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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1/13 09:03:54
Name sungsik-
Subject [일반] 적벽대전은 어떤 전쟁인가...


며칠전에 제갈량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몇몇  분들이 열심히 토론하시더군요.
저도 삼국지 사이트에서 오래전부터 활동했었고 많은 토론을 했지만,
당시 저도 그랬든 국내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삼국지는 여전히 역사라기보다는
팬클럽, 혹은 누가누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나. 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토론하실 때 정사등의 자료찾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군요.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근거없는 주장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또 하나가 적어도 한국에서 삼국지는 이제 삼국지 연의의 영향력보다는
코에이의 삼국지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더군요.
뭐, 중국이나 일본에선 손오에 대한 연구가 관심을 모으고있다. 이런 의견도 있으시던데,
어디서 들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는 있겠으나
최소한 개인적인 경험으론 한국만큼 삼국지에 관심있는 나라가 없고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삼국지에 대한 연구를 해도 한국보다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삼국지 매니아가 최고 수준이라는 얘기지요.

그렇게 뛰어난 수준을 보이는 한국 삼국지 매니아들이지만,
토론의 범위라는 게 언제나 한정됨을 느낌니다. 삼국지를 게임이나 소설보다
역사로서를 더 관심있어 하시는 소수의 분들을 빼고는 당시에 큰 영향력이 없던 인물에
너무 큰 의미와 분석을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여튼 글을 삭제하고픈 욕구를 불어 일으키는 리플들이 많았지만,
소수의 분들이라도 잘 보셨다길래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번엔 적벽대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합니다.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중에서 적벽대전이 어떤 전쟁인지 모르는 분들은 없으실 겁니다.

연의만 보신 분들은 방통의 연환계와 제갈량의 남동풍에 의해 조조군이 대패한 전쟁으로 알고 계실테고,

정사등을 좀 보신 분들은 기록에 많이 남지 않아 몇몇 사료로 추측할 수 밖에 없는 전쟁,
위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료라 많이 축소되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전쟁,
제갈량의 남동풍이나 연환계 같은 건 없었으며, 역병과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위군이 대패해
삼국 형립의 기본을 만든 전쟁.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창천항로를 보면 손권이 조조에게 반기를 든 전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더군요.


이 건 모두 맞는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와 토론에 의하면 이 이상의 무엇도 없고
크게 틀린 것도 없는 게 정설입니다. 다만, 기록이 많지 않아 소수의 자료로 추리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죠.


그런데 적벽대전은 우리가 쉽게 간과해버리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전쟁이라 생각합니다.


적벽대전은 원소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조조가 중원을 장악하고 남하하기 시작하면서 시작합니다.
실제 후한말에 가장 중요한 전쟁은 누가 뭐래도 당연히 관도 대전입니다.
당시 판세가 관도대전의 승자가 패권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조조가 원소에게 승리해 중원의 패권을 잡은 시점을 보겠습니다.
당시 남은 세력은 정확하게 손권, 유표, 유장, 마등, 장로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은 손권과 유표였고,
조조의 중원장악과 동시에 항복해야한다는 것이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죠.
유표는 유표의 사망과 함께 유종이 뒤를 이었으며 바로 투항하려 했고,
유표의 밑에 있던 유비는 도망치기 시작하죠.

손권의 경우에는 주유와 노숙정도만 제외하고는 모든 신료가 투항을 손권에게 제의했습니다.
손권도 제갈량의 외교가 있기 전까진 항복에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고요.

그럼 남은 쪽은 마등, 장로, 유장인데
유장은 유비에게도 장악당할만큼 세력이 유약했으며, 마등과 장로는
손권과 유비와 대립할 당시의 조조에게도 장악당한 세력이었습니다.


역사가 적벽대전 없이 이렇게 흘러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조에 의해 후한말이 정리가 되고 통일이 되는 것이지요.
통일이란 단어가 적합하지 않지만, 조조는 중국 전 대륙을 장악한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적벽대전의 발발과 조조군의 대패로 조조는 전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그의 가문은 대륙의 통일을 하지 못하게 이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적벽대전의 의의는 삼국 형립의 기초를 세운 전쟁뿐만이 아니라,
조조가 생에 중국 전역을 통일할 기회를 놓치게한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조조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힘드나
아마 제가 조조였었다면 이 적벽대전이 가장 뼈아프고 쓰라린
가장 큰 기회가 날라간 전쟁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더불어 생전에 제갈량이 누군지 알았다면, 그만큼 미운 인물도 없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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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1/13 09:10
수정 아이콘
조조가 적벽에서 승리하고 삼국을 통일했다면 5호 16국 시대같은 것 없이 바로 한족 주도하의 통일 정권이 수백년 갔겠죠. 북방 유목민의 기나긴 전성시대, 나아가 고구려의 수백년에 걸친 안정적인 정권 역시 적벽대전과 연관이 적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조선은 이미 한나라한테 한방 먹은 전례가 있고, 고구려도 잘게 찢어진 5호16국한테도 털리던 시절이었으니 말이죠.

적벽대전 없이는 어쩌면 우리나라의 존재 자체가 없었을지도.
sungsik-
09/01/13 09:17
수정 아이콘
적벽대전 당시에 삼국이란 건 없었고 확대해석으로 볼 수도 있지만, 흥미롭고 가능성 있는 가설이긴 하네요.
그래도 조조였다면 정복욕보다는 무너진 나라의 정비와 재건에 더 힘을 썼을 거 같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긴 하지만요.
shadowtaki
09/01/13 09:32
수정 아이콘
적벽대전의 결과가 위의 승리로 끝났더라면 진나라는 없었을지 모르며 위나라의 수명이 그리 짧게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즉, 한의 몰락과 위의 건국이 조조대에서 일어났다면 훨씬 견고한 모습의 국가가 건국 되었을 것이다 라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아쉽게도 중원을 장악하지만 남쪽 정벌의 첫 걸음에서 그것도 거의 모든 군사력을 동원한 전투에서 참패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면서 합비/형주/한중 이남의 정벌이 십수년에서 수십년 뒤로 미루어진 것, 이것이 적벽대전의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09/01/13 09:41
수정 아이콘
제가 아는 사람들은 삼국지 이야기를 할 때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곽가가 적벽대전까지 살아있었다면...' 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곽가라는 인물이 너무 일찍 요절을 했고, 연의밖에 읽지 못한 저는 곽가라는 인물이 그렇게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제 주위사람들의 이야기대로 적벽대전이 지금의 양상과 달랐을까요?
09/01/13 10:12
수정 아이콘
예전에 읽은 책에서 나온거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조의 군사적인 성공에는 곽가가 항상 같이 했습니다.
곽가가 죽은이후로 조조의 군사적인 성공은 마등정벌 뿐이라는...내용을 읽은적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확신이 반반 이네요..
09/01/13 10:33
수정 아이콘
피나님// 연의도 생략 안하고 제대로 된걸로 잘 읽어보시면 곽가가 뛰어난걸 알수 있습니다.
SNIPER-SOUND
09/01/13 10:35
수정 아이콘
와우 !! 저번글도 그렇고 이번글도 내용이 너무 좋네요.

삼국지를 10번은 읽었는데(반은 만화삼국지...) 띄엄띄엄 읽었는지 남는 기억이 거의 없는 저한텐 이런 분석글이 너무 신선해요!!
09/01/13 10:47
수정 아이콘
곽가도 사실은 삼국지연의가 약간 띄워준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대로 중국은 남쪽지방을 먹느냐에 따라 통일여부가 갈렸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조시대가 된적이 있듯이..^^

통일왕조를 열지 못한 계기가 되었던 적벽대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대첩이죠.

거기에는 제갈량이라는 유능한 외교가의 역할이 있었구요.
한 지방의 토호(?)에서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던 거죠.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조직의 정비하지 못한채 혼란인 왕조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09/01/13 10:50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장에 좀 딴지.조조는 적벽에서 제갈량에 패한게 아니라 주유에게 패한거죠.정사는 물론 연의에서도.
RedOrangeYellowGreen
09/01/13 11:00
수정 아이콘
본문의 서론부분이 다분히 저랑 레인저님의 논란에 대한 것이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당시에 조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본문관광을 한 점은 우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조운 이야기하느라 뒤에 제갈량과 그 사후 촉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은게 많았지만 쓸 엄두가 안나더군요) 그 땐 미처 토론을 하느라 미처 이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아무튼 서론에 대해 조금 더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팬클럽, 혹은 누가누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나,게임이나 소설보다 역사로서를 더 관심있어 하시는 소수의 분들을 빼고는 당시에 큰 영향력이 없던 인물에 너무 큰 의미와 분석을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부분에선 쓴웃음이 나네요.
조운과 호위무장,그리고 그 직책에 대한 부분은 정말 내로라 하는 삼국지 초고수들 (삼국지와 배주 및 각종 사료,연구 문헌들을 직접 찾아 완벽하게 번역할 줄 알고 그 의미를 분석할 줄 아는 분들. 흔히 우스개소리로 중궈라고 하죠 -_-;)도 여러차례 논박을 하고 장문의 글로도 이야기가 오갔던 부분입니다. 어떤 삼국지 커뮤니티를 다니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운에 관한 떡밥은 고수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가볍게 넘어가는 부분이 아닙니다.. (김운회 교수가 관련되면 폭발)
아무튼 sungsik-님의 글과 삼국지에 대한 접근방법이 존중받길 원하신다면 sungsik-님도 다른 삼국지 매니아들의 논란이나 관심을 마치 '역사를 게임처럼 생각하는 자세'로 폄하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코에이 능력수치 이야기를 한다고, 조운이 호위무장인지 아닌지 논란을 벌인다고 해서 삼국지를 겉핥기만 하는것도 아니고 팬클럽,혹은 게임처럼 역사를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AstralPlace
09/01/13 11:02
수정 아이콘
곰님// 중간 과정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으로 보이는 정사 사료를 보더라도 손권이 항복을 안하고 항전을 하게 한 것에는 주유의 힘 뿐만 아니라
유비와 제갈량의 힘이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특히 유비와 손권을 엮는데 제갈량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요.

결과로는 조조가 주유에게 패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제갈량의 승리'라고 봐도 될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낭만토스
09/01/13 11:02
수정 아이콘
하긴 우리나라와 중국은 항상 반비례였죠. 중국이 통일왕조를 이루고 강성해지면 우리나라는 굽신굽신 약해졌고
중국이 분열되어 지들끼리 치고 받으면 그만큼 우리쪽에 신경 쓸 틈이 없어서 우리나라는 그 틈을 타 강성해졌죠.
09/01/13 11:04
수정 아이콘
손권은 나름 야심가였고 주유는 손책과 함께 창업한 인물이며 당시 오의 군권은 주유에게 있었으므로 제갈량이 없었어도 결국 항전했을거라 생각합니다.
RedOrangeYellowGreen
09/01/13 11:15
수정 아이콘
Jiny님// 그건 곽가의 존재 떄문이라기보다 (곽가가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던 건 사실입니다만 정욱과 가후도 이미 적벽대전에 반대하고 있었죠)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큰 정복사업을 자주 벌이지 않은 이유가 더 큽니다.
조조의 행적들을 보면 보통 정복 후 내실을 다지는 기간을 꼭 두는걸 알 수 있는데 인생의 후반부로 갈 수록 안정과 내실쪽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행보일 수도 있긴 하지만요.
실제로 관우의 북진즈음 해서 각종 반란과 내부적,정치적 반대 새력들이 고개를 들기도 했구요. 대부분 쉽게 진압되기도 했었고 관우역시 패퇴하고 말았지만 표면적이든 근본적이든 정치 군사적으로 안정을 꾀하기 위해 천도를 구상하는 계기가 되죠.

더불어 적벽대전은 사실 전쟁의 규모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많은 사료가 없어 자세히 알기 힘들지만
무제기나 주유전으로 미루어 볼 떄 손-유 연합군에서 유비군이 군세상으로,(보통 주유와 유비의 총군세를 3만-2만으로 추측합니다) 전투 내외적으로도 많은 역할을 한걸로 생각됩니다.
sungsik-
09/01/13 11:55
수정 아이콘
제가 말하고픈 건 조운에 관해선 쉽게 넘어가고 아니고가 아닙니다. 한국에선 조운의 팬이 많아서
삼국지 전체에 비중이 적은 조운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란중 하나인 것까지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사라졌지만 제가 융중이란 곳과..이름은 까먹은 어디에서 5년전까진 상당히 많은 활동을 했었는데,
그 때 조운에 대한 토론과 제 글의 리플로 님들이 했던 얘기가 똑같았다는 겁니다.
5년간이나 더이상 발전없이 계속 하던 얘기만 하고 또하고 하는 것에 씁쓸할 뿐이고요.

여담으로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저도 조운 팬입니다.
星夜舞人
09/01/13 11:57
수정 아이콘
다 제외하고, 조조가 한전투중 적벽대전만큼 무개념으로 준비하지 않고 싸운건 처음인듯합니다. 또하나, 사가들의 기준으로 위가 적벽대전에 투입한 전력이 22만이고 유비와 손권이 합쳐 5만정도라고 합니다. 정말 적벽대전에서 위에 엄청난 희생을 동반한 싸움이라면, 그당시 기준으로 위에서 총병력을 적벽에 투입한것이고, 패퇴이후의 유비의 북진과 더불어 촉한의 공략이나 조조의 안정위주의 정책이 이해가 갈수밖에 없습니다. 위엔 병력이 없으니까요. 결론은 위에서 적벽대전에서 승리했더라도 그만큼 희생이 컸더라면, 오의 호족들의 반란이 몸살을 앓고, 유비로써는 (어차피 유비는 적벽의 상황에 맞춰 행동했으니, 오군이 지더라도 병력의 손실이 없었을것이라고 봅니다) 적벽대전이 있더라도 촉을 차지하는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을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조조가 병력손실없이 적벽에서 승리했더라면, 오의 호족의 제압을 한다 하더라도 전선규모가 넓어져서, 오의 내정을 안정시키는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을 테지만, 유비를 압박하는데는 크게 지장은 없었을것이라 봅니다.
09/01/13 12:00
수정 아이콘
정사에서는 적벽에서 조조에 맞서 싸운게 유비, 주유로 적혀 있지 않나요?

실제로 현덕이 적벽에서 총대장급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sungsik-
09/01/13 12:02
수정 아이콘
그리고 곰님, 당시의 손권은 그리 큰 야심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막 군주자리에 올랐을 뿐이었고, 실제로 한조밑에 가장 오랫동안 붙어있었죠.
게다가 손권 밑에선 주유와 노숙 이외에는 모두가 항복을 권고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주유와 노숙은 손오에서 상당히 영향력있는 인물이지만,
당시에 손권진영에선 막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어린 영재같은 인물들이었죠.

유비와의 동맹없이 그 두 사람의 힘으로 모든 대소신료들의 일치된 주장을 손권이 거부하고 항전했을지는
의문점이 남는 일이지요.
물론, 유비와의 동맹을 성사시킨 일등공신은 제갈량이었고요.
RedOrangeYellowGreen
09/01/13 12:03
수정 아이콘
sungsik-님//
조운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죽은 사람 팬 해서 뭐합니까?)

삼국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해서, 5년동안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 인물이라고 해서 그 인물에 대한 토론이 비생산적인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실상 본문 sungsik-님의 글도 삼국지 커뮤니티 어디를 가도 몇년동안 비슷하게 나오고 있는 이야기들이니까요. (진짜 사료분석과 면밀한 번역, 고증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이상, 팬수준에서 삼국지를 논하는건 결국 돌고 도는 이야기의 반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위 댓글에서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2가지입니다.
먼저 본문관광으로 제갈량에 대한 토론을 상당히 가렸다는 점에 대한 죄송함과 사과, 그리고 삼국지를 바라봄에 있어서 조운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관점과 관심거리에서 벗어난 것을 '게임,팬클럽'으로 폄하하지 마셨으면 좋겠다는 점 2가지입니다. (삼국지 초고수들을 운운한 건 조운문제가 단지 코에이 스탯놀음이나 좋아하는 조운빠들의 떡밥만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기 위함이었구요)
jinhosama
09/01/13 12:07
수정 아이콘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삼국지에 대한 연구를 해도 한국보다는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뭘 가지고 확신하나요?
한가지 명확해야 할것은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입니다.
한국에 있는 매니아수만큼 중국에는 삼국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서늘한바다
09/01/13 12:07
수정 아이콘
근데 정말 조조대에 통일이 이루어졌음 강대한 중앙집권적인 나라기 이루어지고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을까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요?
낭만토스
09/01/13 12:10
수정 아이콘
음 글쎄요. 전 손권도 연의의 피해자중 한명이라고 봅니다.
실제 많은 분들이 수비에만 급급했던 소심한 군주정도로 평가하시는데 손권도 사실은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실제 조조도 이런 말을 했죠. '아들을 낳으면 응당 손중모 같아야 한다'
여기 댓글에 길게 쓰기엔 지금 너무 졸리고 새로운 글을 하나 쓰고 싶네요.
sungsik-
09/01/13 12:13
수정 아이콘
중국의 역사이지만..
제가 중국에까진 살지 않고 미국에 살아서 중국인 친구들이 꽤 많은데,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삼국지 시대라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여 옥저. 같은 시대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부여 옥저보다는 일제침략기나 625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듯이
중국인들도 그렇더군요.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지 그게 좀 더 강한 느낌도 들고요.
여튼 전 사실 삼국지 이외의 중국 역사를 몰라서 잘 몰라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유해야할진 모르겠네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거였고 사실 이 부분을 넣었다가 구질구질해서 지웠던 겁니다.
그래서 성급한 일반화 오류를 언급했던 거고요

그런데 학자들의 사이에선 잘 모르겠네요.
이 부분은 제가 간과한 거 같습니다. 사과드립니다.
星夜舞人
09/01/13 12:20
수정 아이콘
서늘한바다님// 글쎄요? 조조대에 통일이 이루어질수 있을까라는데도 의구심이지만, 이루어 졌다해도 통일의 개념을 오와 위로만 한정시켰을가능성도 높습니다. 유비와 더불어 중국 남서쪽에 있는 세력자체를 배제하구요. 실제 중국역사상의 통일을 그정도 영토로만도 천하가 평정되었다라고 했던 나라들도 많으니까요. 다만, 조조가 천자에 올랐더라도 (천자에 올랐을 것이라도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실제 2대황제쯤에 중국을 안정화시키는데 엄청난 힘을 쏟았으리라 봅니다만, 그건 알수가 없는 일이겠죠. 제가 보기엔 적벽대전자체가 삼국통일을 가속화 시킬것보다, 이겼더라도 좀더 많은 혼란이 일어났을것이다라고 보는 사람중에 하나입니다.
나이트해머
09/01/13 12:25
수정 아이콘
곽가는 일찍죽어 과대평가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죠. 곽가 이후에도 적벽대전의 패배만 있을 뿐 계속 정국 주도권을 쥐고 나갔습니다. 손권에 대해 거진 5년여에 걸친 지속적인 공세로 결국 217년 유수구에서 명목적이나마 항복을 받아냈고, 군사력 하나만은 위협적이었던 군벌집단, 마초/한수가 이끄는 관서 팔부군도 아작을 냈으며 유비에 대해 최소한도의 견제적 의미로 한중도 점령했습니다. 한중전투때도 허창의 화재와 후음의 난이 아니었다면 선수를 잡고 움직였을 테고, 제아무리 유비라도 쉽사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겁니다.
조조의 모사진(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중에서 그 구멍을 메꿀 수 없었던, 진정한 타격은 순욱의 죽음입니다. 세력의 목표와 비전, 대전략 부분에서 유일하게 조조가 상담이 가능했던 순욱이 212년 죽게 되면서 장기적 전략 목표 수립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때문인지 이후의 조조의 정벌은 천하 통일이 목적이라기엔 소극적인 성향을 띄고 상대적으로 장기화됩니다. 양주 군벌 토벌에 4년, 손권 제압에 5년이 걸렸죠. 여기다가, 내정부분을 완벽하게 커버하고, 원정군의 후방 지원을 훌륭히 해내던 순욱이 죽으니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원정이 불가능해집니다. 공격해서 우위를 잡아 놓고도 내실을 다지기 위해 돌아가는 게 자주 연출되지요.
조조의 평가도 제일 높습니다. 다른 모사진들은 식읍 몇백호 단위에서 노는데 혼자 2천호를 받고 있죠.
Eternity
09/01/13 12:27
수정 아이콘
sungsik-님// 흠.. 글쎄요. 적벽대전 당시 손권은 손책의 가업을 떠맡은지 오래되지 않은데다가, 여러 호족들의 등살 때문에 제대로 뜻을 펼 수 있는 여지가 넓지 않은 신흥 군주이기 때문에 야심을 감추었다.. 는 해석이 조금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숙이라면 몰라도 주유는 손책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한 때로부터 군사면에서 손책을 보좌했었고, 손책의 임종시에 '안의 일은 장소에게 밖의 일은 주유에게'라고 손권에게 이야기했을 정도로 세력 내에서 입지가 탄탄한 인물 아닌지요. 당시 주유가 나이가 비교적 어렸던 건 분명히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영향력까지 적었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 않나 합니다.
sungsik-
09/01/13 12:36
수정 아이콘
Eternity // 손권에 대한 해석은 제 의견보다 더 설득력이 느껴지네요. 그래도 주유의 입지가 조조와의 전쟁을 선택하고 안 할만큼 강력했다고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손견시대부터 손가를 지켜오던 고위관직자들을 다 제쳐두고 말이죠. 주유의 입지가 강화된 건 조조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부터라고 전 생각합니다.
마동왕
09/01/13 12:43
수정 아이콘
역시 삼국지 떡밥은 대단하군요.;;
그런데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가 찾기론 "적벽대전"이라고 부를만한 큰 전투는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조조가 오쪽으로 병력을 집결시킨 후 오군과의 신경전이 일어나고, 이후 조조군에 큰 역병이 돌아 병력을 물렸다,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요. 흠..
나이트해머
09/01/13 12:45
수정 아이콘
조조가 통일을 해도 그게 과연 태평성대가 이루어졌을 지도 의문이 들긴 합니다. 서진이 중국 역사상 최악의 막장왕조였고, 그 제도 대부분이 위에서 물려받은 거란 점을 생각하면 말이죠. (덕분에 촉한 정통론은 동진에서 제일 먼저 나옵니다. '한의 정통성은 촉한이 이어받았고, 그 촉한을 멸망시킨 게 서진이므로 그때 정통성이 넘어왔다' 는 식이죠. 그러나 서진이 위의 후계자란 건 부정할 수 없기에 이 논리는 체제의 위협이 되어 사라졌던 바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 통일됐다면 역사가 바뀌긴 했을 겁니다.

덤. 조조가 손권 보고 '저런 아들 낳아야 한다' 는 건 수염보고 그랬을 확률이 높습니다. 손권이 좀 굴욕이 아니어서...
나이트해머
09/01/13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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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동왕님//그건 무제기의 내용입니다. 기전체의 특징상 개인 열전에는 그사람이 잘된 것만 적지 실패한 것은 적지 않죠.
여타 열전, 주유전이나 선주전 등 적벽대전과 연관된 여러 인물들의 열전을 같이 놓고 보면 적벽대전이 일어났고, 조조가 참패당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보병보고 길닦게 한다음 핵심 기병만 이끌고 도망처 버릴 정도.
Eternity
09/01/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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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sik-님// 글쎄요.. 손견시대부터 손가를 지켜오던 고위층이라고 하면 (잘은 모릅니다만) 정보나 한당, 황개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만.. 이들의 영향력이란 것이 손책 거병 이후로는 차츰 약화되는 추세가 아니었나 합니다. 주유의 입지가 낮았다면 아무리 주유가 주전론을 내세웠다고 해도 정보 등의 노신을 제치고 대 조조전쟁의 사령관 역할을 주유에게 맡길 수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뭐.. 그 때문에 노장들이 툴툴대긴 합니다만..;;;)

물론.. 대 조조전쟁(즉, 적벽대전)을 거치면서 주유의 입지가 비약적으로 강해지고, 확고한 것으로 다져졌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습니다만, 그 이전이라고 해도 '막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영재'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보 등의 구세력에 맞서는, 만만치 않은 실적을 갖춘 신흥세력의 지도자 쯤의 입지가 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요.
날으는씨즈
09/01/1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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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강남지방을 차지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적벽대전보다 조조와 원소와의 관도대전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로부터 중국의 부유하고 기름진땅은 화북지역,기주였고
수나라때 남조가 의외의 전과로 북조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기전까지는 언제나 중국의 중심은 북쪽이었습니다.
남송에나 가야 크게 번성하는 남쪽이 그렇게 중요한건 모르겠군요


화북 기주를 제패한 조조라면 익주, 강남은 언제가는 통일될 땅이었을겁니다.
그게 조가이든 사마염이든 말이죠
나이트해머
09/01/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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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삼국지 때 막 개발을 시작한 시기지만, 익주는 다르죠. 진나라 천하통일의 후방기지였고, 유방이 그렇게 지고지고 또지고도 결국 이겨낸 건 관중과 익주의 힘이니까요. 개발도로 따지면 익주는 이미 상당한 개발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때까지 있었던 두차레의 중국 통일시 통일을 이룩한 세력이 모두 익주를 후방 기지삼았었다는 건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리고, 관도대전이 크긴 하지만 그것 하나로 원가가 모두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고, 원가를 토벌하러 조조가 올라갔다가 발리고 돌아온 적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관도대전 단독으로는 적벽대전보다 중요하다 보기 힘들다 봅니다. 조조와 원가의 화북 쟁탈전 전체가 적벽대전보다 중요하다는 게 옳겠죠. 반면에 적벽대전은 관도대전 단독보다는 이후 세력구도에 미친 영향이 큽니다. 이점에서 두 대전을 단독으로 비교한다면 적벽대전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09/01/1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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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님//
물론 익주쪽이 후방기지, 원천기지적 역할을 한건 사실이지만, 결국엔 다 화북/기주죠.
장안/낙양/허창으로 이어지는 곳이야말로 알토란인 지역이죠. 그렇기 때문에 몇몇분들은 관도대전을 통일전쟁 비슷하게 보기도 하구요.

그리고 관도대전 이후에 원가가 모두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고 보긴 힘듭니다. 원3형제는 뿔뿔히 흩어졌고, 조조에 투항하기도 하죠.
그런면에서 실질적으로 원소 사후에 기주는 조조의 손아귀에 있었다고 보는게 옳습니다. 공손찬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워낙 후방이구요.
관도대전 이후에 조조는 기주지역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그때 '실질적' 통일은 행해졌다고 봐야 할듯 합니다.

물론 관도대전 이후 동오의 손권, 익주의 유장, 형주의 유표등이 있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힘은 강하지 않았죠.
이점에 대해서는 위엣분들이 잘 설명해주셨으니까 패스합니다.


뭐,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나이트해머님의 의견이 '틀렸다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이 점은 개인이 얼마나 동오(강남)의 땅을 비중있게 보는지에 따라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날으는씨즈님과 마찬가지로 그당시 화북/기주를 재패했다면 실질적으로 중국이 통일됐다고 보기 때문에, 관도대전이 훨씬 더 큰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戰國時代
09/01/1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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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의 준비가 부족했던 것은 애초에 조조가 [실제로 전쟁이 될 줄 몰랐다]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관도대전에서의 승리와 형주함락으로 중원을 제패한 조조는 손권에게 힘을 과시함으로써 손쉽게 항복을 얻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지 않나 싶습니다.
포커로 치자면 액면으로 스페이드 에이스, 퀸, 킹, 잭 깔아 놓고 뻥카를 친 거죠.
물론, 핸드에는 에이스 두장을 쥐고 있고, 히든카드로 스페이드 10이 들어오면 스트플로 절대승리, 안 들어와도 트리플이라는 상황을 믿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결국 히든카드는 스페이드 10이 아니었고, 상대는 풀하우스를 메이드해 버린 최악의 상황이 되고 만 거죠.
상대가 뻥카에 속아주지도 않고, 막상 오픈해 보니 내 패는 상대에게 한 끝차로 밀려서 져버린 그런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09/01/1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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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삼국지가 적벽대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봅니다.

조조, 유비, 손권 모두에게 있어서 적벽대전은 많은 것을 바꾼 전투였습니다. 뭐 관도대전 이전과 이후로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조조에게 있어서 적벽대전은 정말 천추의 한으로 남을만한 전투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조의 입장에서는 적벽대전에서의 패배로 천하통일의 꿈이 손에 잡히기 직전에 물건너갔고, 유비의 입장에서는 동맹군의 승리로 결과적으로 형주를 손에 넣게 되었고, 손권의 입장에서는 형주로 진출할 타이밍을 유비에게 놓쳐서 뒤탈을 남기게 되구요. 전 적벽대전이 손권이 아닌 손책이 살아있어서 유비와 동맹을 맺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또한 적벽대전은 조조에게 있어서 곽가가 어떤 존재였는지 의미를 두었습니다. 곽가가 조조의 진영에서 전략에 가장 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조조가 신임한 많은 모사들 중에 곽가가 가장 젋었고 또한 조조가 곽가에게 의지한 바가 굉장히 컸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적벽대전은 동오와 유비군에게 천운이 따른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겨울에 불기 어려운 동남풍이 기막힌 타이밍에 불어서 화공을 성공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뭐 조조군이 남방의 풍토가 맞지 않아 풍토병에 걸린 부분도 있으나, 화공의 성공으로 거의 반은 성공한 셈이었으니까요. 어떤 학자들은 적벽대전의 승리는 적벽에서의 수전이 아니라 오림에서의 육전을 더 높게 평가해서 적벽대전 승리의 진정한 주역은 동오군이 아닌 유비군이라는 견해도 있다고 합니다. 동오군은 적벽에서 조조군을 격퇴한 것으로 만족했고, 이에 반해 유비군은 단독으로 퇴각하는 조조군을 추격해서 더욱 큰 피해를 입혔기에 조조에게 큰 타격을 준 사람은 실제로 주유가 아닌 유비라고 평가한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소장하는 책에서는 작가가 굉장히 흥미로운 견해를 밝혔는데 조조군의 모사, 장수들과 손권, 유비군의 모사, 장수들의 연령을 비교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유비, 손권 진영에는 주유, 제갈량, 노숙 등 젊은 머리들이 많았는데 비해 조조군에는 곽가를 제외한 모사, 장수들이 대부분 연령대가 높았기 때문에 조조군이 패했다는 의견을 냈더군요. 사실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보이진 않으나,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뭐야 요건!!
09/0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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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텐 중국 샤먼대학교수(현재 고전재해석으로 젤 유명하고 인기있는 교수) 애기로 다 끝납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정사에 적벽대전은 한페이지밖에 기록이 안됐고
군사수 100만은 커녕 10만도 현실성 없다.
전염병에 의한 철수로 보는것이 맞다.
(나관중이 원나라에 열등감폭발에 만든것이 삼국지이고 한족 짜요를 위해 영웅시된것이 소인배 유비였고)

그 교수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
한대학의 초청으로 와서 깜짝놀랐다고 하죠..

공자의 제사를 중국보다 더 정성을 다해 숭배하고
중국학자들보다 유교 주자학등 해석에 더 해박하고
삼국지에 대한 탐독과 정독열기에 또 놀라고 거기다가 곧이곧대로 믿는것에 더 놀랐다...

암튼 그것이 사실이 아닐저어두
그 중국교수 역사와 문학 전통 를 객관적으로 창조적 재해석하는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좀 그랬으면
나이트해머
09/01/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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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秀님//관도대전 직후 원상, 원담이 서로 맞붙었을때 조조가 기회 노리고 기주까지 치고 올라갔다가 원상에게 박살나고 돌아왔습니다. 원상측에서 '이참에 화근을 없애버리자' 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이후 내전에서 밀린 원담이 조조에게 붙은 직후에야 겨우겨우 다시 치고 올라가 기주를 장악하죠. 원소 사후 원가 형제들이 내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조조가 하북 일대를 장악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시기의 강남과 사천지역을 동급 취급하는 건 무리라는 소리입니다. 이제 막 개발에 들어간 강남과, 일찍부터 개발되고, 두번이나 통일왕조의 요람이 되었던 곳을 같이 취급할 순 없죠. 단일 주로 파촉은 중원의 주 두어개 합친 수준의 인구수를 지닌 거대 주였기도 하고.

관도대전이 실질적인 통일이라고 볼 수 없다, 고 보는 이유는. 인구수 부분도 있고(위 : 촉 + 오 인구수 대비 3 : 2. 다수를 확보한 것은 맞지만 이정도로 통일은 아니고) 영토 부분도 있고 정통성 부분도 있죠. 특히 촉한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과거 통일왕조들의 출발점이었던 파촉땅에, 위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국가가 버티고 있는데, 통일이라기엔 좀...
나이트해머
09/01/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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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요건!!님//요즘 삼국지 토론에서 이중텐 주장 읇으면 바보취급 받습니다. 중국판 김운회죠. 돈되는 사람들만 건들고.
정사에 적벽대전이 한페지이밖에 기록이 안되있다는 소리는 별로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주유전에 한가득, 황개전에도 한가득, 선주전에도 한가득, 제갈량전에도 한가득, 오주전에도 한가득 있는데 한페이지라뇨. 직접 찾아보면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죠.
戰國時代
09/01/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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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요건!!님// 정사에 87만으로 기록되어 있는 걸 10만으로까지 격하해 버리면, 정사 삼국지 자체의 존재의미를 무시하는 발언이죠.
그 교수님의 발언은 거의 진수의 삼국지를 판타지 소설쯤으로 취급해 버리는 좀 심한 발언이라고 판단되네요.
뭐야 요건!!
09/01/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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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 전국시대//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읽은 삼국지강의 라는 책을 읽고 충격먹고 그글에 너무 맹신한 경향이 있나보군요.
삼국지강의라는 책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을 알고있었는데..김운회취급까지 받는다니
헐 더 충격~~
창해일성소
09/01/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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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요건!!님// 조조도 한족인데 왜 나관중이 굳이 유비를 치켜세워야 한단말인지? 교수직함 달고 있다고 다 옳은 주장 아닙니다. 강만수도 교수 출신인데... 전염병이라는 기술은 무제기에만 있는데 진수가 조조 체면좀 세워주기 위해서 넣은거라고 보는게 지배적이죠. 오주전, 주유전, 황개전 등을 보면 전부 화계로 잘 나와 있습니다.
창해일성소
09/01/1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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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ker_님// 적벽대전에서 만큼은 조조가 휘하 모사들 탓할 입장이 아니죠. 꽤 많은 신하들이 남방정벌 시기를 늦추라고 진언했죠. 가후는 따라가서까지 말리지만 조조가 생깠습니다.
뭐야 요건!!
09/01/1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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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일성소// 유비는 한족중에서두 황족이잖아요.. 럭셔리한.. 조조보단 낫죠 정통성면에서두. 시간나면 정사와 그 시대배경도 한번 찾아 보고 싶네요.
라이시륜
09/01/1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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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이 끝나면서 실질적으로 중국 대륙의 지배권은 조조에게 넘어왔다고 보는 편이 맞죠. 그 뒤에 있었던 적벽대전, 마초/한수전, 한중 정벌전 등은 개별 사건으로 영향은 지대하나 대국에 영향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죠. 비교를 하자면 관도대전은 항우유방의 구리산에서의 전투라고 할 수 있겠고, 적벽대전은 한무제의 흉노 정벌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양쯔강과 황허강을 잇는 대운하가 수양제 시절에 완성된 이후에 강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후에 남송시절에 완전한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됩니다. 그 전까지 강남지방은 실질적으로는 중원의 경계에서 빠져있었죠. 그게 손권의 세력권에 호족들의 세력이 강했던 이유입니다. 강남에는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 호족의 권력이 강했고, 손권 또한 '왕'이라기 보다는 '호족의 대표자'적인 색채를 지녀 조조와는 다르게 국가 운영에 단독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작았죠. 이 때문에 촉의 제갈량과는 달리 오의 손권, 육손이 북벌을 쉬이 나가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요. 즉, 당시 손권의 세력권은 중국의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파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방역시 파촉지방으로 들어가면서 세간의 뇌리에서 잊혔고, 차기 대권주자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항우가 파촉으로 유방을 밀어넣은 것이죠. 그랬던 유방이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장안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입니다. 즉, 장안이라는 지역을 점령하면서 유방이 중국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항우의 반대편에 버티고 선 용(龍)이 된거죠. 제갈량이 장안을 점령했다면 모를까, 파촉만으로 이야기하기는 부족함이 많죠.

중국 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후 명나라가 등장할 때 까지 중국 역사의 핵심은 낙양, 장안으로 이어진 중국의 중심부였고, 그 다음가는 지역은 원소가 차지하고 있던 하북이었습니다. 그 외의 지역은 사실상 부록이라고 보입니다. 때문에 관도전투가 끝난 순간 중국 대륙의 정세는 이미 결정났고, 그 이후의 전투는 단순 마무리 수준이었다고 봅니다.
나이트해머
09/01/1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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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시륜님//한무제의 흉노 정벌과 적벽대전은 비교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진나라의 중국 통일, 그리고 한의 중국 재통일 이후 미개척지역이 많다고 해도 어찌되었든 강남지역까지 평정해야 중국 통일이고, 강남지역까지가 중국이란 인식이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흉노 정벌은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이란 다른 세력과 맞서 싸운 것이고, 적벽 대전은 중국 통일을 위한 대전입니다. 둘 사이는 확실히 다릅니다. 외국과의 교전과 내전의 차이입니다.

강남의 개발이야 손권이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옳으니 그 지역은 어느정도 미개척지라 할 수 있고, 주류세력이라 하기도 뭐합니다만, 파촉은 다릅니다. 유방의 경우를 드셨는데, 그 유방의 천하통일의 시작이 파촉이었고, 지속적이고 상시적인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그로인해 생산력이 이미 상당히 향상된 지점입니다. 초한지 시대의 파촉과 삼국지 시대의 파촉은 상징성의 무게가 다릅니다.
09/01/13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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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에서 싸우기도 전 조조는 이미 세 번 패배하였습니다. 세 번 지고 들어가는 전쟁에서 역전승하기란 원래 불가능하지요.

첫째로 정치, 외교적 패배입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입니다. 이런 말도 있죠. 전쟁은 피를 흘리는 정치고 정치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정치 외교적 패배의 첫째 원인은 우선 조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조조는 유능한 인물이긴 하였으나 민심을 잡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매우 미흡한 인물이었죠. 이 점에서는 유비와 대조적이었습니다.

정치 요교적 패배의 둘째 원인은 대의명분에 있습니다. 이건 삼국지에 구구절절히 나오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적벽 대전에서 조조의 두번째 패배는 타이밍에서의 패배입니다. 즉 전쟁을 수행하는 시기에 있어서 시기적절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도대전의 승리로 화살을 남쪽으로 돌려야 하긴 했습니다만. 형주를 자연스레 습득한 후 바로 전쟁을 치른 것이 하나의 패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세상 당연히 형주를 얻은 기세와 관도전에서 승리한 군세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손권을 공격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지만, 수 년간 형주를 잘 통치하면서 손권을 장기적으로 압박하는 것이 어땠을까 합니다. 무엇이 됐던 안과 밖에서 동시에 무너뜨려야 합니다. 당시의 손권을 밖에서 압박할 수는 있어도 내적인 압박을 줄 수 있긴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조조가 안쪽에서 혼란스럽던 상태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오히려 조조였습니다.

스타로 치자면 한타 싸움에서 승리한 후 이걸 계속 본진까지 밀어야 하느냐 아니면 멀티먹고 안정화 가야하느냐의 타이밍에서의 판단 미스라고 볼 수 있죠. 한타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그렇다고 본진까지 밀어버릴 여력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 상황에서 본진까지 밀다가 본진 앞 '적벽'에서 털린것이죠.

세 번째는 국가 전체적 패배입니다. 전쟁은 국가 총력전입니다. 즉 단순히 군대와 군대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와 한 국가가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견주는 마라톤입니다. 이 점에서 이미 조조는 패배하였습니다. 이미 십수년간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관도전이 끝난지도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새로 얻은 지역마저 자신의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곳입니다. 즉 조조 영토라고 표시는 되었지만 조조 땅은 아닙니다. 때문에 조조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조의 위나라는 그 당시 영토는 넓었다 하더라도 터전은 빈약하였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둘이 힘을 합친다면 조조의 군세를 충분히 막아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동맹을 하고 조조와 대치하였으며 실제 역사에서도 커다란 승리로 나타났지요. 제갈량과 주유는 단순히 숫자의 강력함을 보여주던 조조의 핵심을 간파하고 대처하였던 그 시대 최고의 안목들입죠. 조조는 엄청난 물량으로 그리스를 압박하였다가 털려버린 크세르크세스2세가 생각나게 하는군요..
나이트해머
09/01/1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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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촉 오 삼국의 상황은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비교가 가능합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어찌되었든(고구려, 발해의 예외를 제하면) 남한지역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고, 역사의 핵심 사건도 이지역에서 일어났으며, 인구수도 거의 두배 이상입니다. 그럼, 북한은 남한의 지방정권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남북 분단의 정세가 결정났습니까. 지금이야 경제력과 외교 등에서 확실히 앞서니 결정났다 할 수 있지만,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만 해도 그건 아니다고 말할 수 있죠. 삼국의 정세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히려 지금 남북한 정세보다 차이가 적죠.
나이트해머
09/01/1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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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국력은 과연 어떠했을까, 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북, 중원을 다 확보했긴 합니다. 하지만, 207년까지는 오환족, 230~40년대까지는 선비족, 고구려와의 싸움 등으로 인해 유주, 병주는 촉, 오와 대치하는 전선과 같은 수준의 전선입니다. 사예지역도 강족이 심심찮게 털어가는 지역이죠. 여기에 군주의 자질 문제도 있습니다. 조예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낙양에도 궁을 짓고 허창의 궁도 보수하고 하느라고 국고가 그닥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신하들이 '위가 천하의 8할을 차지했다 해도 병역의 짐을 지지 않는 지역은 기주, 청주, 연주, 사예 뿐인데 그곳에서 나오는 여력을 쌓아두지 않고 모두 탕진하면 유사시를 어떻게 대비할 수 있겠습니까?'[왕랑전] 이라고 극간하는 사태가 빈발하는 상황이죠.

국력에서 나오는 군사력도 마찬가지. 국력이 강하니 물량도 많으리라 생각이 들 지 모르지만, 위 역시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고, 그에 따르는 물자를 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사마의는 죽을때까지 자신의 출혈을 감수해가며 촉, 오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조상전 등] 사마의의 상비군이 4만에 이르렀을 때도 너무 부담이 크다고 조정 신하들이 경비 부담을 반대하기도 합니다.[명제기] 제갈량 북벌, 오의 북벌 등에 대처하기 위해 한번에 10여만씩 군을 이동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죠.[장합전]
제갈량이 참 기적같은 일을 해낸 게 맞죠. 국력이 월등한 위도 상비군 4만을 준비하는 걸 버거워하고 한번에 10여만씩 군을 준비하고 움직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데 촉한은 상비군으로 12만을 준비하고, 제갈량 최후 북벌인 오장원 전때 10만을 오장원까지 기동시켰으니 말입니다. 나라가 피폐해졌으면 말을 안하겠지만, 오히려 나라가 부강했다는 말까지 있으니 정말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09/01/1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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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님// 제갈량은 뛰어는 군사는 아니었죠. 뛰어는 치세가였다 할 수 있겠네요. 손권의 장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려나요. 아무래도 코에이의 영향이었겠죠.

정문 삼국지라는 게임에서 보면 오히려 육손, 주유, 가후, 곽가가 제갈량보다 뛰어난 군사로 나옵니다. 대신 제갈량은 정치력 30이죠.(정문삼국지에서는 30이 최고입니다.)
물탄푹설
09/01/1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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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삼국지나 삼국지연의나 일단
과장이 너무 엄청심하다는걸 인지하셔야 됩니다.
진수의 삼국지가 정사라고 하지만
위에어는분이 쓴 글대로
중국쪽에서는 판타지급역사책으로 까지 간주하고 있는 분위기 라더군요
중국특유의 과장그리고 윤색이 저변에 깔려있는 책이다 이거죠
삼국지를 바탕으로 중국의 그당시 전후를 논하는건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낭만토스
09/01/1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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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화북을 잡아서 실질적 통일을 완수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당시 형주와 강남 강동땅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이죠.

용으로 대표되는 황허문명과 비교했을때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봉황으로 대표되는 화남문화는 나름대로 번성했던 곳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형주의 경우
제갈량이 이르길 "형주는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백만이며 온 중국의 교통중심지이다."라고 평했으며
주유 역시 "형주를 얻음으로 해서 주군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특히 양양을 중심으로 한 형북지역은 인구가 70만에 달했고 완은 한 때 중국 최고의 인구를 자랑했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무역도 굉장히 짭짤하며 (손씨가문이 초기에 빠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해상무역의 영향이 큽니다)
형주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익주의 전체와 맞먹었다고 합니다.

즉 강동지방은 화남문화의 중심지이며 형주는 비옥한 노른자위 땅입니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로 중원을 장악한 조조가
통일을 사실상 완수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형주와 강동지방은 그렇게 무시될 만한 곳이 아니죠.
戰國時代
09/01/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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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탄푹설님// 중국의 정사들은 그렇게 대놓고 까댈만큼 허접한 책들이 아닙니다.
사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있고 해서 100% 진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따라서 엄격한 사료비판이 따라야겠지만,
사마천의 사기 이후 정사들은 비교적(!) 사실 그대로를 쓰려고 노력한 결과물들입니다.
적어도 당시의 주변국가들(한국, 일본등)의 신화에 가까운 역사서들과 비교하면 두말할 필요조차 없죠.
정사들까지 과장이니 환타지니 하며 무시하고 씹어버리면 더 이상 역사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사가 거짓말이고 판타지라는 근거는 무엇인 지 되묻고 싶군요.
09/01/1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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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랴님// 공명이 장자포와 비교되기에는 그 이뤄놓은 업적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만...-_-; 한 명은 내정에만 힘을 쏟았고 다른 한명은 내정에 힘을 쏟다 훗날 남만평정군과 북벌군의 총사령관으로 군대까지 통솔했습니다.
라이시륜
09/01/1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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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해머님// 제가 말씀드린 한무제의 흉노 정벌과 적벽대전의 비교는 전쟁 주체에 전쟁이 갖는 의미에 관한 비교였습니다. 즉, 한나라에 흉노 정벌전쟁이 갖는 의미와 위에 적벽대전이 갖는 의미가 같았다는 이야기고, 중요성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적벽대전의 중요성이 구리산 전투가 유방의 한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한무제의 흉노 정벌 전쟁이 갖는 중요성의 정도와 비슷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방의 구리산 전투는 그야말로 국운을 결정지은 단 한번의 전투였습니다. 유방은 구리산의 전투까지 승기를 잡지 못했고, 장안 지역을 차지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항우에 비해 열세였죠. 게다가 이전까지의 전투도 유방이 손해본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리산의 전투가 없었다면 얼마간 더 싸우다가 유방이 패배하고 항우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겠죠. 하지만 구리산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중국 대륙은 유방의 손에 '떨어지게' 됩니다. 말 그대로 게임을 끝낸 전투가 구리산 전투입니다.

한무제의 흉노 정벌의 경우, 실패하면 국운이 쇠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봐도 흉노 정벌에 실패했다고 한나라가 바로 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패전 이후에 관리를 못했다거나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무제가 쓰러지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 등장해 수십년 후에 망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상황만 빼면 그 전쟁 한번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날 상황은 아니었죠.

적벽대전이 그렇다는 겁니다. 적벽에서 조조는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를 얻었습니다만, 대세에 영향을 미쳤다? 아니죠. 대세에 영향을 미쳤다라고 말하려면 손권이 그대로 북진해서 천하를 일통했어야죠. 적벽대전이 큰 영향을 끼쳐 조조의 천하통일을 막긴 했습니다만,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직간접적으로 조조의 뒤를 이은 서진이 천하를 통일합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이러한 맥락에서 관도대전이 구리산의 전투였고, 적벽대전은 한무제의 흉노 정벌이었다는 얘기지 손권이 오랑캐고 조조가 중국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구리산의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유방과 항우는 지리한 전투를 이어나갔고,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게임은 끝났죠. 그 전투가 관도대전이었다는 겁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로 천하통일이 늦춰지긴 했습니다만, 관도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는거죠.
창해일성소
09/01/1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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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탄푹설님// 진수의 삼국지 정사는 다른 중국의 역사서와 비교해도 과장이 굉장히 적습니다. 너무 사실만 적고 넘어가서 읽는 재미는 없습니다 -0-
창해일성소
09/01/1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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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랴님// 삼국을 통틀어서 제갈량과 비슷한 멀티 플레이어는 순욱과 노숙 둘밖에 없습니다. 주유나 육손은 내치에 관계한 바가 없고 곽가나 가후, 법정은 군주를 따라다니며 헌책하는 참모였을 분이죠. 장소같은 경우도 실권이 크다기 보단 손권에게 계속 간언하는 역할만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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