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옥에서 나온 줄 알았는데...
W사는 모두가 아는, 디아블로 풍 쿼터뷰 게임 ‘M’이 초대박을 치면서 성장한 중견기업이었다. 당시 여러 PC방에 가면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무슨 돌 하나 떨어지면 ‘띠링’ 소리가 나고 주인이 가서 주우면서 ‘아 계정비 벌었네’ 하던 그 게임. 크크크
그리고 그 당시에는 여러 프로젝트를 새로 발표했고, 그러다 본의 아니게 주목 아닌 주목을 받았던 곳이었다. 닌텐도에서 만든 ‘젤다의 전설’을 카피한 듯한 게임을 발표해 아주 좋은 소리를 듣고 있었던 와중이었다. 크크
이 회사는 입사하면서부터 당황스러웠던 회사였다.
우선 2차 면접 시작부터 당시의 내게는(그리고 그 이후의 내 기억속에서까지도) 좀 난감한 경험을 하게 해 주면서 연을 맺었다.
"공염불씨, 2차 면접 날, 꼭 시간보다 15분만 일찍 와서 저를 만나주세요. 꼭 그러셔야 합니다."
이 얘기는 1차 면접에 합격하고나서 피디에게 걸려온 전화에서 들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약속 시간 잘 지키는 편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말했지만. 읭? 그냥 좀 일찍와서 보고 들어가라고 하면 될 일이지 이렇게까지 간곡히 말할 이유가 있나 싶었었다.
그런데 당일 날, 15분 먼저 만난 피디가 한 말이 더 가관이었다.
"면접 장소에서 꼭 바른 자세를 유지해 주세요."
"네? 바른 자세요?"
"네. 다리를 꼬신다던가 팔짱을 끼신다던가, 뭐 턱을...아, 그럴 순 없겠구나. 아무튼 면접을 진행하는 자세를 보시거든요. 대표님이나 임원분들이. 그러니까 꼭 주의해 주세요."
뭐지, 이 찐 오버스러운 소리는.
물론 면접을 볼 때 자세, 그래. 중요하다.
그런데 그건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소양이 아닌가?
태도를 어지간히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게 면접관이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떨어뜨리겠지. 문제는 이걸 이렇게까지 강조한다고?
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뭐, 정말 그만큼 내가 뽑히길 간절히 원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실제로 피디가 '2차 면접에서 꽤 많이들 떨어져 나가니까 꼭 명심하시라' 라고까지 말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었...는데.
띠용.
면접 장소에 들어간 순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됐다.
왜냐고?
책상이 없었다.
무슨 책상?
면접자가 앉았을 때 (당연히 앞에 있을거라 생각하는) 책상.
넓은 대회의실에, 면접관들이 앉아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고.
거기에서 몇발자국 떨어진 벽 앞에. 의자 하나만 홀라당 놓여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대기업 면접 장소에서나 볼 법한 그런 분위기랄까?
문제는 게임 회사에서는 생소한 풍경이었다는 것.
다리 꼬지 말아라, 손가락 이상하게 만들거나, 자세를 뒤틀거나 하지 말아라. 뭐 이런 피디의 잔소리가 그제서야 머리 속에서 팍팍 울려 퍼졌다.
아마 살면서, 그 날이 제일 허리와 가슴을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었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들어오기 전 협의된 연봉을 인사팀에서 깎아서 기분이 상한 채로 들어온 것이 덤이었고. 크크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사협상에서 협의된 연봉을 입사 얼마 안 남긴 상태에서 깎으시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전 회사 퇴사가 결정되고 내 송별회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걸려온 전화였다. 얼척이 없어서 묻는 내게 W사 인사팀 직원 왈
"아, 저희가 인사 절차를 진행하는 팀과 재무 쪽 조정 팀이 따로 있어서...아무튼 저희가 복지가 이런 저런 게 있어서 공염불님께서 실질 수령하시는 금액적으로는 차이가 없을 겁니다."
이게 뭔 쌉소리? 복지를 연봉에 포함시킨다는 기적의 논리에, 난 잠시 입사를 취소 혹은 홀드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라도 전 회사에 더 남아있고 싶지 않은 마음과, W사와 같이 진행했던 다른 회사를 이미 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퇴양난. 결국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입사했을 때 가장 적응이 안 됐던 건 (그리고 퇴사때까지 제일 짜증났던 건) 바로 PC의 이원화였다. 즉, 업무 PC와 인터넷용 PC가 따로 있었던 것. 요즘 회사에서도 이런 곳들이 왕왕 있는 건 알고 있다. 문제는, 이 인터넷 PC의 성능.
당시 막 출시하고 북미에서 인기 몰이를 하고 있던 ‘롤’을 회사 사람들하고 재미있게 시작해 즐기고 있었다. 문제는 이 인터넷 PC가 사양이 거지 같아서 롤 한 번 돌리는 게 무진장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핑도 안 좋은데…정말 힘겹게 점심시간을 쪼개어 롤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크크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회사에 출근하고 적응을 하는 기간 동안 분위기를 파악해 보니
이곳은 참 독특한 구조를 가진 곳이었다.
우선, W사와 N사가 한 지붕 두 가족 구조로 함께 있는 곳이었다. 형식은 N사에 W사가 합병된 것이었는데, (가진 돈 까먹다가 돈 때려부운 대작 TPS '헉소리'가 망해서 넘어갔다는 정도만 알고 있음) 분위기는 좀 묘햇다. 대표도 공동 대표 체제였고. 아무튼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원래 W사 쪽인지, N사 쪽인지에 따라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사내 문화 자체가 다른 두 회사였기 때문에, 뭔가 같은 회사에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이 두 회사 같은 한 회사의 구조 아래, 여러 스튜디오끼리 물고 물리는 정치적 개싸움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한 달이었나 6주였나, 아무튼 정해진 기간 동안 개발한 것을 대회의실에서 프로젝트 별로 시연 및 발표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참관하는 사람들이 시연을 보고 평을 해서 대표에게 전달하는 행사(?)가 있다. 나도 처음에 참관을 했었는데, 사실 크게 관심이 없어서 평도 써 내지 않았다. 나 같은 일반 사원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런데 한 번은 우리 피디가 얼굴이 벌개져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이유가 시연에서 대판 깨져서 박살이 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즉, 피래미들에게만 중요하지 않을 뿐, 그 회의에 참석하는 윗선끼리는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여담으로 이런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프로젝트를 연달아 런칭하고 성공해서 이름을 날린 뒤, 자신의 회사를 차려 초대박을 친 사람이 바로 스타 개발자이자 PD출신인, 그리고 지금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양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흑진주사’(맞나? 크크)의 K대표이다.)
아무튼 회사는 이렇고...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우리 팀은 이 W사를 있게 해 준 게임인 'M'게임의 후속작 'M2' 프로젝트였다. 입사한 당시에 2년 정도 만들다가 뒤엎은(!) 상태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2년을 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컴퓨터 세팅을 하고 엔진을 깐 다음에 들어가 본 게임을 본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아, 쌔한데?
어색하게 뛰어다니는 캐릭터, 어정쩡한 몬스터와 빙다리 핫바지 같은 AI, 시스템과 UI는 서로가 서로에게 쉐도우 복싱을 시전 중이고 스킬은 단순한데 제대로 판정도 안되고. 그냥 단순히 음침할 뿐 아무런 특색도 없는 그래픽 풍, 2년 동안 뭘 만들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몇 종류 보이지도 않는 캐릭터와 몬스터.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는 스토리와 퀘스트, 얼척없는 레벨 디자인...
총체적 난국.
잘못 들어왔구나.
솔직하게 말해서, 입사 1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내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맞춰 머리 속을 지배하게 된 생각이 저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런 해야 하나? 입사하고 얼마 안 있다가 피디와 커피를 마시면서 물어봤을 때, 피디가 해맑게 웃으면서 한 말은.
"아, 내년 말 런칭 목표예요."
내년? 내후년이 아니라?
내가 입사한 게 가을이었으니, 고작 1년 뒤에 런칭한다고?
이 모냥인 게임을?
정말 입사하고 한 달이 안 됐을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퇴사를 안 했냐고?
이전 편에서 썼었던, 120명 권고사직의 전설, 기억하시는지?
그 여파 + 그즈음 이직 시즌이 겹치면서 공급이 수요를 넘어선 시장 상황이 가장 컸다. 솔직히 다른 곳에 넣진 않았지만, 이직을 하려는 기획자 지인들의 푸념이나 곡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지금 다른 곳을 구하는 게 쉽지 않겠구나.
돌이켜보면 그 때 런을 했었어야 했는데. 크흑.
왜냐하면, 게임 상태보다
스튜디오 인간들.
즉, 이제부터 같이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생활을 하며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동료님 놈들의 상태가 훨씬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