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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3/08 00:50:50
Name Naomi
Subject [일반] 금요일 밤 버스 이야기

빠르고 가볍게 쓰기 위해 존댓말을 생략하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이해해 주시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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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주말이 시작되는 밤이라서인지 서울 번화가의 밤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물론 나와 내 친구가 머무르는 곳은 한산한 곳이었다.
취업을 한 뒤, 상사에게 깨진 것으로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친구와 함께 저녁밥과 가벼운 맥주를 마셨다.
한 주동안 나에게도 꽤 버거운 일정이었고, 친구는 상사에게 깨졌기에 여러모로 행복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한 주를 무사히 버텨냈고 이러한 한주가 지난 것을 기념하면서 술자리를 가지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였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까지 였다면 참 보람찬 주말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은 어느덧 11시가 되었고, 대중교통 수단이 끊기기 전에 서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마치 본능처럼 찾아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조금의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면 약 6년동안 꾸준히 타고다녔던 버스가 도착한다.
평소에도 버스를 타면 멀미가 심해 대부분 집으로 오고가는 1시간하고도 반을 잠을 자는 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피곤한데다가 약간의 취기가 더해져서 어김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잠든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작스레 생경한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내 허벅지를 주무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온몸에 감각이 삐쭉하고 곤두서며 꿈의 세계를 유영하던 의식은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어떤 남자였다.
당황해서 일단은 아무 말도 안나오는 가운데, 그 손을 치워야 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손으로 그 손을 밀어내고 상대방의 얼굴을 조우했다.
분명 화를 냈어야 했다. 그렇지만 황당하고 당황한 내 입은 수 만가지 언어들이 떠오르는 머리와는 달리 "어.."라는 짧은 말만을 뱉어냈을 뿐이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상당히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내 행동과 말에 알수없는 제스쳐로 반응한 채로 그 사람은 다시 내게 기대서 잠에 들었다.

버스에서 피로에 지쳐, 혹은 술에 취해서 아주 낯선 사람의 몸에 기대는 건 늦은밤 버스에서 간간히 있는 일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주 추웠던 어떤 겨울날 나 역시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누군가에 기대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바로 일어나서 사과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애썼었다.
그런데 이건 뭘까.
술에 취하면 여러가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마음이 없는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실수"는 나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기분좋은 술기운은 싸그리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은 사과할 마음도, 최소 비킬 정신도 없는것 이었다.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20살 이후에 몇번의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가...
화를 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상대는 지금 안하무인이다.
화를 내면 위험하지 않을까? 버스에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결국 반복되는 고민 속에서 얼어붙은채로 있다가 내가 도착해야 할 버스정류장이 왔다.
내 모습을 보아 그 남자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어떤 커플에게서 내가 홀로 내리자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맞으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수치스러운 감정을 어찌해야할지 모른채로 길거리를 서성거렸다.
내가 멍청했던 것일까. 왜 화를 내지 못했을까.

집으로 와서 오늘의 경험을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았다.
인터넷을 보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의 이야기가 올라오면, "그럴만한 행동을 했다" 혹은 "그 남자의 행동을 이해할만 하다"라는 글들을 자주 조우한다.
처음 성추행 경험을 한 뒤, 나는 내 주변 지인들에게 이것이 성추행인지 아니면 내가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몇번이고 묻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일종의 자기 검열이 생긴 것이다.
그 상황에서 나는 다시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진 것이다.
나는 그 부적절한 행동에 화를 냈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의 수치심도, 후회도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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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08 01:21
수정 아이콘
제 친구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경찰에 신고했고 몇 달 후 합의금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취했어도 정상 참작은 안되더군요.
14/03/08 14:58
수정 아이콘
새삼스럽게 되돌아보니 신고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네요. 흑흑...
지나가는회원1
14/03/08 01:42
수정 아이콘
저는 남자인데도 성추행을 한번 당한적이 있습니다. 술취한 남자가 어깨부터 손을 대는데.. 제가 남자고 등빨도 좀 있고, 할 말은 잘 하는 성격인데, 0.5초동안은 얼어서 아무것도 못하더라고요. 물론 0.5초후에 욕하면서 딴데 갔습니다.
그런데 0.5초가 되게 수치심을 주더라고요. 주변에 성추행 당하는 여자들 상황을 한번에 이해해버렸습니다.
14/03/08 15:00
수정 아이콘
짧은 순간인데 정말 기분이 영 좋지 못하죠. 그리고 참 그런 상황에서 당황스럽기 때문에 정신이 말짱해도 무력해진다는 게 참 묘합니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제는 잘 대처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일을 겪으니 또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윤주한
14/03/08 01:47
수정 아이콘
{}
14/03/08 15:01
수정 아이콘
네. 위로해주셔서 감사해요.
MLB류현진
14/03/08 02:19
수정 아이콘
놀라셨겠네요...힘내시길..
14/03/08 15:01
수정 아이콘
힘내고 있습니다 하하... 버스를 안탈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14/03/08 02:19
수정 아이콘
님이 그 순간 얼어붙었던 건 멍청했던 게 아니라, 쇼크에요. 저도 비슷한 경험 있어요. 정말 얼어붙어서 화를 낼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무기력했던 게 나중에 너무 화가 나고 수치스럽고 그랬어요. 십 년 전에 당한 일인데 지금도 잊지 못했요.
14/03/08 15:04
수정 아이콘
성추행은 물론 가해자의 처벌이나 재범 방지도 필요하긴 한데, 그런것보다도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어떻게 하는지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그 트라우마들을 고스란히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오쇼 라즈니쉬
14/03/08 02:38
수정 아이콘
윗분들도 말씀하셨지만 그런 상황에서 쇼크로 얼어버리는 여성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 뻔뻔스럽게 성추행을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피해자가 아닌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분노로 몸이 떨리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때 상황을 다시 상기하면서 많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취한척하고 했든, 취한 걸 이용해서 했든, 정말 취해서 몰랐더라도 그렇다면 취해서 저런 행동을 할 때마다 목돈이 깨져서 다시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신고에 신고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지난 일에 심심한 위로 말씀 드릴게요...
14/03/08 15:09
수정 아이콘
정말 신고를 했어야 되는 일이었건만!.... 생각해보면 너무 허둥지둥 했던 것 같아요.

다시 기억을 하는게 그렇게 기분 좋은 과정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성추행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식 중에 하나가 내가 경험한 일을 많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거든요.
그 과정을 통해 나만이 이러한 상황을 겪은게 아니라는 것, 누군가 같이 분노하고 위로한다는 것들이 무척이나 이 상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여담이지만 다 글을 쓰고 난 뒤에 다시 읽어보니 무척이나 개인적인 글이 된 것 같아서 글을 지울까도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마침 국제 여성의 날입니다.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글로서는 나쁘지 않은 시작인 것 같아서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오쇼 라즈니쉬
14/03/08 21:20
수정 아이콘
전 예전에 기분나쁜 일이 있었는데 그날 세 번 반복해서 얘기하다가 결국 감정 폭주로 애인이랑 헤어지는 기염을 토한 적이 있네요... 크크
좋은 의미를 찾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가정맹어호
14/03/08 06:46
수정 아이콘
10대후반때 지하철에서 남자한테 성추행 당한적이 있어요.
그외에도 20대 초반때 여자한테 성추행(만짐)당한적이 더 많기는 해요.
그런데 여자쪽은 추행을 했다는 생각이 없더라구요.
기분 나쁘긴 둘다 나빴습니다. 어떤게 더 나쁜건 둘째 치고요.
14/03/08 15:17
수정 아이콘
성추행은 물론 여성이 당하는 빈도수가 더 많겠습니다만, 사실 많은 남성 성추행 피해자들도 있죠.
여성 성추행 피해자보다도 남성 성추행 피해자가 여러가지로 이야기를 토로하기 힘든 상황이 많다는 점에서 참 여러 장애가 있습니다.
나는 수치심을 느끼고, 분명 이 행동은 성추행이 맞는데 "남자가 그정도 가지고"라는 언어로 '견뎌 낼만 한 일'로 치부되기가 일수죠.
보통 여성이 이런 일을 겪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 인식이 어느정도 정립이 되어있기에 호소할 곳도 있고, 위로를 받는 편인데, 남성 피해자에게는 "뭘 그런거 가지고 호들갑이냐",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라는 식으로 묵살되고는 하죠.
가정맹어호님도 경험하신 일들에 힘드셨겠네요.
asdqwe123
14/03/08 10:46
수정 아이콘
아오... 제 동생이 저런짓 당했다고 생각하면 피꺼솟이네요. 금마한텐 유인촌의 명언을 들려줬어야했는데..
14/03/08 15:20
수정 아이콘
통계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과반은 성추행을 경험한다고 하죠.
주변사람들이 화를 내주는 것도 소중한 일이긴 한데, 정말 그 상황에서 당한 내가 확실하게 행동해야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단 생각이 듭니다.
저도 욕이나 해주고 내릴 걸하는 아쉬운 마음이. 하...
팅커벨:3
14/03/08 15:51
수정 아이콘
비슷한 경험있어요..
평소엔 말도 많은데 그상황엔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말도 못하겠더군요.
어..어.. 하는말밖에 못했네요
14/03/09 00:14
수정 아이콘
그러게요. 저도 평소에 말로 지는 사람이 아닌데, 저런 상황에서는 문제 해결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더라구요.
예전에 친구가 저런 상황에서 딱부러지게 이야기하는거 보고 '아 나도 저렇게 해야지.' 했었는데, 역시 마음만 가지고는 힘들다는 현실을 경험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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