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여름, 정해진 등교 시간은 2시간도 넘게 남은 이른 아침, 나는 매일마다 교실에서 어설픈 자세로, 어설픈 글씨로 칠판에 판서를 해가며, 오직 한 학생만을 위한 강의를 했다. 학생은 바로 같은반 짝사랑 상대로, 그 아이의 특목고 입시, 그중에서도 특히 수학 과목을 도와주겠다는 강한 명분으로 나는 매일 아침 일찍 나와, 어설프게나마 한명의 교사가 되었다.
그냥 다시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마음속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좋은 추억이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런 따뜻한 얘기는 아니니 본론으로 넘어가보자.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아침 운동장 / 체육관 강당 청소를 3학년이 반 별로 돌아가며 이틀씩 맡았다. 그리고 우리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 출석번호별로 홀짝을 나눠 하루는 홀수 번호가, 하루는 짝수 번호가 아침에 1시간 정도 일찍 나와서 전담해서 청소를 했다.
다가온 청소일, 당시 짝수 출석 번호이던 나는 먼저 나가서 청소를 해야 했으나, 사심이 잔뜩 섞인 교육혼을 불태우다가 나는 그만 내가 청소 당번일이라는것을 잊고 말았다. 다행히 너무 늦기 전에 당번이 아닌 친구중 1등으로 도착한 친구가 내게 '너 당번 아니야?' 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청소함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청소는 이미 거의 다 끝난 상황에, 담임 선생님께서는 교문이 아닌 교실에서 가방도 없이 달려오는 나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솔직하게 일이 어떻게 된건지 선생님께 설명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쿨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지훈아'
'네'
'내일 더 일찍 와야겠네 그치?'
'네'
'혼자 먼저 청소좀 해야겠네 그치?'
'네'
열심히 청소를 마친 아이들 틈에서 니 뭐하다 이제 왔냐, 사랑에 미친놈 아니냐는 볼멘 소리를 들으며 뻘쭘하게 교실로 돌아간 나는, 한명 있는 내 강의의 학생에게 내일은 휴강임을 알렸다. 그 친구는 내게 미안해하는듯 했지만 사실 이것은 엄연히 내 잘못이고 별로 누군가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매일 일찍 오던거 그대로 일찍와서 머리 대신 몸을 쓰면 되는거니까.
다음날, 아침 일찍 혼자서 학교에 나와 청소 도구함 열쇠를 챙겨서 청소를 시작한것까지는 아주 좋았다. 아침 공기를 맞으며 육체 노동을 하는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상쾌했다. 나는 사무직이 아니라 현장직이 더 적성에 맞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신을 내며 삼성 MP3를 꽂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누군가 나를 넌지시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니 세상에, 부임하신지 얼마 안된 교장 선생님이 '이런 훌륭한 학생이 있다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실리가 없었고, 아침부터 나와서 청소를 하고 훌륭한 학생이다. 몇학년 몇반이냐, 공부는 좀 하냐,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으셨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최대한 빨리 관등성명을 낸 뒤에, 왜 혼자 청소를 하고 있는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교실에서 반 친구에게 수학을 가르치다가 청소에 늦었다' 라는것이 역시나 아무 배경 지식이 없는 교장 선생님께는 역시나 사진에 뽀샵질을 잔뜩한것마냥 아름답게 왜곡되어 받아들여지실 수 있다는걸 간과했다. 더 자세히 설명했어야 했지만, 교장 선생님이라는 거물급 존재 앞에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교장 선생님께서는 흐뭇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드시더니 자리를 뜨셨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상당히 깊은 죄책감에 빠졌다.
일이 거기서 끝났다면, 이 일은 그냥 아마 내 기억에서 지워졌을지 모른다. 이 일을 내가 이렇게 샅샅이 기억하고 있다는것은, 또 다른 무슨 일이 생겼다는 얘기다. 청소를 마치고 교실에 오자,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더니, 교장 선생님께서 찾으신다고 교장실로 가라고 하신다.
나는 그렇게 반쯤 얼어붙은채로 교장실에 들어갔다. 졸업할때까지 한번도 와볼일이 없을 줄 알았던 교장실의 근엄한 풍경에, 원래도 얼어있던 나는 잔뜩 위축되었고, 차마 그 분위기속에서, 차마 날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불러주신 교장 선생님께 '저는 짝사랑하는 여자애한테 눈이 팔려 친구들을 버리고 그 벌로 다음날 아침에 나와 혼자 청소를 하고 있던 쓰레기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비겁하게 침묵하는 길을 택했고, 교장 선생님께서는 과분하지만 귀에는 잘 안 들어오는 어려운 덕담을 몇마디 해주시더니 내게 가서 읽어보라며 책을 한권 선물해주셨다.
책을 받아들고 나온 내 기분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친구들에게도 좀 미안했지만, 무엇보다도 담임 선생님께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된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의기소침해져서 풀죽은 걸음으로 경과를 보고하러 교무실에 갔는데, 담임 선생님께서는 비슷한 또래의 국어 선생님과 뭐가 신나는지 웃으며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고 계셨다.
'쌤...'
책을 손에 쥐고 온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은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채신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풀죽어 있는 내 어깨를 힘껏 두드리며, 이렇게 얘기해주셨다
'잘했어. 자랑스럽다.'
칭찬인지 용서인지 모를 그 한마디에, 원래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이었지만 그 순간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 같아 보였고, 무언가 구원을 받은 느낌이 들며, 갑자기 기운이 몸에 들어오는것이 느껴졌고, 신나게 교실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무용담처럼 설명했고, 반에서 내 별명은 '쓰레기'가 되었다. '흔들린 우정' 이라는 새 별명이 붙기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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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지 글을 보고 긍정적 에피소드도 페이지에 하나 있어야 될거 같아서 휙휙 써봤습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 행동이 자랑스럽고 잘한것이 아님을 나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 순간에는 정말 내가 잘한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