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글쓰기 소모임 관련해서도 글을 올렸었는데요. 소모임 관련 홍보글을 쓰기보단 최근에 쓴 글 두 개 정도를 선보이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선보인다기 보단 작가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다른 피지알 회원님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고자 하는게 주목적이겠네요.
픽션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녹아있고, 애초에 타인에게 보일 생각으로 글을 쓴 게 아니라서 표현도 절제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재미 있네."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날씨가 좋네요. 다들 즐거운 나날 들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제목 - ABC
"내 앞에서 B랑 섹스하면, 너랑 자줄게." 수 년을 앓고 고백한 순정의 대답은 무도했다.
A는 실키한 검은 셔츠를 입고 소파에 앉아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이죽이며 말했다.
"그러면 날 이뻐해줄거야?" 울음을 참는 대신 나는 A에게 대답했다.
울었다면, 나를 안아주었겠지. A는 표정도, 감정도, 자기자신도 속이며 거짓말을 하는 아이니까.
그 작은 몸으로 나를 안아주었겠지.
12월의 시린 바람이 창문을 핥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B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와 자연스레 A의 목에 팔을 감아 안겼다. 벌거벗다시피 했지만 A는 익숙하다는 듯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
B는,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A의 다리, 나에겐 허락되지 않은 A의 목덜미에 감겨 나를 보다 말했다.
"이 언니랑 해?"
B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A에게 물었다.
"글쎄, 얘가 괜찮다고 하면."
검은 셔츠 속에 웃는 A의 얼굴이, 마치 어두운 장막을 가르고 얼굴을 내민 악마 같았다.
"나는 괜찮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 방은 평생 살아온 지구가 아닌 낯선 세계. 깨짐과 뒤틀림과 고통과 능욕이 오롯이 정상인 세계.
"나는 진짜 괜찮은데, 나 한 번도 누가 보는데서 해본 적은 없는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덧붙여 말했다.
괜찮다. 괜찮을까?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다면, A는 나를 이 방에서 내보내겠지.
이 낯선 세계에서의 추방만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A가 이 곳에 있기에.
A의 목소리는 그만큼 달콤했다.
B는 A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나 하기 전에 샤워하고 올게."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B의 나신을 보며 두통이 심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없어져도, 아늑한 일상이 없어져도, 세상은 돌아간다.
결핍은 결핍 그 자체로 고유하고 완성된 것이다.
마음 속 무언가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나는 A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하겠다고 했으니까."
앉아 있는 A의 다리 사이에 굴종하듯 무릎을 꿇고 잘록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하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이제 그녀를 안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노예가 되는 것만이 우리 사이 가까워 질 수 없었던 수 십 센치의 거리를 좁혀주는 유일한 티켓이었다.
나는 A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떼고 A의 하얗고 예쁜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나는 너와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예쁜 불빛이 반짝이는 밤거리를 걸으며 수줍게 손을 잡고 싶었어.
이 겨울이 지나 곧 벚꽃이 흩날릴 거리를 단 둘이 걷고 싶었어.
따스한 쌀밥과 국을 내어주며 타박하는 어머니와 가족이 있는 삶에서 벗어나버렸다.
나는 뒤틀림과 아픔이 정체성의 일부인 이 낯선 세계에서, 그저 내달릴 수밖에 없는 작은 기차.
아니, A의 손 끝에 매달린 꼭두각시.
A의 얼굴 너머로, A가 원하는 운율에 춤추고 움직이는 내 모습이 보였다.
A는 손도 아름다우니까. A의 손과 손톱이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제목 - DEF
난감한 질문에 답해야만 할 때, 나는 종종 볼 안쪽을 씹곤 했다.
어떤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 마냥, 스마트폰에 몰두하는 척하며 지은의 질문을 듣지 못한 체 했다.
"그래서, 나 안사랑해?"
3개월 전 월세를 같이 얻을 때만 해도 사랑스러워 보였던 지은이와 작은 방이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다.
"말했잖아. 사랑한다고." 늘 다른 여자에 같은 질문, 지겹다 생각하는 같은 속마음에 거짓을 말하는 혀.
나는 뱀이다.
"진짜 나 사랑해? 왜 요샌 옆에도 잘 안와? 나랑 같이 있는게 지겨워?"
본심이 가죽을 찢고 나오려고 꿈틀거린다.
"너 사랑하지. 솔직히 너 말고 네가 주는 쾌락을 사랑하지. 알고 있었잖아? 너 말고 만나는 애들이 몇명인데 너만 사랑할거라고 믿었어?"
폰에서 눈을 떼고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지은을 보았다.
아랫 입술을 질끈 물고 악에 받힌 표정이었다. 화가 나 노트북을 집어던지기 전에도, 핸드폰을 집어 던지기 전에도 보았던 표정이다.
"너 같은 새끼를 믿고 산 내가 병신이지."
"드라마 찍나." 웃으며 답했다.
동시에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의 목을 감싸고 익숙한 가슴을 쥐었다.
"오빠 뭐해 갑자기" 당혹스럽다는 듯이 뱉는 말 끄트머리에 비음이 섞인다.
지은의 목덜미를 정신 없이 핥으며 살짝 고개를 들어 달그락거리는 창문을 보았는데, 너머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 속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아, 세상은 연기다. 선도 악도, 그 외 잡다한 모든 것들이 담뱃잎처럼 말려들어가 허무하게 타올라 사라지고마는.
나도 지은도 연기처럼 뒤섞여 피어오르다 또 맥없이 늘어져 퍼지겠지.
내가 나인게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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