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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2/17 17:05:21
Name sungsik-
Subject [일반] 음대생 동생 이야기 7


내가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동생이 유학을 오기가 참 많이 힘들어져 버렸다.
내가 다니는 대학은 너무나도 싼 편이라 부산에 있는 학생이
서울의 대학을 다니는 것과 비슷한 정도지만,
동생의 음대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유학을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집 형편으로 유학이 가능한지가 물음표일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역시 그 돈보다 더 동생의 앞길을 막는 건 역시 동생의 의지였다.
내가 유학을 와 동생이 그 중간에 어떻게 무엇이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간간히 메신져로 얘기를 해보면 동생이 음악에 거의 포기상태인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동생 역시 자신이 음악을 포기한다는 걸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지
많이 돌려서 말하는 것 같았다.
동생의 음악적 재능 역시 고등학교 때의 그것이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동생이 몇 개월전 나와 메신져로 대화를 했다.
대화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피아노를 그만두고 공연 기획을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아는 인맥도 있고,
피아노로 자신이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진 않고 그렇다고 음악을 놓고 싶진 않으니
음악에 관련된 공연 기획을 해보고 싶다고 하는 거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동생에게 피아노란
동생 인생 전체를 의미하는 거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었다.
하지만, 막연한 꿈만을 바라보기엔 동생도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었고
정말로 현실적인 나이가 되기도 했다.

동생의 의견은 이런 것이었다.
주위에 피아노로 나름 성공했다는 선생님들을 봤을 때
그들의 모습이 과연 내가 꿈꾸던 모습인가.. 하는 것이라는 거다.
실제 음악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학까지 갔다와도 음악적으로 성공하긴 힘들다는 거다.
거기다가 결국 음악은 연주이고, 자신이 아니라도 뛰어난 연주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거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생은 좋은 음악 강사도 되지 못했다.
자신이 잘 연주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능력은 분명히 다른 것이고,
그런 부분에서 동생은 좋은 음악 선생님은 되지 못한 것이었다.


솔직히 오빠 입장으로 할 말이 없었다.
난 피아노를 치는 동생을 바라지만, 내 바람 때문에 동생의 인생을 간섭할 순 없는 것 아닌가...

결국 동생은 어정쩡한 영재였다.
영재라하면 좋은 의미로 들리겠지만, 음악에선 천재만이 남는 세계이다.
보통 사람 이상의 재능으로 좋은 연주를 할 순 있지만, 남들을 위해 좋은 연주를 해주는 건 그 위의 천재들이다.
그렇기에 음악만 하면서 살 순 없는 거다.
그렇다고 음악을 쉽게 단념하기엔, 가지고 있는 재능이 너무나도 아깝다.
이도 저도 아닌 천재도 일반인도 아닌 중간에 끼인 상태.
그게 동생의 위치였다.

고등학교 땐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재능이
지금에 와선 오히려 아주 큰 짐이 되어버린 그런 순간이었다.


난 결국 동생의 입장을 존중해주고 간단한 조언만 해 주었다.


넌 지금까지 모든 걸 실패없이 너무 잘 해왔다.
왜냐하면 네 분야에선 네가 상당히 재능있었던 입장이었기에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 있었던 거다.
하지만, 이제 넌 다른 길을 택하고 그 길을 택하면
넌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 어쩌면 일반인도 못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다.

노력했을 때 될 수도 있다가 네 위치였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수도 있다. 라는 위치가 되어버리는 거다.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큰 거고, 너도 드디어 재능이 없는 사람이 어떤 건지 알게 된다.
그 길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다.
남들이 했을 땐 쉬워보이겠지만,
그들은 네가 보지 못하는 무수한 노력을 해 겨우.. 간신히 그 위치에 오른 거다.

그걸 명심하고 새로운 도전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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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가 되어가네요.
사실 1-3으로 이야기가 끝났으면 참 멋있는 글이 되었을 텐데,
정작 거기엔 제가 말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실제로 동생이 고등학교 땐 꿈이 확실한 동생이
거기에 재능까지 있는 동생이 정말 너무도 많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실이란 게 다가오니 참 많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 재능이란 건 어떻게 보면 참 고문일 수도 있구나..라는 걸 동생을 보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여하튼 다음 글이 마지막이 될 거 같고요.

초반엔 그렇게 무겁지 않은 글이었는데,
글을 쓰다보니 무슨 소설 형태가 되어버려서 상당히 진지하고
읽기 무겁게 되어버렸네요-_-;

형태는 소설같지만, 100% 실화이고, 글을 읽어본 지인들은
동생의 매력이 하나도 안 나타난 글이라고 구박을 주더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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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end
09/02/17 17:12
수정 아이콘
잘 보고 있는데요,충분히 매력적인데 다 표현이 안된거라면....대단하단 말밖에...
동생에 대한 애정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야기의 결말이....비극적이 될까 두렵네요....극적인,매우 극적인 대반전이 있었으면....좋겠습니다.
(학교다닐때,동아리룸 창문으로 음대생들 발성연습이나 관악기 연습하는 모습을 볼 때면 딴 세상 아이들...이런 기분이었는데,이 이야기가 왠지 모를 향수에 젖게 하기도 하네요.동아리방에 뻘쭘하게 들어서던 음대 신입생의 모습도 떠올리고요.물론 그 음대생은 한달을 버티지 못한채 동아리를 나갔습니다만...우리 모두 남의 세계 아이인줄 알았거든요.)
09/02/17 17:18
수정 아이콘
동생분의 재능을 모르는 입장에서 볼 때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닌 길에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싶습니다.
상신유지
09/02/17 17:20
수정 아이콘
저도 제 동생 얘기 적을까요.
제 동생 산간오지에서 공무원 생활하고 있습니다.
동생 발령나는 날 이삿짐 날라주는데, 와 진짜 눈물이 핑 돌데요.
거긴 밤에 범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꺼 같더군요.
불쌍한 것 ㅠ 다 오래비가 모잘러서 그렇다.
Minkypapa
09/02/17 17:34
수정 아이콘
제 동생도 미술에 재능있다고 해서 미대 대학원/짦은 유학까지 했지만, 결혼하고 나니까 꿈이고 뭐고 애 셋낳고 완전 퍼져버렸습니다.
현실이란 벽은 항상 당당히 마주칠수만은 없게 되어있지요. 다른 길이라도 다른 꿈이 될수 있으니 늘 격려를 잃지 마세요.
라이시륜
09/02/17 17:42
수정 아이콘
동생분의 선택이 좋다고 전 봐요.
한계를 느끼면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고, 피아노보다는 공연 기획(음향 파트) 또한 좋은 길이 될 수 있겠죠. 또 완전히 다른 길인 것도 아니고요.
언젠가 동생분이 참여하신 공연에 대한 소식이 올라오면, 보러 가겠습니다.
꼭 공연이 아니라도 어딘가에는 동생분의 길이 있으리라고 믿어요.
멀리서나마 응원하겠습니다^^
09/02/17 20:18
수정 아이콘
그동안 띄엄띄엄 글을 읽다가 오늘 1편부터 7편까지 정주행했습니다.

글 저장해놓고 힘들때마다 한번씩 읽을 생각입니다.


저 역시 분야는 다르지만 영재라면 영재였는데 그나마 직접적으로 '천재'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에서 벽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요즘 일을 하면서 처음에 '내 능력이 정점을 찍기에는 부족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내에서 뭔가를 이뤄내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다가

그마저도 최근에는 내가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가 들고 있던 중입니다.


sungsik-님 동생분 이야기를 보니까 중고등학교, 그리고 학부때 열정이랑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제 몇년전이 생각이 나면서 그때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상과 꿈을 포기하고 사는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여하간 좋은 글 계속 써주셔서 감사드리고, 혹시 동생분이 아직 졸업을 안하셨다면 연주회 꼭 가보고 싶네요.

제가 졸업했던 대학교이기도 하고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학교이기도 해서 말이죠 :)
마동왕
09/02/17 20:5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천재든 영재든 재능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한 번 무언가에 미쳐본 동생분께서 더 좋은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동생 분의 매력을 좀 더 살린다면 동생의 음악적 재능을 더 부각하고, 마지막 자신의 음악을 포기하는 에피소드를 두개 정도 만들어서 외적, 내적 갈등을 부각한다면 더욱 (소설로서)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훨~씬 작위적인 느낌이 났었겠죠.;;; 조금 밋밋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인 이야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천재 뿐인, 그리고 인생의 모든 부분이 필연적인 영화 속 주인공에 비해,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더 지루하고 고단한 법이니까요.
Minkypapa
09/02/17 22:55
수정 아이콘
노력하는 재능이 제일 무섭고, 이 재능을 가진 사람이 천재죠.
살아보니 한가지만 잘하면 일단 세상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그 한가지를 끊임없이 노력할려면 반드시 좋아해야합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가를 일찍 찾아내는것이 일반적인 성공의 포인트입니다.
재능만 믿고가는 진짜 천재는 성인이 되면 아무데도 없습니다. 아참, 운은 별개입니다.
나는 그냥 걸어
09/02/18 14:31
수정 아이콘
진짜 천재는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너무 천재라서 하기만 해도 잘되서 노력도 자연스레 하게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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