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우리나라 중소기업 제품을 빌게이츠가 토크쇼에서 꺼내들고 뉴욕 한복판에 애플 디스하는 광고 세우고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이리버'의 전성기 얘기입니다. 우리나라가 MP3플레이어의 '종주국'으로서 기염을 토하던 그 시절, 아이리버 말고도 여러 경쟁업체들이 있었습니다. 2인자 격이었던 (지금은 '코원'이 된) 거원이라던가 이윤열 선수가 우승했던 스타리그 대회를 후원한 '아이옵스'라던가...이 때 경쟁의 화두는 '기능'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작은 기기 안에 더 다양한 기능, 강력한 기능을 때려 넣을 수 있는가. 아이리버가 HDD플레이어 내놓으면서 아이팟을 디스할 때 내세웠던 것도 2배 긴 재생시간, 라디오, 녹음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 기능들 때문에 훨씬 두껍고 무겁고 조작이 까다로웠다는건 거의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이 시절, 전자사전으로 유명한 일본 브랜드 '샤프'에서 파스텔톤의 둥글둥글 귀여운 MP3플레이어 - '샤프아이'를 내놓습니다. 이 제품은 당시 각광받던 Wolfson 코덱을 썼다는 이유로 소수의 매니아들 사이에 음질 좋은 기기로 알려졌지만 그리 히트하지는 못하고 사라졌는데 후에 원제작사에서 약간 수정해서 M7000이라는 이름으로 한정 판매 하기도 했습니다. 알고보니 이게 OEM 제품이었고 원제작사는 바로 국내 중소기업인 '금비전자'였던 겁니다.
이 제품은 귀여운 디자인과 음질(사실 코덱과 22밴드 이퀄라이저 때문에 뻥튀기된 감이 있습니다.)로 조금 알려진게 거의 다 입니다만- 그 기능 만능주의 시대에서도 이 제품만큼 기능을 때려넣은 제품이 없다는건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기능들이 있었는지 한 번 늘어놔보겠습니다.
애석하게도 제가 갖고 있던 기기는 액정이 나가서 고장나버린지 오래라 구동 화면을 보여드릴 수 없고 또 주로 제 기억에 의지해서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다소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본기능
음악 파일 재생. wav, ogg, wma 등 지원.
라디오. 라디오 녹음, 슬립 타이머, 예약 녹음.
녹음. 자체 마이크로 음성 메모, 강의 녹음 등. 3단계 레벨 조절
라인인. 외부 음원을 AUX로 다이렉트 녹음 가능. 외장 마이크 지원
이 정도는 대부분의 기기에서 지원하던 것들이죠. 그런데 이 기기는 원래 컨셉이 '노래방' MP3였습니다. 그래서...
노래방 기능
템포조절 가능 - 이게 대박 입니다. 어학용으로 템포 조절이 가능한 기기는 몇 있었는데 죄다 피치가 올라가거나 내려갔습니다. 속도가 느려지면 음이 낮아지고 빨라지면 높아지고 하는거 다들 아시죠. 그런데 이 기기만은 피치가 그대로 유지된 채 템포만 바뀌었습니다! 게다가!
피치조절 가능 - 노래방에서 키를 올리거나 내리는 것 처럼 피치만 따로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기만의 독보적인 기능이었죠.
가사표시 - 가사 뜨는 기기는 아주 흔했지만 이 기기는 노래방처럼 진행 중인 가사에 음영까지 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건 수작업을 해야했고 사용자들이 공유하도록 했는데 많이 안팔리는 바람에......
외장마이크 지원 - 라인인 쓰면 다 되긴 합니다만 이 제품은 외부 음원 또한 레벨 조절이 가능해서 쓸 수 있는 마이크 범위가 넓었습니다.
FM 트랜스미터 - 플레이어에서 재생되는 소리를 지정한 라디오 주파수로 쏴서 근거리의 라디오 수신되는 기기에서 주파수 맞추면 다 들을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차량에서 주파수 맞추면 차에 탄 모든 사람이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죠. 오디오를 이용해 가족 노래방으로 쓰라고 배려한 기능이겠죠. 아무튼 이 막강한 기능을 갖춘 플레이어는 당시 2~3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음원 + 마이크 동시 재생. 이것도 이 기기만 갖고 있던 엄청난 기능 입니다. 재생되는 음악과 동시에 마이크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노래방이니까, 원래 음원을 반주로 쓰니까 채용한 기능이겠죠.
템포조절과 동시재생 기능 등은 본래 노래방용이지만 응용하기 나름이고 노래 연습이나 악기 연습할 때 특히 유용한 기능이었죠. 이 기기 하나로 노래 틀어놓고 템포나 피치 바꿔가며 자기 악기 소리도 동시에 이어폰이나 스피커로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스마트폰이 만능이라지만 라인인 단자도 없고, 유료 어플 구입해야 쓸 수 있는 기능들이 많았습니다. 스마트폰은 개념 조차 없었던 시절에 말이죠.
그밖의 기능
다이렉트 녹음 버튼. 특정 버튼 길게 누르면 바로 음성 메모나 긴급 녹음이 가능했습니다. 이걸 구현한 기기도 몇 안 됐죠.
게임. 그 많은 기능을 때려박고도 모자라 '테트리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LED 색상 변경. 당시의 거원 제품만큼 많은 색상은 아니었지만 7가지 정도로 불빛의 색상을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드문 기능이었죠.
22밴드 이퀄라이저. 개인적으로 참 쓰잘데없다고 봤는데 아무튼 이렇게 미세 조절이 가능한 기기도 없었습니다.
찍찍이. 5초, 10초 전후로 건너 뛰는 기능. 템포조절과 조합해서 어학용으로 많이 쓰였는데 둘 다 갖춘 기기가 드물었습니다.
이 기기는 막강한 노래방 기능에다 어학 기능 등 끌어들일 구매층의 폭이 넓었는데도 주로 기본기능(마저!)이 우수하다고 알려진건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업체에서 나왔고 (그나마 샤프는 알려져있었지만 워낙 쟁쟁한 mp3 제조사들이 많았고) 또 둥글둥글한 형태가 선호하는 디자인이 아니었던데다 (당시 '이스타랩'이라는 듣보 업체에서 나온 '모노리스'라는 날이 선 직육면체 mp3가 반짝 인기였는데 트렌드가 그런 디자인이었던듯 합니다.) 사람들이 슬슬 다기능에 질려가던 시기였던 것도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다시 사고 싶은 물건인데 방법이 없어보여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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