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동아시아, 동남아, 유럽 무역을 18세기 후반까지 주름잡던 당대 최대의 기업이었습니다. 1669년에 이미 150 척의 상선과 40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있었고, 직원도 5만 명에 달했으며, 그리고 사적으로 고용한 용병만 해도 1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 막강한 규모를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는 투자자들에게 40%에 이르는 수익률을 안겨다준 것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동인도회사는 분명 네덜란드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회사였을 것입니다. 물론 선원이나 기타 잡무를 맡은 사람들에게는 회사의 일은 매우 고되고 힘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회사에서 상관장 같은 일을 맡은 사람은 크게 부자가 되서 귀국할 수 있었죠.
아무튼 어떻게 보면 속물 같은 사람들만 모일 것만 같은데, 보기와는 다르게 이 회사는 엄청난 천재 한 명을 배출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Isaac Titsingh.
그는 1745년,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서 당대 계몽주의의 조류를 따라 공부했습니다. 그는 가문의 본업인 의술을 전공했으나, 나중에는 진로를 바꿔 1765년에 레이덴(Leiden) 대학교에서 법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이런 배경이면 정부에서 일할 법도 한데, 그는 동인도회사에 취업해서 이듬해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떠납니다.
그 후 그는 일본, 인도 벵골,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그리고 중국에서 다년간 근무하였고 네덜란드어는 물론, 라틴어, 프랑스, 독일어, 영어, 일본어 그리고 중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면 그는 언어의 천재였던 거 같습니다. 또한 그는 외국문헌과 문화 등에도 관심이 많아 유럽에 일본의 시(詩), 일본의 문화, 일본의 그림, 그리고 일본의 역사 등을 폭넓게 소개했습니다.
일본에서 (1779-1784)
그가 일본에 부임하게 된 것은 1779년이었습니다. 그는 상관장의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4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네덜란드 상관장들과 달랐습니다. 보통 다른 네덜란드인들은 현지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하루 빨리 본국이나, 또는 유럽인 동포들이 비교적 많이 있었던 바타비아나 인도에 가려고 했는데 그는 일본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했으며 일본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였습니다.
그런 태도가 일본인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알본의 여러 다이묘들, 그리고 난학자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쇼군을 두 차례 알현했고, 쇼군도 그를 인상 깊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네덜란드는 보다 우호적인 환경에서 무역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782년,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 바타비아와 나가사키 사이에 통신이 끊겼는데, 이작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무역업무에 열중하는 것을 잠시 쉬고 일본의 학자들과 교류하고 일본의 문화를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곧 끝날 것임을 예상하고 일본과 무역협상을 개시하여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구리를 구매하는 데 성공합니다.
인도에서 (1785-1792)
이작은 1784년 11월에 일본을 떠나 바타비아에 이듬해 1월에 도착하고, 그는 곧 다시 인도 벵골의 상관장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행적은 많이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근무하던 다른 영국인은 그의 학식에 감탄하여 "벵골의 만다린"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시 바타비아에서(1792-1793)
인도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바타비아로 돌아온 이작은 동인도회사 본사의 재무관, 그리고 해운장관을 역임합니다. 최고위급 임원을 지낸 샘이죠. 그리고 그가 바타비아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마침 중국을 향해 가고 있었던 영국의 외교관 "매카트니"와 만났다고 합니다.
바로 그 매카트니가 맞습니다. 청나라의 건륭제 앞에서 절대 절을 할 수 없다고 고집부린 그 매카트니 말이죠.
매카트니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개항시키고자 했으나 이 때 이작과의 만남 후 일본개항은 포기했다고 전해집니다.
일본무역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적 특권이었기 때문에, 이작이 일부러 여러 과장과 유언비어를 섞어 매카트니를 설득시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1794-1795)
1794년, 동인도회사의 임원을 역임한 이작은 네덜란드 본국으로부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중국대사로 임명됩니다. 그는 청나라 건륭제의 환갑 잔치의 사절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매카트니와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매카트니와는 달리, 그는 청나라 관료들의 요청에 군말없이 모두 따랐으며 황제에 대한 삼배고두례를 행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서신이 낭독될 때도 절하는 등 현지인들의 문화에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모두 그대로 행했습니다.
역시 노련한 상인 다운 태도였습니다. 덕분에 그는 청황실이 자랑하는 원명원에도 초대되는 등 중국측으로부터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1796-1812)
1796년, 그는 오랜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유럽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는 유럽에 많은 보물과,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특히 일본 서적, 일본 동전, 일본 도자기, 일본 회화등을 대량으로 갖고 왔습니다.
사실 그는 유럽 최초의 진성 일빠(?)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일본의 문화에 흠뻑 빠졌고 나머지 생애를 일본서적을 번역하는 데 보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의 시를 라틴어로 번역했고 또한 하야시 시헤이가 저술한 삼국통람지설(三国通覧図説)을 당시 유럽의 국제어였던 프랑스어로 번역했습니다. 삼국통람지설은 당시 일본이 조선, 류쿠, 에조(홋카이도) 등에 대해 가장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였습니다.
덕분에 조선의 <한글>이 유럽에 이 때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그 외에 일본의 사케, 간장을 제조하는 법을 소개하였고, 일본의 역사, 일본의 혼례 및 장례 문화 등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의 학식은 정말 대단하여 바타비아 과학 & 문화 협회, 벵골아시아협회, 그리고 런던왕립협회 등 당대 최고의 학술협회의 멤버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인생관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돈을 멀리하고 지식을 가까이 하라", "인생이 유한함을 깨닫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라", 그리고 "조용히 잊혀진 자처럼 죽어라."
누군가 지적했듯이 이작 팃싱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약 200년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철학자라고 합니다.
18세기 유럽인들 중에는 그처럼 재미있는 인생을 살아간 인물들이 많습니다.
예일(Yale) 대학교의 이름을 지어준 Elihu Yale 도 아메리카에서 태어나고, 영국에서 자라, 인도에서 부를 쌓고 다시 유럽에서 돈을 뿌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