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연속 출장을 다녀오니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출장 전 준비부터 갔다와서 정리까지...
늦은만큼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계실까요?)께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
- - -
굳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는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어떤 순간을 꼽을 것이다.
혹자는 반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맞이하던 달콤한(혹은 쓰디쓴) 그 날을,
혹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던 어떤 순간을 꼽을테지.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미혼이며, 별빛과 같이 황홀한 순간을 맞이해 본적도 없었다.
때문에 아직도 가장 중요한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앞서 그려지는 기억은 녀석과 은호와 함께한 나날이 대부분이었다.
녀석이 급히, 저렴한 가격에 구한 다소 허접스러운 연습실에 모인 그 날에도 그러한 순간이 있었다.
"몇 가지 부탁할게 있어. 이것 좀 봐줄래?"
뉘엿뉘엿, 밤길따라 해 숨어가는 시간 쯤 연습실에 나타난 은호는 제 짐을 풀며
손글씨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우리에게 건넸다.
그것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자, 서명란이 없는 계약서였다.
「자신이 부를 노래에 대해 일절 간섭이 없을 것.
약속 시간을 철저히 준수할 것.
충분한 연습량을 가질 것.
자신과 오디션에 나가는 것은 학교에 비밀로 할 것... 등등」
가지런하고 반듯한, 정갈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글씨체로 많은 요구사항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내용보다는 담백한 글씨체가 먼저 눈에 띄어,
못하는 것 투성이에 글씨조차 악필인 나로서는 약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마저 잘 쓰는 건 순 반칙 아닌가?
어쨌거나 은호가 적어 건넨 요구 사항은 크게 무리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지막 항목을 제외하고는.
「내 추천인 한 명을 팀에 합류시킨다.」
마지막 항목에 녀석이 가는 실눈을 뜨고 은호에게 반문했다.
"추천인?"
미세하게 좁혀진 녀석의 미간 덕에 현 상황이 녀석이 원치 않는 부분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은호는 녀석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추천인 한 명을 반대없이 꼭 합류시켜줬음 해."
부탁같기도, 강요같기도 한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굳이 인원을 추가해야하는 이유가 있나?"
"있어. 혹시 드럼 칠줄 알아?"
"아."
은호의 물음에 녀석은 확실한 이유를 알았다는 듯 탄성을 터뜨렸다.
나 역시 아예 짚이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하고 싶은 노래가 락이었나?"
"역시, 눈치가 빠르네."
은호가 녀석을 향해 활짝 웃었다.
나 역시 짐작하던 부분이었기에, 내가 녀석보다 먼저 대답했다면 혹시나 저 미소가
나를 향했을까? 하는 미묘한 질투가 샘솟았다. 몇 번의 도리질로 그 유치한 감정을 내 안에서 털어냈다.
"추천인을 안 받는다면, 선곡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게 되는 셈이네?"
"그렇겠지?"
"당연히 하고 싶은 노래를 못하면 우리와 함께할 이유도 없을거고."
"물론이지?"
은호는 학교가 아닌 장소에서 마음이 좀 더 편해보였다.
능청스러운 은호의 표정을 보면 그 부분은 확실했다.
저런 표정을 지어도 예뻐보일 만한 사람은 흔치 않겠지. 새삼 은호가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잖아? 알겠어. 마땅히 받아들이도록 하지."
"참 고마운 걸?"
녀석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고 너스레를 떨었다.
뭐랄까, 미묘하게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어쩐지, 나 혼자 낙동강의 오리알이 되어 둥둥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네 추천인은 누군데?"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은호는 가는 손목때문에 덜렁덜렁 반대 방향으로 매달린 시계를 고쳐잡았다.
시계줄 길이를 최대한 땅긴 것 같은데도, 꽤 여유가 있어보였다.
손목시계가 없었던 나는 허접한 연습실 구석에 매달린 시계를 보고나서야
지금 7시가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똑... 똑똑.
연습실 밖으로부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서로 얘기 중이었다면, 분명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혹시 나 혼자 잘못 들은 소리는 아닌건가 싶었지만, 녀석과 은호 역시
연습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을 보면 착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
몇 초 후 끼익, 하고 낡은 연습실 문이 어린아이용 구슬만큼 작게 벌어졌다.
"저기..."
작게 벌어진 문틈 사이로 얇고 가는 목소리가 딸려왔다.
"은호야 들어가도 될까?"
"지은아!"
은호는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자신의 추천인을 기꺼이 환영했다.
나 역시 그녀가 누군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의 스타인 주은호가 있는 곳엔 항상 그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지은. 아담하고, 수수하지만, 예쁘장한 여자였다.
은호와 이지은이 지나갈 때마다 남자 녀석들은 이지은에 대해 이렇게 수근거리곤 했었다.
하필이면 친구가 주은호라고.
주은호 옆이 아니었다면, 이지은도 꽤 인기가 있었을 거라고.
남의 외모를 함부러 품평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은 아니었으나,
나 또한(그때 당시 나로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힘찬 도리질을 통해 불순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나니
그제야 녀석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아주 흥미롭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흥미로운 인선이기는 했다.
드럼 칠 사람이라고 해서 남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 이지은이 나타날 줄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편견이란 것은 겪어보기 전까진 깨뜨리기 참 어려웠다.
"소개할게. 여기는 드럼 칠..."
"이지은, 맞지? 반갑다."
녀석은 은호의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이지은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아.. 응."
이지은은 쭈뼛하더니 이내 녀석과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저 은호야... 조금 늦어서 미안해!"
"응? 늦기는 무슨."
"7시 30분까지랬는데, 5분이나 늦어버렸어..."
"지은이가 약속시간에 늦을 애가 아닌데, 너 설마... 제때와서 문 앞에 서 있었어?"
"..."
설마.
"그, 그게 때마침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길래..."
"아유, 내가 못 살아 진짜!"
이지은과 얘기할 때 은호는 완전히 무장해제한 느낌이었다.
훨씬 더 표정이 살아있고, 예뻐보였다.
혹시나 은호의 추천인이 불편할까봐 나름대로 걱정했었는데,
생기 넘치는 은호의 표정을 보니 잘 됐다 싶었다. 녀석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 했고.
"어쨌든 어때? 괜찮겠지?"
은호가 녀석에게 물었다.
"여부가 있겠어? 환영이야."
"그럼 멤버는 다 모인거고, 시간도 시간이고, 첫 날이기도 하니 오늘은 가볍게
실력확인만 해볼까?"
"그래."
나는 기타를, 녀석은 베이스를 꺼내는 동안
이지은은 연습실의 허름한 드럼을 튜닝했다.
기타를 잡고 손에서 살짝 땀이 났다.
기타를 나름대로 쳐오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남들 앞에서 내세울만한 실력은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멀뚱히 있는 사이 튜닝을 먼저 마친 녀석이 둥둥 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