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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7/17 14:52:09
Name Naomi
Subject [일반] 한 편의 사랑시
   저에게 현대 영미시의 특징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사랑이란 소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꼽아보고 싶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아마 19세기까지 주류라 할 수 있는 낭만주의의 전통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데서 20세기 영미시가 전환점을 맞이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할 수 있는 T.S. 엘리엇은 낭만주의가 개인의 감정에 천착해 있기 때문에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다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영미시의 양상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갔지만, 엘리엇을 긍정 혹은 부정하며 전개되었기 때문인지 개인의 감정, 특히 연애 감정에 대해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야박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느껴집니다.
   오늘 저는 PGR에 그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시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의 예술
                                                                                        엘리자베스 비숍

잃어버리는 예술은 숙달하기 어렵지 않아요.
아주 많은 것들이 잃어버리기 위한 의도로
가득 차 있어서, 잃어버리는 것은 재앙이 아니죠.

매일 뭔가를 잃어버립시다. 문 열쇠들을 잃어버리는
부산스러움, 엉망으로 허비하는 시간을 받아들여요.
잃어버리는 예술은 숙달하기 어렵지 않아요.

그리고 더 멀리, 더 빨리 잃는 걸 연습합시다.
장소들, 그리고 이름들, 그리고 여행 가려고 했었던
곳들. 이들 중 어떤 것도 재앙을 불러오지 않아요.

난 어머니의 손목시계를 잃어버렸죠. 그리고 봐요! 내 마지막, 혹은
마지막 직전의, 세 체의 사랑하던 집들도 가버렸죠.
잃어버리는 예술은 숙달하기 어렵지 않아요.

나는 사랑스러운 두 도시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는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영토들, 두 개의 강, 하나의 대륙.
나는 그것들을 놓쳤죠. 그러나 재앙은 아니었어요.

—심지어 당신을 잃는 것 (장난스런 목소리, 내가 사랑하는
몸짓) 나는 거짓말 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잃어버리는 예술은 숙달하기 어렵지 않다는 증거죠.
비록 이것은 마치 (쓰라고!) 재앙처럼 보이지만요.


One Art
                                                                                          BY ELIZABETH BISHOP

The art of losing isn’t hard to master;
so many things seem filled with the intent
to be lost that their loss is no disaster.

Lose something every day. Accept the fluster
of lost door keys, the hour badly spent.
The art of losing isn’t hard to master.

Then practice losing farther, losing faster:
places, and names, and where it was you meant
to travel. None of these will bring disaster.

I lost my mother’s watch. And look! my last, or
next-to-last, of three loved houses went.
The art of losing isn’t hard to master.

I lost two cities, lovely ones. And, vaster,
some realms I owned, two rivers, a continent.
I miss them, but it wasn’t a disaster.

—Even losing you (the joking voice, a gesture
I love) I shan’t have lied. It’s evident
the art of losing’s not too hard to master
though it may look like (Write it!) like disaster.

   엘리자베스 비숍이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단 비숍은 여러모로 주류라 할 수 있는 흐름과 비껴서 있던 시인이었습니다. 그녀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은 엘리엇에 대한 반동처럼 시작된 고백시(confessional poetry)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시에서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을 배제하고자 했지만, 20세기 중반에 로버트 로웰, 실비아 플라스와 같은 시인들은 철저하게 개인의 경험에서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비숍은 로웰과 오랫동안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녀의 시를 고백시의 일종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녀의 시들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형태와는 사뭇 다릅니다. 앤 스티븐슨란 시인은 비숍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수줍고 위엄 있고 겸손한 태도로 엘리자베스는 내가 그녀의 삶이 아니라 그녀의 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고맙게 여겼다...예술은 그녀에게 순수를 위한 가능성의 결정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개인적 삶으로부터 배설되는 것들을 가지고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소재라 할지라도 그것을 쓴다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비숍에게는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다른 시인들은 기피하던 사랑이라는 소재를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사랑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사실 이 시는 비숍의 시들 중 가장 그녀의 사적인 내용들이 많이 드러난 시라 생각됩니다.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것들로 언급되는 “집”, “도시들”, “대륙”과 같은 내용은 실제 비숍의 삶의 궤적과 일치합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브라질로 이동했었고, 크게 2개의 도시에서 삶을 꾸려나갔습니다.) 때문에 “당신”이 구체적으로 로타라는 이름의 그녀의 연인을 가리킨다는 점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을 정도죠. 비숍은 그녀의 편지에 “인생 처음으로 극단적으로 행복하다”고 쓸 정도로 로타를 깊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긴 시간을 함께 했지만, 로타의 자살로 두 사람은 영영 이별하게 되죠. 이 시는 비숍 특유의 유쾌함이 있고, 마지막에 (쓰라고!)<(Write it)>라고 화자 스스로에게 훈계하는 목소리도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곱씹어보다 보면 화자에게 있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 그리고 그에 대해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하죠.

   한 가지 사소한 이야기를 보태자면, 비숍은 레즈비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애와 동성애가 어떠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고 믿고 싶은 것 같습니다. (특히 어떤 이들에게는 이성애는 훨씬 정신적으로 고결하리라는 환상이 있지 않은가 하네요.) 글쎄요. 저는 사랑에는 사랑이라는 이름밖에 붙일 수 없다 생각합니다. 이 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라 할 수 있겠죠.

출처:
One Art | Academy of American Poets:  http://www.poets.org/poetsorg/poem/one-art
About Elizabeth Bishop – English: http://www.english.illinois.edu/maps/poets/a_f/bishop/about.htm
William Boyd on Elizabeth Bishop in Brazil - The Guardian: http://www.theguardian.com/books/2010/sep/11/william-boyd-elizabeth-bishop-bra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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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미
14/07/17 22:08
수정 아이콘
시 정말 좋네요. 개인 공간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다만 farther가 맞다면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더 멀리 잃어버린다고 해야 하나, 좋은 번역은 아니지만 그런 뜻인 것 같아요.
14/07/17 22:25
수정 아이콘
좋아하하시니 다행입니다.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되요.

그리고 번역은 정말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네요.
제가 어제 새벽 눈이 침침한 와중에 번역해두고 자버려서(;;;), 지금까지 저런 꼴인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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