠.

+) 당시 8사단 배치는 16-10-21연대 순입니다

어둠이 깔리던 17:00,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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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21연대가 상대했던 건 66군 198사단, 이들은 20시경에 21연대를 공격하면서 양쪽으로 후방 침투를 시작합니다. 연대장 하갑청 대령은 급히 이를 보고했고, 사단장 최영희는 조금만 철수하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22시에 21연대의 후방에 있던 미군 지원군까지 우회, 다리를 파괴하고 도로를 봉쇄해 버렸죠. 12일 01시가 되면서 연대는 사령부는 물론 각 부대간의 연락이 두절되는 상황에 처하죠. 한편 197사단도 후속해 21연대와 지원 온 미군들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죠.

급히 후퇴할 준비를 하던 미군 앞에 21연대 병력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준비가 될 때까지 국군의 철수를 중지시켜 달라고 했고, 8사단장은 자기 명령대로 그리 멀리 후퇴하진 않았을 거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때 21연대는 이미 붕괴된 뒤였습니다. 결국 03시에 모든 장비를 파기하고 후퇴했죠.

포위된 걸 알게 된 21연대장은 미 전차소대를 앞세워 돌파작전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05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각 부대의 상황을 알 수도 없었고, 적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모든 장비를 파기하고 철수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흩어진 병력은 그들대로, 아직 건재한 부대는 그들대로 적과 싸워가며 후퇴해야 했습니다.

중앙에 있던 10연대는 120사단의 공격을 당합니다. 이들도 병력을 나눠 후방을 포위했고, 연대 전체가 붕괴됐죠. 무사히 빠져나간 건 미군 전차의 엄호를 받은 20포병대뿐이었습니다. 모두 뿔뿔히 흩어졌고, 이 과정에서 10연대장 권태순 대령은 물론 연대 전 참모가 전사합니다.

좌측의 16연대는 적 116, 117사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여기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나마 이들은 붕괴되지 않고 지연전을 펼치며 후퇴, 사단 전체의 철수에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대지휘소가 공격당하면서 부연대장이 전사하고 지휘체계가 붕괴돼 버렸죠.

이렇게 전 전선이 붕괴되는 와중에 중공군은 횡성의 사단지휘소까지 도달합니다. 다행히 사령부 요원들이 이를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중공군의 진격이 얼맘나 빨랐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바로 이 무렵 알몬드의 후퇴명령이 내려옵니다. 최영희 사단장이 얼마나 분통을 터뜨렸을지는 짐작 가능하죠.

그나마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8사단과 미군 지원부대를 맞아 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대대였죠. 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죠. 하지만 이들도 아군인 척 하고 다가온 적에 의해 대대장이 전사합니다.

악몽 같은 밤이 끝났을 때, 8사단은 소멸돼 있었습니다. 사단장은 09시에 아예 철수명령서를 항공기로 공중 투하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응할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었습니다.

2월 15일까지 8사단의 후퇴가 완료됩니다. 그 결과는... 참혹했죠.

이 전투에서 돌아온 것은 장교 263명과 사병 3천여명, 이 중 절반 이상이 사단 근무요원이었습니다. 10연대는 연대장을 포함한 전 참모가 전사 혹은 실종됐고, 16연대는 부연대장이 전사합니다. 대대장 중 7명이 돌아오지 못 했고 중대장은 30명을 잃었죠. 그리고... 사병 중 7142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됩니다.

패했다, 전멸했다는 건 많았지만 이 정도의 피해를 입은 적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었죠. 이 모든 것은 단 하루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횡성 전투를 패전을 넘어 '대재앙'으로 설명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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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손실은 한국군 제8사단이 지나치게 서둘러 철수하는 바람에 생겨났다. 제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한차례 받더니만 완전 붕괴되어 미 제2사단의 측면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한국군의 엄청난 대패에는 이들이 중공군들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중공군이 한국군 진지까지 숨을 죽이고 접근해 돌진한다면 대다수 한국군들은 겁을 집어먹고 걸음아 날 살려달라며 달음박질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리지웨이

리지웨이는 횡성 참패의 원인을 국군의 약함에서 찾습니다. 단지 약한 수준이 아니라 중공군에 "경외심"을 가졌다고 할 정도였죠. 1차 공세로 6사단이 무너질 때 미군이 한국인이 중국인 자체에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 것과 같은 얘기죠.

실제 전투 자체에서 국군이 할 말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밤 동안에 모든 방어선이 돌파됐으니까요. 제대로 싸운 부대도, 철수라도 제대로 한 부대도 없었습니다. 정면의 강력한 공격으로 전멸한 부대도 얼마 없었습니다. 모두 후방이 막히면서 자멸했고, 후퇴 과정에서 조각조각나 무너진 거였죠.

이 때 국군에 특히 부족했던 것은 훈련이었습니다. 일단 사병의 훈련도도 중요했죠. 어떤 일이 있어도 명령에 따라야 되고 지킬 때는 지키고, 후퇴할 때도 잘 후퇴하게 만드는 것이요.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간부였습니다. 그나마 경험 있던 (친일파 출신 -_-a) 이들은 그 동안의 전투 동안 급격히 줄었고, 이를 위해 몇 주간의 단기 코스로 하급 장교를 양성해야 했습니다. 공격할 때는 용맹하게 밀고 갔을지 몰라도, 유사시 부대를 챙기기에는 부족했죠. 군대가 얼마나 잘 훈련됐는가를 따질 수 있는 건 이 때거든요. 방법은 없었습니다. 시간과 투자가 해결해 줄 뿐이죠.

그 외에... 생각해볼 게 참 많습니다.

일단 국군은 북한군과 맞설 때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공격 방식이야 비슷했지만, 북한군은 잘 해야 두 배, 안 될 경우 국군보다 수가 적었죠. 다부동 전투도 세 배 정도였구요. 하지만 중공군 개입 후 그 수는 최소 예닐곱 배에서 최대 열 배가 넘게 됩니다. 갑자기 난이도가 너무 올라간 거였죠.

하지만 UN군이 모두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고, 국군도 그런 환경을 이겨내야 됐던 때였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나라였으니까요. 당장 지평리 전투만 해도 열 배의 적을 상대해야 했죠.

이에 대한 반론으로 그렇게 보기에도 중공군이 너무 준비를 잘 했고, 이 때의 8사단은 다른 아군들에 비해 너무 불리했다는 점일 겁니다. 지평리의 경우 애초에 점령 후 방어였지만 8사단은 알몬드에 의해 계속 진격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고,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 포병, 공군의 지원을 받지도 못 한 상태였죠. 중공군의 준비로 따지면 또 얘기가 달라지는 게 이후 중공군은 5사단을 공격했지만 3사단이 있는 걸 몰랐고, 막힙니다. 8사단이 너무 돌출되지 않았고 중공군이 준비를 못 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지는 거죠. 위에서 얘기한 8사단의 피해는 이제까지의 공세와는 다릅니다. 단지 중공군이 무서워서 도망간 게 아니라 중공군이 완벽하게 포위해 포위망 안의 아군을 거의 다 죽이거나 잡은 거죠.

뭐 그렇다고 UN군이 이런 상황에서 아예 벗어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죠. -_-; 2차 공세에서 미 2사단과 해병대가 이런 꼴을 당했지만 첫 날에 붕괴되진 않았거든요.

단 하루도 버티지 못 했던 횡성 전투, 참 생각할 부분이 많습니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죠. 중공군이 그만큼 잘 했고, 8사단이 그만큼 못 했고, 알몬드의 압박도 8사단을 최악으로 몰 정도로 심했다는 거요. 중요한 건 어떤 걸 더 강조하느냐의 문제인데... 참 어렵네요. 애초에 중공군이 최강의 전력을 최약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국군 한 개 사단에 쏟아부은 것이었으니...

아무튼, 중공군의 4차 공세는 아군의 대패로 시작됩니다. 이제 전과확대가 얼마나 될 것인가가 관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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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09시, 8사단을 휩쓴 중공군 197사단은 국군 5사단을 향합니다. 북한군 다섯개 사단이 동쪽에서 이를 협공할 예정이었죠. 헌데 이들은 뜻밖의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국군 3사단이었죠. 중공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개 연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지만 3사단은 지연전을 벌이며 철수, 중공군을 막아냈죠. 단숨에 횡성 후방으로 가려던 계획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한편 5, 7, 9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에 부닥치게 됩니다. 특히 5사단이 심했죠.

중공군을 막아낸 3사단과 북한군과 싸우던 5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고, 제천이 위험에 처하게 됐죠. 이어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5사단이 다시 뚫리면서 거대한 공백지대가 생기게 됩니다. 급히 동쪽의 7, 9 사단도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구요.

북한군은 평창까지 점령했고, 영월로의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가 17일, 중부전선의 마지막 고비였습니다. 하지만 3, 5사단이 겨우 자리를 지켜내고, 미 7사단 31연대가 투입되면서 북한군은 더 이상의 진군을 못 합니다. 18일 저녁으로 4차 공세는 완전히 끝이 났죠.

아군에게 정말 다행이었던 점은 중공군이 더 이상 밀고 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알몬드는 급히 원주의 방어를 강화하며 중공군을 기다렸지만 14일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죠. 알몬드를 비롯한 미 10군단의 머리는 또 아파집니다.

이 때 중공군이 향했던 곳은 지평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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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리는 서부와 중부전선이 이어지는 곳으로 당시 리지웨이가 가장 관심을 가지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38선으로 재진격하기 위해서 이 곳을 장악하는 게 중요했죠. 라운드업 작전 때 알몬드는 이 곳에 미 23연대를 투입합니다.

문제는 중공군의 4차 공세 때 이 곳 역시 휘말렸다는 것이죠. 팽덕회는 이 지역을 맡은 42군과 39군 예하 3개 사단을 빼 사면을 포위하게 합니다. 그리고 8사단이 무너지면서 최소 2개 사단을 여기에 투입, 지평리를 점령하고 전과확대를 노리죠. 가장 취약한 곳은 언제나 각 부대간의 경계, 전투지경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평리를 점령하고 남하할 경우, 서부전선과 동부전선간의 전투지경선에 큰 구멍을 낼 수 있었죠.

동쪽의 8사단이 무너지면서 10군단은 급히 원주 방면으로 후퇴합니다. 서쪽의 9군단은 산악지대에서 적의 방어를 뚫지 못 했죠. 이렇게 지평리는 고립됩니다.

"적이 이번 공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지평리 점령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아군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지평리를 확보해야 한다." - 리지웨이

2월 11일, 포위된 것을 알게 된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철수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이것을 거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평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죠.


"썅 -_-"
.. 이 아닌가

당시 23연대는 프랑스대대와 전차 1개 중대, 포병 1개 포대를 배속받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대대의 경우 역시 병력이 부족해 국군에서 100명을 지원받은 상태였죠. 총 병력은 약 5천, 이들로 5개 사단에 이르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야 했습니다.

프리먼은 우선 방어 전면을 축소하기로 결정합니다. 많은 반대가 따랐죠. 고지를 포기한다는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낮은 곳보다 높은 곳을 방어하기가 쉽습니다. 프리먼은 이 곳을 포기하고 위에서 내려오는 적을 아래에서 상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죠.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여기에 찬성한 것이 프랑스대대의 몽클라르 중령이었습니다. 본명은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자유 프랑스군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였던 이였습니다. 이 때 그가 자청한 것이 바로 랄프 몽클라르, 늑대의 충고였죠. 2차대전이 끝난 후 중장으로 진급했지만, 한국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스스로의 계급을 중령으로 깎습니다. 프랑스군의 규모가 대대 수준이었기 때문이었죠. 나치 독일에 점령된 후 이제 막 복구가 시작된 프랑스가 동원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습니다.


그가 이끈 프랑스대대는 전원이 지원자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그 역시 지원자로, 대대장으로 이들을 이끌었죠. 이런 그를 존중해 UN군도 중령이 아닌 중장으로 대우해 줍니다. 전력이야 미 23연대의 1/4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온 그의 발언권을 무시할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 이후 이들은 베트남 전쟁에 투입, 디엔비에푸 전투에서 전멸당합니다 -_-a


이렇게 미 23연대는 지름 1.6km로 진지를 축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둘레는 6km에 이르렀죠. 중공군의 사면 전체를 포위해 공격해 옵니다. 프리먼은 이에 맞서 본부에 1개 중대, 각 대대에 1개 소대만을 예비대로 돌리고 남은 모든 병력을 전방에 배치합니다.

중공군의 총공세는 13일 17:30, 밤이 되면서 사방에 횃불이 켜집니다. 눈으로 니들은 완벽히 포위됐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죠. 꽹가리 소리 역시 사방에서 울려퍼집니다. UN군의 귀를 괴롭힘과 동시에 역시 사방에서 포위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몽클라르는 이에 대해 사이렌을 미친 듯이 울리며 맞섭니다. 소리와 소리의 대결이었습니다. 니들이 아무리 포위해봤자 우리는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죠.

이와 함께 개시된 중공군의 공격, 프리먼은 화력을 최대한 집중해서 맞섭니다. 이에 맞선 중곤군의 포격 역시 계속됩니다. 연대본부에 3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프리먼이 다리에 부상을 당하고 군수참모가 전사했죠. 이 소식을 알게 된 알몬드는 작전참모였던 칠레스 대령을 지평리로 보내 지휘하게 합니다. 하지만...


"내가 병사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러니 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도 나의 임무다."

프리먼은 후송을 거부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거였죠. 설령 신임 연대장이 오더라도 최소 24시간은 남겠다고 합니다.

악몽 같았던 13일 밤, 23연대는 100여명에 달하는 손실을 입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방어선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다음날에는 강풍이 불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부상병의 후송이 어렵게 됐습니다. 하지만 공군의 활약은 계속돼 세 차례에 걸쳐 중공군을 공격할 수 있었죠. 그 틈을 타 수송기 24기가 보급품을 투하합니다. 이것으로 좀 더 버틸 수 있게 됐죠.

야간 공격으로 전환한 중공군은 특히 2대대와 프랑스대대의 간격으로 공격합니다. 2대대의 G중대가 무너졌고, 적은 그 사이로 쇄도해 왔죠. 프리먼은 급히 예비대를 투입했지만 간격을 막는데는 실패, 후방에 진지를 점령해서 막게 합니다.

그 동안 프랑스대대는 포위돼 가는 가운데서 백병전을 시도합니다. 착검 돌격이었죠.

  
"그까이거 보병 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프랑스대대는 적의 3차 공세 때 이미 착검 돌격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이 때 1개 소대 25명으로 북한군 1개 대대를 물리쳤죠. 리지웨이는 물론 UN군이 이를 대단하게 여기자 몽클라르 중령은 위와 같은 대수롭지 않은 말로 대답합니다. 이에 감명 받은 리지웨이는 전 UN군에 이런 말을 돌렸죠.

"총검은 아마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특히 총검을 무시하던 미군(2차대전 때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때문에 착검 돌격을 더 무시하게 됐죠)에게 말한 것이었죠.

이 때 프리먼은 중공군의 "반자이 돌격"을 보고받았다고 합니다. 뚫린 간격으로 몰려드는 중공군을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에 비유한 것이죠. 그리고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고 빨간 수건을 머리에 동여메고 돌격합니다. 밤새도록 이어진 백병전 끝에 남은 건 프랑스군이었죠.

최악의 위기가 지난 후, 마침내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좌우에서 아군이 구원오고 있는 것이었죠.

그 선봉은 미 9군단 소속 5기병연대, 연대장의 이름을 딴 크롬베츠 특수임무부대였습니다. 이들은 10군단과의 경계인 여주까지 북진, 지평리의 23연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15일 07시부터 연결작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그 곳을 장악한 중공군에 막혀 큰 진전을 보지 못 합니다. 이에 연대장은 적중돌파를 감행, 23대의 전차에 160명의 보병을 탑승시켜 돌격해 옵니다. 이 과정에서 전차 한 대가 완파돼 중대장이 전사하기도 했고, 중공군의 육탄공격으로 보병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낙오병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계속 진격을 시도, 17:15에 미 23연대와의 연결에 성공합니다. 전투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추가로 영연방 27여단, 국군 6사단, 미 9연대가 중공군의 방어를 뚫고 지평리를 포위한 적을 역포위하려 했고, 중공군은 더 이상의 전의를 잃고 철수했죠.

이렇게 지평리 전투는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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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출동하고 승리하였으나 승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평리가 해결되지 않았다. 설사 적을 해결했다 하더라도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역량 부족으로 적 종심이 커졌다."

팽덕회는 지평리 전투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 휴식과 정비를 하려다 전투로 전환했기 때문에 준비가 불충분했다.
- 횡성 전투의 신속한 승리로 경적 사상(적을 경시)이 생겨나 너무 성급하게 전투에 임했다.
- 정찰의 부족과 판단 착오로 지평리의 적을 충분히 간파하지 못 했다.
- 병력이 분산되고 건제가 혼란했다.

지평리에서 중공군은 5개나 되는 사단을 투입했지만, 이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못 했습니다. 애초에 중공군의 문제였던 정보 부족이 컸죠. 각 부대는 서로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따로 공격했고, 어느 한 쪽이 돌파에 성공해도 타부대와 연결하지 못 했습니다. 제 때 도착하지 못 했고 따로 논 부대가 많아서 지평리를 직접 공격한 부대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죠.

비단 지평리만의 문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중부전선 전체가 그랬죠. 횡성에서 8사단을 격파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어 3, 5사단을 공격하고 남쪽의 미군을 공격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죠. 그에 비한다면 미군은 기존에 리지웨이가 세웠던 계획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습니다. 적의 강력한 공격을 맞을 경우 축차 후퇴하면서 화력으로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죠. 8사단의 조기붕괴로 장비의 피해가 심했지만 병력은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고, 이런 후퇴 속도를 중공군은 따라잡지 못 합니다. 국군 역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이에 따라 후퇴, 그래도 병력을 보존하면서 북한군을 막아낼 수 있었죠.

그럼에도 지평리의 선전은 컸습니다. 그냥 물러나는 게 아니라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무찌른 것이었으니까요. 특히 부상당했으면서도 후송을 거부했던 프리먼 대령과 중장이었으면서 최전방에서 적과 맞서 싸웠던 몽클라르 중령의 수훈이 컸죠.

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할버스탬은 "지평리의 승리가 없었다면 미군은 한국을 포기했을 것이다"고 평가합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좀 오버긴 하지만, 이 전투의 중요성이 그 정도였다 걸 말 해 주죠.

이렇게 지평리는 지켜졌고, 아군은 새로운 반격을 시도할 수 있게 됩니다. 목표는 서울, 그리고 38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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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적공격을 저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선지역의 중공군과 북한군 부대사정은 극히 어려웠다. 많은 손실로 사단 인원수가 줄었고, 부대들은 전투물자, 보급품, 양식, 탄약 등이 필요하였으며, 특히, 의무지원과 휴식이 필요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선에서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차후 방어선을 확보할 가능성마저 어렵게 했다."  -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어려운 상황에서 시도했던 4차 공세는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8사단과 미군 지원부대를 비롯해 아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이 때의 전과를 만이천명까지 집계합니다. 그리고 이는 꽤나 신빙성 있구요.

라운드업 작전으로 최대 60km까지 전진했던 중부전선에서 아군은 다시 30km가량을 후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덕분에 중공군의 약점을 제대로 알게 되었죠.

썬더볼트와 라운드업 작전 기간 동안, 리지웨이는 지금까지의 공세를 보며 고민에 빠집니다.

10월 25일 시작된 중공군의 1차 공세는 11월 1일 끝납니다. 이 때 중공군은 더 이상의 전과확대 없이 물러났죠. 국군 7사단이 맡은 비호산 전투의 경우 6일까지 진행되긴 했습니다만. 이 때 중공군의 공세 기간은 약 일주일이었습니다.

11월 25일에 시작된 중공군의 2차 공세는 12월 2일에 끝납니다. 그 이후에는 계속 공격하더라도 공격력이 극히 약화돼 있었죠. 역시 일주일 정도였습니다.

12월 31일에 시작된 3차 공세 역시 1월 7일에 끝납니다. 중부전선에서의 공격이 계속됐지만 이건 북한군이었죠.

그리고 4차 공세, 2월 11일에 시작된 공세의 유지기간은 더 짧습니다. 중공군은 16일에 공격을 접었고 북한군까지 따져도 공세가 끝난 건 18일이었습니다.

중공군이 공세를 유지한 기간은 일주일, 그리고 각 공세 간에는 한 달 가량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리지웨이는 이를 통해 확실한 결정을 내립니다.

중공군은 보급 능력이 부족하며, 처음 받은 보급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전선의 부대가 그 공격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일주일, 2선 부대가 참가하더라도 보름 정도였습니다. 반면 다시 보급을 하고 공세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한 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죠.

따라서 적이 제대로 준비할 수 없게, 끊임없는 공격을 가하며 적이 준비를 마치고 강하게 공격해 오면 큰 출혈을 강요하면서 후방으로 후퇴, 적의 힘이 떨어지면 다시 반격한다는 지침이 만들어집니다. 중공군을 상대하는 메뉴얼이 완성된 것이죠.

중공군의 4차 공세는 끝났습니다. 이제 다음 공세 준비를 하기까지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만이 남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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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ordfish
12/11/08 16:41
수정 아이콘
역시 알랑비탈의 고향 프랑스네요. 착검 돌격.
설탕가루인형형
12/11/08 17:44
수정 아이콘
몽클라르 중령..아니 중장님 정말 멋지십니다...-_- b
나루호도 류이
12/11/08 18:07
수정 아이콘
저는 저 착검 돌격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참 신기하더군요. '어떻게 저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어서 말이죠. 혹시 그에 관한 자료를 알 수 있을까요?
Je ne sais quoi
12/11/08 19:14
수정 아이콘
와 굉장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Darwin4078
12/11/08 19:51
수정 아이콘
프랑스대대가 체고시다.
2막2장
12/11/08 21:56
수정 아이콘
음.. 순간 횡성..보고 한우가 생각났네요..
길고 정성스런 글에 저질 댓글이라 죄송합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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