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ya Savicheva, 1930. 1. 23 ~ 1944. 7. 1. 위 이미지는 6살 난 1936년의 타냐.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사비체프 가에서 태어난 타냐는 집안의 막내딸이었습니다. 타냐의 아버지는 타냐가 여섯 살 났을 때 죽었고, 슬하에 타냐를 포함해 다섯 남매를 남겼죠. 제냐, 레오니트(레카), 니나, 미하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냐.
그래도 그런대로 행복했던 이들 가족의 삶은 독일군으로 인해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미 레닌그라드를 떠난 미하일을 제외하고 타냐의 가족들은 모두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었고, 사비체프의 가족들은 레닌그라드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독일군의 진격은 참으로 거친 것이었습니다. 6월 22일에 독일군이 소련 영내에 발을 들인 지 고작 두 달만에 탈린 시가지를 제외한 발트 3국이 통째로 날아갔고, 9월이 되기 직전에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모든 철길을 끊어버렸습니다.
타냐의 가족들은 좋든 싫든 살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한 살 난 어린 타냐도 예외는 아니었죠. 타냐는 적을 막기 위해 레닌그라드 인근에서 철조망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폭약을 끄는 일도 했죠. 열한 살짜리 어린 여자아이가 말입니다. 그 정도로 레닌그라드의 상황은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타냐의 언니인 니나(당시 23세)는 라도가 호로 차출되었는데, 거기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탈영이 아니라, 라도가 호 인근에 독일군이 몰려오면서 그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급하게 탈출하게 된 거죠. 물론 이 내막을 타냐를 포함한 가족들이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니나가 죽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니나의 것이었을 일기장을 어머니 마리야는 타냐에게 건네줍니다. 타냐는 거기에 일기를 쓰고는 했죠. 본래 타냐의 일기장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냐의 일기장은, 그 추웠던 레닌그라드에서 아무것도 불에 땔 것이 없자 땔감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냐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일기장만은 간직하고 있었죠.
독일군이 모든 육로를 끊어버린 9월 6일에 레닌그라드에 남은 식량은 고작 한 달치뿐이었습니다. 곧이어 900일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독일군의 포위가 개시되었고, 곧 레닌그라드의 사람들은 엄청난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하루에 125 g의 빵을 먹는데 그쳤고, 그나마도 절반은 톱밥이 섞인 것이었을 정도였죠. 이 1941년의 겨울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습니다.
급기야 이 와중에 수혈을 위한 헌혈에 계속 동참한 언니 제냐가 위독해졌습니다. 안 그래도 제냐는 아침 일찍 일어나 7 km를 걸어서 공장에서 지뢰를 조립하는 일에 동원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런 허약해진 몸에서 몇 차례에 걸친 헌혈을 했으니 몸이 버틸 리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1941년 12월 28일에 언니 제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음은 제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는 할머니가 죽었고, 이어 레카가, 바샤와 레샤 삼촌이,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마저... 불과 다섯 달 만에 제냐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타냐 혼자 남았습니다.
1942년 8월에 타냐는 후방의 니즈니 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에 있는 한 마을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의 고아원 원장과 미하일이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던 모양입니다. 원장은 미하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타냐는 살아 있지만, 상태가 상당히 나쁘다. 휴식과 특별 관리, 충분한 영양, 더 나은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지."
1944년 5월에 타냐는 인근의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그 곳에서 장결핵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니나와 미하일은 살아남아 레닌그라드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이전에 3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던 레닌그라드는, 백만이 넘는 시민들이 굶어 죽거나 탈출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탈출하는 통에 50만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니나와 미하일에게는 이제 타냐의 일기장만 남았습니다.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제냐 언니가 1941년 12월 28일 정오에 죽었다.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오후 3시에 죽었다.
레카가 1942년 3월 17일 오전 5시에 죽었다.
바샤 삼촌이 1942년 4월 13일 새벽 2시에 죽었다.
레샤 삼촌이 1942년 5월 10일 오후 5시에.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오전 7시 30분에.
가족들이 죽었다.
모두 죽었다.
타냐 혼자 남았다.
오늘날 그녀의 일기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박물관에서 말없이 전쟁의 참상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것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가고 있겠죠. 무엇 때문에 목숨을 잃어 갈까요. 무엇 때문에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갈까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무엇이 그리도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기에.
역사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가장 마음아픈 때가 바로 이럴 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갔을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갔을지, 그게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 목숨이 소중한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소중한 법입니다. 전쟁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러한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전쟁은 단지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통계로 바꿔 버릴 뿐이라는 것이죠.
전쟁이라는 것을 참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도 그런 비판에서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스스로 조심하고자 하지만, 비극을 겪어본 자와 겪어보지 않은 자간의 간격은, 칼로 베였다라는 글귀를 본 것과 실제로 칼에 베이는 고통을 당한 것보다 더욱 큰 것이겠죠.
그럴 때마다 타냐는 저에게 말없이 경고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라는 것을,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을, 섣불리, 그리고 가벼이 다루지 말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