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컨디션 - (1) 토위에 토를 끼얹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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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컨디션 - (2) 고슴도치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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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컨디션 - (3) 품 안에 따가운 가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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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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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어컼 크헝
나는 혼신의 다한 연기로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눈을 질끈감고 잠꼬대를 하듯..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아주 그럴싸한 모양새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애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나보다. 냉장고의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볼에 갖다 댄다. 깜짝 놀라서 어깨가 움찔했다. 다 틀렸다.
"크흨...으.."
마지막 발버둥으로 잠에서 막 깬듯한 포즈를 취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는 처량한 표정으로 망울진 눈을 한 민희가 있다. 민망함과 속상함이 배를 훑듯이, 눈을 마주치면 거짓은 이내 그 힘을 다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맥주캔을 받아든다.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민희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나도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맥주는 따지 않은 채다. 다만 우리의 냉장고에는 이제 더 이상의 맥주는 없었는지, 민희는 빈 손을 아쉬워한다.
나는 대화의 요령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도 잘 몰랐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평소에는 말을 잘 한다는 소리를 으레 들었지만 그건 이를테면 형식이 있는 말들이었다. 감정이나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나 의견에 대한 일들 말이다. 그래서 내게 이 침묵동안 주어진 선택지는 정말 많으면서도 거의 없는 셈이었다. 요령껏 위로를 할 수도 없고 요령껏 못들은 체 할 수도 없다. 다만 눈 마주침이 더 길어지기 전에 맥주를 따서, 한 모금을 꿀떡 마시고 민희에게 넘긴다. 민희는 맥주캔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한번 쓱 훑고 꿀떡이며 또 한 모금을 마신다. 350 미리의 맥주는 그러고도 남아서 내게 돌아온다. 나는 다시 한 모금을, 아니 두 모금 정도를 마신다. 민희는 아 남겨요. 하고 그제서야 입을 연다. 딱 한 모금쯤 남은 맥주를 돌려주자, 이번엔 입을 대지 않고 마신다. "아 왜 간접키스 해요~"
어이가 없다.
마치 그 대화가 없었던 것 처럼, 우리는 맥주 한 캔을 다 비운뒤에 너나 할 것 없이 다시 누웠다. 나는 마음이 심란해서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해 줄수 있는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확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랬다. 우리는 다만 장님이 된 것처럼 손을 더듬어 서로를 생각해 볼 뿐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인간은 코끼리처럼 커다란데도, 코끼리의 발을 겨우 만져대며 그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던 구절이 이어서 떠올랐다.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소경이 되어 민희의 코끼리 같은 발을 더듬어 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그렇게 밖에는 서로를 지탱할 수가 없는게 아닐까 하여 그게 잘못한 건 아닐꺼야. 민희의 코끼리 발은 다만 투박하고, 거칠고, 예쁘고 맨질맨질하게 손질할 수는 없었던 것 뿐이었다고 그건 그냥, 불운에 가까운 것이라고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마치 나와, 민희를 만나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되는 듯했다. 우리는 소경이 아니었음에도 소경처럼 산 것은 아닐까 하고. 다만 그러했다.
"아직 안자죠?"
민희의 입이 떨어졌다. 나는,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어. 하고 대답했다. 민희는, 옷자락과 이부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아까와는 다르게 긴장이 되지 않았다. 민희는 돌아 누운 내게 등을 맞대어 누웠다. "아까 봤죠? 돌아서서 건들기만 해봐.."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마치 민희를 처음 본 날 같이 느껴졌다. 예쁘고, 여자다워서 긴장하게 되는 그런 이성. 하지만 농담으로도 그 상황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기에 다만 "잘거야" 라고 답했다. 민희는, 아 자지는 말고요. 난 잠 안오는데.. 하고 말한다. 어쩐지 계속 휘둘리는 느낌이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 하면 안되요."
"..알아."
"아 진짜. 진심."
"...알았다니까."
"확실해요?"
"믿어라 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디?"
"...너무 자신있어하니까 갑자기 의심이 드네요."
"...뭐임마?"
"농담이에요. 그럴 사람이면 이렇게 있지도 않았겠지."
맞닿은 등은 약간 차가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서히 따뜻해진다. 파르르, 하고 서로의 몸이 교대로 떨린다. 아마 약간의 차가움이 약간의 따스함으로 변하면서 그렇게 되었나보다. 누구 할 것 없이 쿡, 하고 웃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까맸던 바깥이 푸르스름해 질 무렵에도 우리는 잠들지 못한 채 서로의 등에 의지해 있었다. 숨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지고, 민희는 손 좀 잡아줄래요? 하고. 나는 말 없이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아무리 손을 쥐고 있어도 이래서.. 미안해요. 아냐. 선배는 손이 뜨거운 편이네요. 남자들이 그렇지 뭐. 아닌데. 유독 뜨거운 거 같아. 술 먹어서 그래. 심박수가 약간 올라간 듯 한게 등 뒤로 전해질까 겁이 났다. 아까부터, 민희의 맥박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듯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를 쓴 건 알량한 선배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깍지를 끼지 않은 손이 뎁혀지고, 민희는 이제 됐다며 손을 놓았다. 오빠. 너 왜 자꾸 선배랬다 오빠랬다 그러냐. 어느쪽이 좋아요? 어느쪽이든 통일시키는게 좋은데. 싫은데요. 우리 한잔 더해요. 뭐? 잠도 안오고, 옷도 아직 없고. 냉장고에 맥주 다 떨어지지 않았어? 시켜먹음 되죠. 아침에? 원래 야식집은 아침에 시켜먹는거래요. 그럼 야식집이 아니지 않나? 어쨌든. 쏘주 한잔 더? 너 오늘 수업 없냐? 먹다 가면 되죠. 오빤요? 나도 뭐.. 콜! 야식은 내가 쏜다. 아 속쓰려. 속쓰린데 술생각이 나냐? 원래 속쓰린건 좋은 안주 먹으면서 해장술 하는거에요. 대체 어디서 배운 음주습관이냐.
민희는 여관방 한 켠에 놓인 전단지 뭉치를 들고 전화를 건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이불로 몸을 가렸다. 벽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져서, 다시 등을 맞대고 싶었다. 전화를 마치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했다. 술이 세다든가, 토해서 배가 고프다든가, 알바 하기 싫다든가. 자취하는데 돈 깨지는거 진짜 토나온다든가. 장학금을 타는거 점점 힘들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대체로 민희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민희가 장학금을 탄다는 말을 했을때 놀랐다. 사람의 저력은 진짜 알 수 없는거구나. 열심히 살자고 반성하게된다. 등이 자꾸 차가운 탓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추워요? 아니 벽이 좀 차가워서. 등을 떼고 이불을 뒤까지 둘러서 기대보았더니 훨씬 나았다. 민희는 뭔가 말하려듯 입을 열다가. 말았다. 그 뒤로는 무한도전이 어땠다는 둥, 지난 주 일박 이일이 어땠냐는 둥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아이유가 뭐가 이쁜지 모르겠다거나, 수지가 뭐가 이쁜지 모르겠다거나, 엑소는 대체 정체성을 모르겠다고 하고 욕을 먹거나 하는 말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아침부터 먹는 족발은 의외로, 정말 의외로 각별하게 맛있었고, 나는 모닝소주가 진짜 달고 진짜 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술자리는 소주 두 병도 까기 전에 끝났던 것 같다. 정확히는 아, 배불러 죽겠다. 저도요. 하고 한 쪽에 음식과 술병을 치워둔 채 벌러덩 누워서,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꼴을 보고는 못났다고 키득대다가, 정신 없이 어질어질해서 그렇게 옹알이를 하며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이불 하나 없이 서로 엉켜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내 다리는 걔 위에 올라가있고, 걔 얼굴은 내 배를 들이받아있고. 그렇게 우린 여관방에서 무려 이틀을 동침했다. 입구에는 잘 개어진 옷이 놓여있었다. 여관을 나설 때 아주머니는 세상 한심한 놈들을 다 보겠다는 눈빛과, 젊은 사람들이 어이구.. 하는 한탄을 하셨고, 우린 뽀송뽀송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옷 위로 술냄새를 약간 흘리며 여관을 나섰다.
아, 오늘 수업 다 날렸네.
오빠.
왜?
돈 있어요?
지갑을 열자 만원짜리가 딱 두장 있었다.
저 만원만요.
이젠 삥도 뜯냐.
민희는 기어코 만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근처 편의점으로 날 끌고 가서 컨디션 두 병을 샀다. 건배!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는 민희에게 야 너 못생겼다. 하고 장난을 쳤다가 배를 맞았다. 삥도 뜯고 사람도 때리고 깡패냐 깡패? 눈을 흘기는 모습도 괜찮은걸. 하고 보니 새삼 민희가 입고있던 속옷과, 살색과, 그 이틀의 밤이 떠올라서 귀가 뜨거워졌다. 술에 취해 서로를 끌어안고 자다 먼저 깼을 때, 술 냄새보다도 좋았던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웠던 민희였다.
우리는 그렇게 남들이 술 먹으러 나오는 시간에 술을 깨려고 컨디션을 마셨고, 나는 민희를 컨디션이라고 저장한 뒤에 놀리듯 핸드폰을 보여줬다. 헐. 민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기 핸드폰을 막 두들기더니 변태라고 쓰여진 내 전화번호를 보여줬다. 야, 내가 왜 변태야! 아무짓도 안했잖아! 아무짓도 안했으니까 변태지! 그건 또 무슨 개.. 이봐이봐 입 험한거 봐 진짜 애들이 선배 본성을 알아야해! 내가 집에가기 위해 타는 지하철 역에 도착할 때까지 민희는 시시껄렁한 핑계로 날 계속 놀렸다. 이 애는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없이 슬프고, 가련하다가도, 때로는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이렇게 유쾌하고 밝다는게 신기하고, 또. 대단했고, 그래서 자꾸 떨리려고 했다. 뭔가 해주고 싶다고. 자꾸. 다만 너무 멀리 온 듯한 느낌에 겁을 집어먹어 나는 에이. 에이, 하고 스스로를 손가락질 하는 것이었다.
간다.
지하철 개찰구로 들어가려자, 민희는
바래다 달라고 하면 바래다 줄 수도 있는데?
하고 배시시 웃었다. 입꼬리가 약간 떨리는 듯 했다. 나는
가슴을 한대 쿵 맞은 듯 했고, 마치 역 안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애만 포커스에 잡힌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내가 지금 얘를 더 보고 싶은거구나.
에이, 너 왜그러냐.
하고 습관처럼 자신을 타일렀지만 몸은 개찰구에 뭐라도 걸린듯이 멈칫했다. 어떡하지, 하는데 민희의 팔짱 낀 손 끝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나도모르게 손을 잡아달라는 식으로 뒤 돌아 팔을 쭉 뻗었다. 그리고 민희는, 정말 그녀답게 손을 잡아주지는 않고 '갑시다!' 하고는 옆 개찰구로 성큼성큼 슥 들어와 버리는 것이었다.
나쁜년 같으니.
우리의 길었던 밤이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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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곧 써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