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2011년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입니다!!!"
-2011년 코리안시리즈, 한명재 캐스터의 우승콜-
"여러분은 기적을 믿으십니까? 두산베어스가 만들어낸 이 기적이! 믿어 지십니까!!!!"
-2015년 코리안시리즈, 정우영 캐스터의 우승콜-
스연게도 아닌데 갑자기 뜬금없이 한명재 캐스터와 정우영 캐스터의 우승콜이 왜 나왔냐고요? 너무나도 기적같은 순간이고, 꿈꾸는 것 같고, 그래서 저 멘트들이 먼저 생각났거든요.
저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섯살 때, 하루아침에 갑자기 없어졌거든요. '엄마'라는 말 자체도 어색했고, 엄마의 존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머릿속에는 온갖 번뇌가 가득했습니다. 잊을만하면 하늘을 우러러보며 '도대체 엄마는 어딨는거지'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고요. 무려 26년, 26년간 저는 엄마 없는 '한부모 가족'이었고, 그걸 체념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엄마가 왜 나를 버리고 도망갔을까? 엄마는 나를 보고싶어하지 않을까? 엄마는 어디에 계신걸까? 살아있기는 한걸까? 온갖 궁금증들이 제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있지도 않은 엄마에게 초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은 알림장에다 '녹색어머니회 가입을 해주지 않으시겠어요?'라고 무례한(?) 질문을 했던 기억도 나고, 생계곤란으로 장학금을 신청하기 위해 발급받은 제적등본에서, 엄마가 나와 헤어지고도 6년이나 있다 아버지와 이혼한 걸 보고 분노한 기억도 납니다. 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였어요.
그런데 군복무를 하던 시절, 뜬금없이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업무상 찾아간 예비군 동대에서 대기하다가, (저는 울산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 부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냥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 길로 1층에 있는 민원실을 찾아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신분증 확인 후 바로 주민등록등본을 발급해주시더군요
'서울특별시 XX구 XX동 XXXX아파트 XXX동 XXXX호'
이렇게 쉽게 알게될 줄은 사실 몰랐습니다. 당황했지요. 바로 휴가를 신청하고 찾아가볼까 생각을 했지만, 바로 다음날 연평도 포격사건이 발발하는 바람에 한 달 넘게 출타가 통제되면서 자연스레 생각에서 묻어뒀습니다. 대신, 편지를 보내봤지만 답장이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해 2월에 그 동네까지 찾아갔지만, 근처 지하철 역에서 더 이상 찾아갈 용기가 없어서 못가고 되돌아왔지요.
낙담하고, 체념하면서 8년 동안 끙끙 앓으면서 살았습니다. 그와중에 공무원이 되었고, 또 그 안에서도 실패를 해봤고, 더이상 살기 싫다고 징징대면서도, 어느 새 7급으로 승진을 하면서 서른이 되었고, 서른이 되고 보니 다시 엄마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나이도 먹었고, 7급 승진도 했는데, 엄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하는 안일한 생각.
엄마 생각을 아예 지웠던 건 아닙니다. 동 주민센터 민원대 업무를 보면서 궁금해서 한번씩 엄마 등본을 직접 발급해보기도 했어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권한을 남용(?)해서 발급한 게 아니라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급받은 겁니다 크크크) 그 때마다 엄마는 혼자서 오롯이 계셨습니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어요. (아마 이름 옆에 '사망말소'라고 되어있었다면 저는 정말 미쳐버렸을겁니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편지를 써봤습니다. 8년 전에는 군사우편이라 일반우편으로 갔지만, 이번에는 빠른 등기로 보냈습니다. 동기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하니 '왜 그 때 등기로 안보냈냐'라고 하길래, 이번에는 등기로 보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엄마 주소지 인근에 있는 호텔을 숙소로 예약했고요. 엄마와 혹시나 연락이 되지 않을까봐, 무작정 찾아갈 요량으로 2박3일 일정을 비웠습니다. 편지 봉투에는 얼마전 지역언론에 게재된 제 이름의 칼럼과, 제 명함을 첨부해서 보냈습니다. 보낸 그 순간부터 인터넷 등기조회로 계속 새로고침을 반복, 반복, 또 반복... 첫 배달이 '폐문부재 : 다음날 재방문 예정'으로 떴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 또 아니구나' 낙담하고 있을 때, 그 다음날 문자가 옵니다.
"XX야, 엄마야~~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염치없고 자격이 없지만 그렇다고 이름만 말 하기에는...
어제 집을 잠깐 비운사이 집배원이 다녀가서 못받고 오늘 받았어. 난 아무때나 전화 받을 수 있으니까 전화해.
전화가 부담스러우면 문자로 하고. 기다릴게"
오찬 간담회 행사 때문에 식사장소에 있던 저는 핸드폰을 보면서 뭔가 모를 떨림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으로, 잠시후 통화를 했고, 수화기 너머 엄마는 통곡 아닌 통곡을 하며 그간 쌓였던 아픔과 미안함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 서울에서 우리는 26년만에 만났습니다. 만나는 순간,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고, 엄마는 또 눈물샘이 폭발하며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다섯살 꼬맹이는 서른 한 살의 후덕한 아저씨가 되었고, 30대 중반의 애기엄마는 환갑을 바라보는 쭈글쭈글한 동네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무상하게 흘러버렸습니다.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만날 수 있었는데...
이렇게 금방 만날 수 있는 걸, 26년을 돌고 돌아 이제서야 만났습니다.
슬픔과, 노여움과 온갖 잡감정이 가득했던
지루하고도 비루했던, 26년의 기다림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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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엄마 만나자마자 쓰려고 했던 글인데, 이제서야 올리네요. 어떻게든 행간 사이사이의 어색함(?)을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저는 졸필이라 그 간극을 메울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 좀 하고 싶어서 술 먹고 씁니다. (자랑은 자랑갤로 가야하나?)
이 만남 이후로도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저 2박3일 일정동안 외삼촌을 만났고, 바로 그 다음주에 엄마가 울산에 오시면서 울산에 살던 이모와 사촌형제들과도 상봉하게 되었고, 형수님들과 5촌조카 등 새로운 가족이 생긴 건 덤입니다. 여름휴가는 외갓집 식구들이 총집합한 가운데 제가 같이 참석해서 보내기도 했고요, 엄마와는 매일매일 통화하고 만날때마다 같은 이불 덮고 자면서 서로 앵기기도(?) 하고, 이모는 수시로 혼자 사는 저에게 반찬을 실어다주고 있어요. 이게 불과 한 달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꿈꾸던 순간이, 기적같은 일이 현실이 되는 걸 겪으면서 요즘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합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이제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남으려고 노력해요.
한 때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식의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싹 없어졌습니다. 우울증도 없어지고, 부정적인 생각도 없어지고, 등등등... 이 맛에 살면서 버티는건가 싶기도 합니다. 으하하하하하하
p.s : 현재 주민등록법상 등본 세대주를 기준으로 배우자, 직계혈족, 직계혈족의 배우자(사위, 며느리 등), 배우자의 직계혈족(장인, 장모, 시부모 등)은 당사자 동의없이 주민등록 등본이 발급 가능하며, 세대주가 누구인지와는 상관없이 대상자의 배우자나 직계혈족은 초본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규정을 활용하여 엄마와 26년 동안 연락을 못했지만, 등본을 계속 떼서 생사 및 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번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저처럼 헤어진 부모님 행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렇게 해보세요. (의외로 이걸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엄마도 이걸 몰라서 제 행방을 계속 못찾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