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이렇게 막 강조하는데...
칭기즈칸 이래로 욱일승천하던 몽골 제국은, 몽케 간의 사후 위기를 맞이합니다. 비어있는 제국의 주인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카의 다툼이 펼쳐져 내란이 일어났고, 여기서 승자는 쿠빌라이 칸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몽골과의 전쟁을 이어가던 상황 속에서 강화를 맺으러 가던, 당시 태자 신분이었던 고려의 원종은 여기서 승자가 되는 쿠빌라이의 편을 드는 신묘한 결단을 내렸고, 이에 쿠빌라이는 "당태종도 굴복 못 시킨 나라가 내 편이 되다니!" 하고 크게 기뻐하여, 30여년에 걸쳐 힘겹게 싸우던 고려는 원종의 탁월한 선택 덕분에 극적으로 아주 좋은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들.
이대로라면 원종은 그야말로 500년 고려 역사상 한손에 꼽힐 탁월한 선택을 내린 비범한 지략가라고 할 수 있고, 고려는 하마터면 꽝을 뽑을 수 있는 OX 퀴즈에서 극적으로 O를 꼽은,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오백년래 제일대사건'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놓고도 이것저것 바빠서 읽어보지 않았다가 우연찮게 다시 꺼내서 읽어본 책에서, 이 사건에 대해 좀 다른 의견이 있더군요.
한번 보자면...(길어서 보기 성가시다 하시면 아래 요약을 해놓았습니다)
"음....."
....몽골의 기병들은 30년간 한반도 거의 전역을 유린하였다. 마침내 1259년 정변에 의해 대몽 강경론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론은 대세를 이루게 되어, 고종은 태자 '전'(倎 원종) 을 몽골로 보내어 투항의 뜻을 밝히기로 결정하였다. 40여 명에 이르는 태자 일행이 강화를 떠난 것은 1259년 5월 14일이었으니, 뭉케 카안이 사망하기 불과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
6월 9일 태자 일행은 동경(東京)에 당도하였고, 당시 뭉케가 남벌군을 이끌며 주둔하고 있던 사천의 조어산으로 가기 위해 연경에서 경조를 거쳐 동관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일행이 경조를 지나 육반산에 이르렀을 때 뭉케의 사망을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왕이] 육반산에 도착하니 헌종(憲宗 : 뭉케) 황제는 [이미] 붕어했고, 아릭 부케는 군대를 삭방(朔方)에 배치하고 있어, 제후들은 미심쩍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당시 황제 쿠빌라이는 강남에서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윽고 왕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험로를 거쳐 양초지교(梁楚之郊)에 이르니, 마침 황제는 양양에서 군대를 돌려 북상하고 있었다.
뭉케의 사망이 7월 30일이었음을 상기하면, 태자 일행이 육반산에 도착한 것은 빨라도 8월~9월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이미 뭉케가 직접 지휘하던 우익군에 속하던 제왕과 병력 가운데 상당수가 카안의 영구(柩)를 모시고 북상한 뒤였고, 장차 벌어질 계승분쟁의 귀추를 예상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앞에서 몽골의 핵심 지배층조차도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두 사람에 대한 지지가 엇갈리고 상당수는 분명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채 관망상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몽골 지배집단 내 부의 권력다툼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를 갖지 못했을 고려의 태자 일행이 쿠빌라이와 회견한 것은 "천명과 민심의 거취를 능히 깨달아,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갔다." 고 한 『고려사』찬자(撰者)의 사평처럼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당시의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근거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까. 일단 태자 일행의 행정(行程)을 복원해 보도록 하자.
태자 전이 북상하던 쿠빌라이와 조우한 양초지교라는 지점에 대해서 후일 이제현은 변(汴) 혹은 변량지지(汴梁之地)라고 했고, 『고려사』 의 다른 곳에서도 변량지허(汴梁之墟)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황하 남안의 개봉 부근이었음이 분명하다. 쿠빌라이가 익주에서 철군하기 시작한 것이 12월 16일이고 연경에 도착한 것이 1260년 1월 4일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변량회합은 12월 말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연경 근교에서 겨울을 보낸 뒤 1260년 봄 개평부로 왔고, 태자는 거기서 고종의 부음을 접하고 사흘 동안 복상 하다가 쿠빌라이의 명령에 따라서 귀국길에 올랐다. 태자가 개경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4월 26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볼 때 태자 일행은 육반산 도착 이후 적어도 2~3개월을 섬서와 하남 부근에서 체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동안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적어도 뭉케 사망 이후의 정세를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육반산에는 쿤두카이를 비롯하여 아릭 부케 지지파가 대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뭉케의 우익군에 속해 있던 한군은 속속 북중국으로 귀환하고 있었고, 만약 타재 일행이 정세파악을 위해서 탐문을 했다면 그 대상은 몽골인들보다는 한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태자 일행이 쿠빌라이 쪽으로 경도되어 있던 한인 지도층의 견해를 참작했거나 혹은 그들의 적극적인 회유에 이끌린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양측의 우열을 판단하기 힘든 안개정국 속에서 쿠빌라이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쳔명하는 것이 고려왕조의 운명을 건 위험한 도박이라는 점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며, 어차피 지난 30년간 국왕의 친조와 섬에서 나와 본래의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거부해 온 터에 신임 대칸이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구태여 서두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 일행과 쿠빌라이의 변량회합이 쿠빌라이 지지를 표명하기 위한 고려 측의 정치적인 결단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의 귀국 경로가 악주에서 쿠빌라이의 북상로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도중에 우연히 조우했을 수도 있고, 사태의 추이를 살피기 위해 변량 부근에 머물러 있다가 북상하던 쿠빌라이 일행과 마주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이윽고 왕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관문을 거쳐 양초지교에 이르니, 황제가 마침 양양에서 회군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라는 표현도 우연히 조우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또한 양인의 회견장면을 묘사한 기사에는 태자가 예복을 갖추고 있고 "폐백을 바쳤다." 는 내용만 있을 뿐, 태자가 고려를 떠날 때 지니고 온 표문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도 '신속' 을 작정하고 만난 것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구나 태자 일행은 쿠빌라이와 함께 개평부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5월 5일에 개최된 쿠릴타이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쿠빌라이를 차기 대칸으로 인정하고 신속하기로 했다면 개평 쿠릴타이에는 참석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당시 몽골인의 정치적 관념으로 볼 때 쿠릴타이 참석은 곧 그 당사자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태자 일행이 쿠빌라이를 만나 예를 갖춘 것은 그가 차기 대칸임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단지 황제에 대한 적절한 예우를 갖춘 것으로 보이며, 이런 맥락에서 볼 떄 강화 선무사 조량필이 태자의 환국 직전에 한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발언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작년에 태자 일행이 내조 했는데 마침 황제가 서방원정 중에 있었기 때문에 [태자는] 2년을 머물렀지만(실제로는 1년도 채 안되지만 1259년~60년의 해를 넘겼기에 2년을 넘겼다고 표현) [그에 대한] 대우가 소홀하여 그 마음을 회유하고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가 일단 귀국하게 되면 다시 오지 않으려 할 것이니, 마땅히 그 숙소와 음식을 후하게 하여 번왕의 예로써 그를 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 부친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전을 왕으로 세워 환국케 한다면, 그는 은덕에 감격하여 신하로서의 직분을 다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병졸 일인의 힘도 들이지 않고 일국을 얻는 셈입니다."
이 인용문은 태자 전의 마음을 '회유하지 못했다' 라든지, '일단 귀국하면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는 등 그의 향후 태도에 쿠빌라이 측이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며, 고려 측의 신속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쿠빌라이가 부친 사망을 이유로 개평 쿠릴타이에도 참석하지 않고 귀국하는 태자를 호송한다는 명분하에, 수리타이를 다루가치로 삼아 몽골 병사를 대동시켜 가도록 한 것도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고려 측을 압박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도 베제할 수 없다. 이어 그는 형절(荊節) 등 25명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서한을 전달했는데, 이 서한에서 그는 현재까지 몽골에 신복하지 않는 나라는 '천하에서 오로지 고려와 남송뿐' 이라고 지적하면서, 전이 태자의 몸으로 봉폐난관(奉弊納款)하고 속신귀조(束身歸趙) 했는데 부친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귀국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한 것이며, 만일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을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고려국왕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하겠다는 등 자못 강경한 어조로 고려 측에 압박을 가했다.
그는 곧이어 사신 키타타이를 보내어 또 다른 조서를 전달하고, 고려의 신속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회유책을 실시했다. 즉 그것은 ① 고려 조정이 육지로 돌아와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자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② 고려 경내에 있는 몽골 병사를 철수시켜 달라는 요청에 귀환명령을 내리며, ③ 1259년 2월 이후 포로가 되었거나 도주한 백성을 귀환시켜 달라는 요구를 수락하고, ④ 고려 국내에서 죄를 범한 자들을 사면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구광에 즉위한 원종으로서도 쿠빌라이의 이러한 신속 요구에 완강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미 고려는 30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상은 극에 달했고, 강화에서의 항전도 더 이상 전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김준 등의 무신들이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국왕의 지위는 내적으로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입근을 귀부의 표현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쿠빌라이 측의 정책에 달리 대안도 없거니와, 오히려 최상의 방책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몽골과의 화평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동방 삼왕가와 오부족군 등 고려에 인접한 몽골의 제세력이 쿠빌라이를 지지했던 상황도 고려 측의 결단을 촉진한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원종은 영안공 희를 사신으로 보내 쿠빌라이의 즉위를 축하하는 동시에 정식으로 고려의 신속 의사를 표시하게 된 것이다. 원종은 이 글에서 남송과 고려만이 복속하지 않고 있다는 쿠빌라이의 지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송이 불복한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러나 저희] 작은 나라를 돌이켜 보면 항상 대국을 섬기어 왔는데, 어찌 지금 같은 통일의 시기에 두 가지 마음을 품겠습니까? 한 해도 예빙을 거른 적이 없고 시키시는 일에 모두 복종하였습니다. 하물며 신은 몸소 입근하여 넘치는 은혜를 입었거늘, 어찌 저를 [송에] 비유하시는지, 저는 지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게 허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일 [폐하의] 권위를 두려워하여 제가 주저했던 것을 아마 잘못이라고 지적하신 듯합니다. 그러나 만약 상조에서 그 실정을 헤아리신다면, 그것 역시 가엽게 보아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쿠빌라이가 형절을 통해 보내온 서한과 원종의 답신의 내용에서 우리는 원종이 태자의 신분으로 연경과 개평에 머물 때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신속에 관한 분명힌 입장을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친 고종의 사망을 이유로 개평 쿠릴타이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귀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릭 부케와의 일전을 앞둔 쿠빌라이는 고려 측의 이 같은 미온적인 태도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자의 입근을 납관과 내부의 표명이라고 일방적으로 간주하고 태자를 호위하여 귀국시키고 왕위에 앉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정식으로 쿠빌라이에게 신속을 표명한 것은 태자 전의 입근과 회견이라기보다는 그가 귀환하여 원종에 즉위한 뒤 쿠빌라이의 개평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영안공을 필두로 하는 사절단을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원종은 국내외적인 여건으로 보아 신속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신속의 조건으로 여섯 가지 사항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다. 쿠빌라이는 그 요구를 받아들이고 귀환하는 영안공을 통해 3통의 조서를 전달해 주었는데, 그 여섯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의관은 본국지속에 따를 것이며 상하가 모두 개역치 아니할 것
② 행인은 조정에서 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신은 일체 금지할 것
③ 육지의 수도로 돌아오는 일은 역량에 맞추어 진행시킬 것
④ 압록강 유역에 주둔하는 몽골 병사는 가을 내로 철수 시킬 것
⑤ 다루가지 일행은 서환(西還)토록 할것
⑥ 몽골 측에 사신으로 온 10여명에 대해서는 그 소재를 철저히 조사할 것
여기서 제시된 여섯 가지 항목들을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양보' 를 얻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와 ⑤ 즉 몽골 군대와 다루가치의 철수 및 본국지속의 유지는 고려의 내정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고, ③은 쿠빌라이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전에 고려 조정에서도 결정한 사항인데 돌아올 시기도 고려 측에 최대한 재량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 측의 요구는 당시 최대의 현안이 아릭 부케와의 대결이었고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동쪽 변경의 안정이 필요했던 쿠빌라이의 입장과 크게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측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불필요한 힘을 소모하는 것은 그에게도 현명한 방책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④와 ⑤는 아릭 부케와의 전쟁을 목전을 둔 상황에서 병력과 인명의 보강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으며, ① 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몽골이 다른 지역의 정복민들에게도 공히 시행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우대조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②의 항목에서 언급된 '조정' 은 물론 쿠빌라이의 조정을 지칭하는 것일텐데, 그 외의 사신들에 대한 지적은 쿠빌라이 이외에 다른 제왕들, 특히 만주 지방에 포진하고 있던 동방 울루스 측이 요구할지도 모르는 가중한 요구에 대한 고려 측의 우려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남송이나 아릭 부케 측이 고려와 접촉할 것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쿠빌라이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아릭 부케가 파견한 도르지는 1260년 초경까지도 내몽골과 북중국 방면에서 물자와 병력을 징발했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도 이에 대한 우려가 없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릭 부케와의 전쟁을 앞두고 이념적 - 현실적으로 매우 긴박한 처지에 있던 쿠빌라이와, 오랜 항전으로 국력은 피폐하고 왕권도 약화된 고려 왕실은 신속과 화의를 통해 최상의 타협책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신속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변랑지회' 를 통해서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라기보다는, 사태의 추이를 살펴보며 향배를 결정하려고 했던 원종과 아릭부케와의 대결을 목전에 둔 쿠빌라이 두 사람이 모두 거의 동시에 즉위한 직후에 타결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6,000리를 두루 지나서 [쿠빌라이를] 영배 했다" 라든지, 혹은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갔다" 등의 평가는 '여몽화의' 가 고려 측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결단에 의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역사적 의도를 돋보이게 하고 몽골 측에 대한 고려의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또한 개평에서의 독자적인 쿠릴타이를 열었던 쿠빌라이도 고려의 자발적인 내부를 강조하는 쪽이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데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태자 일행을 만난 직후에 "고려는 만 리 밖에 있는 나라로써, 당태종이 친정을 했어도 복속 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세자가 나에게 귀부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라고 한 것도 개평에서 즉위하기도 전에 고려가 내부 하러 왔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볼 것이 아니라, 쿠빌라이가 아릭 부케와의 대결을 앞두고 자신의 정통성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선전으로 이해하는 쪽이 타당할 것이다."
『몽골제국과 고려 - 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김호동
...
"띠용?"
요약하자면,
1. 기존에 이야기하던 대로는 뭉케가 죽자 기회를 포착한 원종이 갑자기 신내림 받은 사람마냥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중 아릭 부케 쪽은 만사제쳐 놓고 쿠빌라이를 만나기 위해 6,000리를 냅다 달려서 만나러 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뭉케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원종 일행은 몇달간 어물쩡 거리면서 굳이 (위험천만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2. 몇달간 가만히 있다가 만나긴 만났는데... 그런데 쿠빌라이가 남쪽에서 올라오는 경로와, 원종 일행이 되돌아가던 길의 루트가 비슷해서 이조차도 우연히 만났을 가능성이 있음.
3. 만약 이 만남에서 원종이 확실하게 쿠빌라이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직후에 있는 쿠빌라이의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한다. 그래야 지지 표시가 확실해 되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원종은 쿠릴타이에 참석도 안했고, 항복 의사를 밝힌 표문을 제대로 바치지도 않았다. 이후 아버지인 고종이 사망한 탓에 그대로 쿠빌라이 옆에서 빠져 나온다.
4. 원종이 돌아가기 직전, 쿠빌라이 쪽의 관계자는 "태자 일행을 회유하지 못했다. 이렇게 서운하게 해서 돌아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다. 부친이 죽었다고 하니, 이번에 환국 시키면서 우리쪽에서 태자를 왕으로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정통성을 부여하자. 그러면 저쪽의 마음을 살 수 있을거다." 라면서, 원종 일행을 이 시점에서 회유하지 못했다고 발언한다.
5. 쿠빌라이는 원종 일행을 돌아보내게 하면서 몽골 병사를 붙여 자못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6. 직후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 "이 세상에서 아직도 우리 몽골에게 숙이지 않고 뻗대고 있는 나라는 남송과 고려 뿐" 이라며, 아직 고려가 몽골에 신복하지 않았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원종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신복 시키기 위한) 회유책을 실시한다.
7. 즉위하고 쿠빌라이 쪽의 사신을 만난 원종은 이후 자기쪽에서 사람과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 편지에서 "신복하지 않았다고 꾸짖으시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시겠다. 아마 저번에 만났을때 님의 위엄 때문에 주저하면서 제대로 말을 못했던 탓인것 같다." 고 함. 즉, 이 말 대로라면 원종은 쿠빌라이와 만났을때 의사를 확실하게 표명한게 아니라 오히려 숨기면서 확답을 제대로 안했다는 말이 됨.
8. 이때 사람을 보내며 원종은 고려 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6가지 조건을 내걸고, 이에 쿠빌라이가 응함.
9. 그럼 쿠빌라이가 "당태종도 복속 못 시킨 나라가 나에게 알아서..." 이 소린 뭐냐? 고려가 자발적으로 알아서 쿠빌라이에게 왔다는 사실로 보기 보다는, 쿠빌라이 쪽에서 자기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일종의 언론 플레이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10. 쿠빌라이가 언론 플레이를 했듯, 고려측에서도 기왕지사 벌어진거 "태자가 6,000리를 달려가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버리고 일부러 먼 곳으로 달려가서..." 등등으로 이 결정에 있어 고려 측이 자발적으로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11. 한마디로, 원종이 즉위도 안한 쿠빌라이를 자발적으로 만나 아직 모두 즉위도 안한 두 사람이 극적인 협상을 얼굴 맞대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둘이 헤어지고 난 이후 서로 각각 즉위한 이후에 협상을 통해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 의견대로라면 원종은 평소에 알려졌던 것처럼 소위 '쇼부' 를 쳐서, "잘되면 대박이면 안되면 대망" 인 (고려라는 나라를 저당 잡힌)판돈 승부를 해서 일확천금을 얻어낸 '쇼부종' 이 아니라,
되려 뭉케가 사망하고 천하의 향방이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대결이 될때고 일단은 최대한 관망하면서 안전을 노리고,
이후에 쿠빌라이와 직접 만나게 됬을때도 쿠빌라이 측에서 "저 사람들 아직 회유 못 시켰는데 이대로 돌려보내면 큰일난다. 최대한 후하게 대우해주자." 는 말이 나올만치 여전히 흐물흐물 거리며 속내를 보이지 않고,
돌아가는 길에서도 쿠빌라이 측에서는 강압과 회유를 섞어서 여전히 설득을 하고, 이윽고 즉위하게 된 원종은, 사실상 달리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일이 돌아갈때 주체적인 상태는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최대한 '몸값' 이 불린 상태에서 다시 이쪽의 6가지 조건(이 조건도 고려에게는 필요하면서도, 당장 전쟁을 앞둔 쿠빌라이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아주 적절한)을 제시해 쿠발라이가 승낙케 하는,
기존 일화의 '쇼부맨' 이미지는 없지만 나름대로 견실한 정치가의 면모를 새로 보이지 않나 싶네요.
또 하나 인상깊은 것이 보통 이 원종의 쿠빌라이 지지로 인한 성과를 보통 다른 곳에서는 소위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고 하여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긴 해도 의관등의 습속을 유지해도 된다." 는 부분을 최대의 성과이자 아주 특별한 보상으로 언급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김호동 교수의 저서에서는 그냥 한 줄로 "그건 몽골이 다른곳에서도 하던거라 특별한 건 아니라서 그건 넘어가도 됨." 정도로 아주 대수롭잖게 언급하는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김호동 교수는 이 협상에서 최대의 성과는 고려의 영토 안과 국경 부근에 있던 병력을 물러나게 하는 일에 동의를 얻은 것으로, 이 조치를 원나라에게 얻어내서 고려가 내정에 있어 독립성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고 보던게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