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일 아침, 커피도 한잔 못 마시고 시작된 회의에 정신이 혼미해지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이자하랑 정연신이랑 싸우면 누가 이기지?"
* 일종의 패러디이며, 상당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하와 연신이 누굴 말하는지 모르시는 분은 별 재미가 없을것이고, 광마회귀-시한부 천재가 살아남는 법을 읽는 중이신 분들은 다 읽고 보시는게 나을겁니다.
임무를 위해 항상 강호를 종횡하는 입황성 무인은 이리저리 들려오는 소문이 많기 마련이다. 그 많은 소문들 중 최근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은 단연 하오문주였다. 이 사문을 알 수 없는 사내는 어느날 갑자기 강호에 나타나 대나찰을 꺽고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더니, 패검회를 대파시키고 무림맹주와 어울려 남악녹림맹을 몰살시켜버렸다. 이후 제천맹에 쳐들어가 제천맹주와 대거리를 했다는 소문도 있고, 무림공적들을 때려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이래저래 화재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였다.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연신의 흥미를 끈 부분은 다른 쪽이였다. 이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하오문주의 행보는 확실한 일관성이 있었다. 손속이 과하다고 느껴지는 바는 있으나 대상은 언제나 흑도였고, 스스로를 일컬어 일하는 자들의 대장이라고 했다. 연신이 인식하는 강호의 왈패들은 언제나 본인 삶의 고단함을 민초들에게 떠넘기고, 그 민초들의 고혈로 호의호식 하는 식충이들이였다. 그런 면에서 하오문주의 행동은 민초의 삶을 살피고 왈패들을 징치하는 입황성과 닿은 부분이 분명 있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중에 일양현의 자하객잔에 들려서 하오문주를 보길 청하고 잠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곧 2층에서 내려온 흑의에 더벅머리를 한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앞에 앉더니 한마디를 뱉었다.
“나다”
분명히 들려오는 하오문주에 대한 소문의 대부분에는 미친놈이라는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예를들자면 이런 것이다. 민초들을 수탈하던 흑도 세력을 미친놈처럼 패죽이더라,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아녀자를 괴롭히면 미친놈처럼 달려와서 따귀를 올려붙인다, 도저히 일문의 문주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언행이 미친놈 같다 등등. 덕분에 연신은 내심 놀라지는 않았다. 그냥 보통 미친놈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할 뿐.
외모는 제법 사람 다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외모만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자하는 호감이 가는 행색은 아니였다. 사람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눈은 끊임없는 광기로 번들거리면서 대놓고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고, 뭐가 그리 심통이 난건지 뒤틀리고 튀어나온 입매는 뭔가 내뱉고 싶은 욕설이라도 있는지 들썩대고 있었다. 특히 번들거리는 저 눈빛은 조그마한 불씨라도 튀면 활활 타올라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화마에 휩싸이게 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몰골을 해서야 얼굴이 어떻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은 슬금슬금 이자하를 피해 뒷걸음질 칠 것이 뻔했다.
자색의 경지에 오르면서 더욱 고절해진 연신의 안법은 순식간에 하오문주를 해부하고 있었다. 몸태는 제법 단련된 몸이기는 했으나 특별한 법식을 지닌 외공의 흔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근육과 혈도의 탄력, 발달 정도를 볼 때 주로 쓰는 무기는 검,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공은 장법인 듯 하였다. 독특한 점이라면 무릇 강호의 장법은 직선의 형태를 띄는 경우가 많다. 거리의 짧음으로 인한 속도의 이득, 내공의 발출의 용이함 등을 생각할 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하의 몸은 후려치는 곡선의 장법을 가장 많이 사용함을 말하고 있었다. 유심히 살피자니 하오문주가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들어올려 곡선으로 후려쳐 얼굴, 특히 뺨을 타격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질 정도였다. 아마 이것이 하오문주가 가장 많이 사용해온 공격초일 듯 하였다.
여기까지 본 연신의 안법은 외부를 훑듯이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오문주의 몸 안에는 교룡이 아닌가 싶은 어마어마한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왠지 복숭아향이 느껴지는 듯한, 영성이 가득한 그 기운은 하오문주의 몸안에서 하오문주와 무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흡수하였는지 비슷한 기운이 하오문주에게서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아직 그 존재감은 괴력난신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였다. 수많은 신비를 해석하고 분석해온 연신이였지만, 이 엄청난 기운의 덩어리는 불가해한 것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하오문주의 내부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또 하나 연신을 놀라게 한 점은 본인 정도는 아니였으나 하오문주의 백회도 상당히 열려있다는 점이였다. 연신의 것처럼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는 아니였으나, 득도한 고승 혹은 상단전을 집중해서 수련하는 무공을 대성한 사람 정도로는 개방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연신은 백회의 개방으로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오성과 재주를 얻었지만 수명을 잃었고, 하오문주는 미후보다는 훨씬 나은 재주를 얻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제정신이 아닌 듯 하였다. 또 타고난 것도 아니고 수련으로 열린 것도 아닌 듯 거친 백회의 개방은 십전의 재능을 보여주는 본인과는 달리 하오문주는 어떤 부분에서는 천재 이상의 능력을 보일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흩날리는 모래 만큼이나 무가치할 것이였다.
연신은 비로소 하오문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엄청난 잠재력과 빼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지만, 예를 취할줄 모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불학무식한 자라는 말은 배우지 못하여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니, 군자의 도리로서 가르침을 내리면 또 익힐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연신이 늘 해오던 일이다.
“말을 다 못 배웠구나”
안그래도 불퉁하게 튀어나와 씹을 것도 없는데 질겅이듯 들썩들썩 거리던 자하의 입이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했다.
“넌 다 배웠냐? 다 배웠는데 말을 그따위로 해? 자색? 자색이면 뭐 어쩌라고. 너희 입황성에선 자색만 입으면 사람들이 다 굽신굽신 거리면서 빌빌 기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일양현에선 어림도 없다. 기껏해야 너처럼 허여멀건한 놈들이 자색장포 걸치고 거들먹거리면 보통 남색가라고 생각하는게 정상이지. 마침 나도 너처럼 얼굴만 멀끔한 새끼 하나 아는데, 걔가 유명한 색마거든. 너도 그 쪽으로 상당해 보이는데 어떠냐. 난 말을 못배웠다 치고 넌 색을 너무 심하게 배운거 아니냐? 딱 봐도 어디 지역에선 색마로 유명하게 생겼는데 아랫도리를 너무 잘 놀려서 자색인거 아니냐? 그러고보니 왜 하필 자색이지. 이거 무슨 줄임말 같잖아, 이 저열한 입황성 놈들. 너의 아랫도리 놀림이 입신의 경지에 들었으니 이 특별한 색깔의 장포를 하사하노라. 너는 앞으로 이 장포를 입고 강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너의 아랫도리 놀림을 강호동도들에게 배풀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지 이 색만 보면 사람들이 알아서 치마 고름을 풀지 않겠느냐. 뭐 이런 의미냐?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 너 같이 생긴 놈들이 밝히기까지 하니깐 도무지 강호에 멀쩡한 아녀자가 없는거 아니겠냐. 이 빌어먹을 놈들, 당장 그 장포 찢어버리고 입황성에 처박아서 못나오게 하던가 해야지, 저렇게 생겨서 자색 장포 걸치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니깐 40년 동안 한번도..”
내가공부를 익히는 자라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호흡이고 호흡을 거두는 순간까지 호흡을 관리하기 마련이라 당연히 민초들에 비해 긴 호흡을 자유 자재로 사용한다. 하지만 하오문주는 실로 놀랍게도 속둔술도 사용하지 않고 저 긴 말을 한 호흡에 해치웠다. 그 긴 호흡도 놀랍지만 아무리 욕이라 할지라도 머릿속을 거쳐 나오는 말인데 어찌 저리 면면부절 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할 뿐이였다. 게다가 그냥 내버려두면 일각이고 한시진이고 간에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연신은 자색 장포를 걸치고 왔다. 정가의 연신 개인으로 들린 자리가 아니라 입황성의 고귀한 자색으로 임한 자리라는 뜻. 자색이 가지는 강호에서의 위치, 그리고 입황성주의 직전제자라는 배분, 가장 중요한 연신이라는 사람의 군자된 됨됨이를 생각할 때 이런 폭언을 들을 이유도, 감내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첫 인상부터 보통 미친놈이 아님은 익히 알 수 있었고, 지고의 안법으로 살핀 광증의 원인도 추측할 수 있었기에 이해는 하지만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였다. 하오문주는 마침표라는게 뭔지 모른다는 듯 끼어들 틈도 없이 계속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초고수의 영역에 넉넉히 들어온 연신이 말 끊는게 어려울리는 없었다.
“시끄러.....”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어디 새파랗게 어린 놈이 말을 자르고 들어와? 너 내가 몇 살인줄 알아? 그러고보니 넌 몇 살이냐. 아직 약관도 안되지 않았어? 약관도 안된 애송이 놈이 재주 좀 잘 타고나서 무공도 금새 익히고 그 잘난 입황성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우습지 아주? 무공 이거 이렇게 하면 쉬운데, 이걸 못하나? 눈빛이나 근육 움직임, 기감을 날카롭게 세워서 보면 적의 공격이 다 보이는데 그걸 왜 못 피하지? 이러고 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겠냐. 저 미친 원숭이들, 금수만도 못한 것들, 다 내가 가르쳐줘야지 어쩌겠느냐.. 그러고 있었겠지. 교주보다 더 한 새끼.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본다는 면에서 교주랑 똑같은 새끼지만 교주는 그냥 무시하는거고 너 같은 놈들은 알량한 자기 만족을 위해서 내가 너희를 위한다는 듯 위에 서서 가르칠려고 들지. 너 같은 새끼들이 더 나뻐. 내가 평생을 너 같은 새끼들한테 쫓기고 두들겨맞고 살아온 점소이라서, 니 놈 속이 빤히 다 들여다 보인다, 이 새끼야. 그리고 니가 발붙이고 사는 강호가 바로 그 미친 원숭이들이 모여사는 세상이고, 내가 그 미친 원숭이들의 두목이다....”
연신이 정가동공을 익히고 내가공부에 입문한 이래, 연신의 백회는 언제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 영성에 힘입어 연신은 보기드문 공부를 익힐 수 있었고, 끝없이 나아가 마침내 자색의 세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백회가 명멸한다. 신기에 가까울 정도의 판단력과 영물에 가까운 감각을 보여주던 백회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연신은 본능에 가까운 감각으로 법륜을 한바퀴 돌렸고, 법륜의 영성에 힘입어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봐도 여전히 하오문주는 지독한 욕설을 끊임없이 내뱉고 있었다. 만천화우, 이건 혀로 펼치는 만천화우다. 다섯군데를 동시에 공격하고, 각각의 반박 논리를 떠올릴 때 즈음엔 이미 12개의 공격이 더 당도해 있다. 정신 건강을 위해 무시하려고 하면 이미 다음 공격이 또 도달해있고, 질문에 답을 하려고 하면 이미 다른 질문이 3개는 더 쌓여있다. 이 끝없는 폭우 같은 공격은 하나하나 받아쳐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고절한 호신강기로 아예 공격을 무시할 지경에 이르거나, 공격을 하는 본체를 무너뜨려야만 멈출 수 있다. 연신은 언제나 자기수양에 철저한 사람이였고, 스스로 군자라고 칭할 만큼 여느 고승에 못지 않은 겸손하고 강직한 정신을 단련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하오문주의 공격 하나하나는 도저히 무시하지 못할만큼 강렬했고,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혀다. 저 나불거리는 혀를 당장에 뽑아야한다. 연신의 눈에서 빛살이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