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이직을 앞두고 여행 뽐뿌가 와서 프랑스랑 독일 여행을 갔는데, 미술관은 별로 안땡겨서 좀 색다른 구경거리가 있을까 알아보니 의외로 기차, 자동차,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을 주제로 한 박물관들이 있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오래된 모델들을 구경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나름 공돌남으로써 로망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유럽하면 보통 중근세 건축물이나 미술 구경이 가장 유명한데, 유럽이 산업혁명이 시작된 곳이라 산업이나 과학기술 관련 문물을 구경하기도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동차 박물관 두 곳과 항공 박물관, 기차 박물관, 그리고 여객선 박물관 이렇게 다섯 곳의 방문기 겸 소개드려보고자 합니다.
독일 남서부의 중심도시인 슈투트가르트(Stuttgart)는 독일의 대표 자동차 회사 중 메르세데스-벤츠와 포르쉐 두 개의 본사가 있어서 독일 자동차의 본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각 회사 본사 근처에 자사 자동차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 위한 박물관이 있는데요.
원래는 둘 다 가보려고 했는데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보고나니 체력이 달려서 포르쉐 박물관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은 승용차, 경주용차, 화물차 등 자동차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고, 포르쉐 박물관은 슈퍼카가 많고 시승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어있다고 합니다.
유선형 건물형태가 독특한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은 건축물 자체도 근사하기로 유명합니다. 외부도 그렇지만 내부가 더 멋있더라구요.
중간중간 앉아서 쉴 수 있는 휴게공간도 많아서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고, 여러모로 회사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신경을 많이 썼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꼭대기에서 나선형으로 내려가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동차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초기의 마차를 흉내낸 자동차가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되기까지 변화과정을 관찰할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옛날 차들인데도 광을 얼마나 잘 냈는지, 구식 차인데도 타고 싶어지는 지 모르겠네요. 실제로 박물관 지하 기념품 샵 쪽에 가면
컬렉터스 에디션이라고 실제 그 시기 운행했던 중고차를 때를 싹 빼서 빈티지 차로 진짜로 팔고 있더라구요.
자동차 박물관에서 빠질 수 없는 경주용 차도 근사하게 전시되어 있고, 특히 승용차 뿐만 아니라 화물차, 버스, 앰뷸런스 같은 특수차량도 옛 형태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자동차 박물관에서 흔하지 않은 것들이라 이쪽 매니아분들은 좋은 볼거리이지 않나 싶네요.
그리고 니콜라스 케이지 등 유명 셀럽들이 탔던 차들도 전시되어 있었고, 여러모로 메르세데스-벤츠를 자랑하고 홍보할 목적인 곳이긴 하지만 구성이 깔끔하고 알차서 자동차에 크게 관심없던 저도 재미있게 구경했습니다. 박물관의 인지도에 비해 슈투트가르트라는 도시는 자동차 박물관 말고는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가기 번거롭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겠네요.
2. 뮐루즈 자동차 박물관(Cite de l'automobile)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역에서 스트라스부르 다음으로 큰 도시인 뮐루즈(Mulhouse)에도 큰 자동차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르노를 비롯해서 푸조, 시트로엔, 그리고 비싸기로 소문한 하이퍼카 브랜드인 부가티 등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프랑스 차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가티는 이름만 들어보고 이탈리아 브랜드인 줄 알았는데 창업자가 이탈리아 출신이여서 그런거고 프랑스 브랜드라고 하네요. 근데 모기업은 또 폭스바겐이라 정체성이 또 애매해지는 것 같네요 흐흐
박물관 건물이 상당히 거대하고 투박한데, 옛 섬유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이 여기에 자리잡게 된 데는 꽤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는데, 원래 이 공장의 주인이였던 슐룸프(Schlumpf) 형제는 엄청난 자동차 수집 매니아였다고 합니다. 1930년대부터 공장을 운영하면서 번 돈을 자동차 수집에 쏟아부었는데 이 공장 한 켠의 비밀공간에 보관하고 있었는데요.
1970년대에 섬유산업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사업이 어려워지니까 사장이였던 이 형제들이 공장문을 닫고 일방적으로 공장직원을 다 해고했는데,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직원들은 분노해서 공장으로 쳐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비밀의 자동차 수집공간의 정체가 들통났다고 하네요. (역시 파업의 나라 프랑스!)
노동자들 등골 빨아서 수집한 자동차들은 두들겨 맞아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했으나, 그 수집 규모가 엄청난 바람에 프랑스 정부가 그냥 폐기하기는 아까웠는지 '역사 기념물'로 지정해버렸고, 슐룸프 형제를 임금체불과 세금 체납으로 거의 반강제로 쫓아내버린 다음에 프랑스 국립 자동차 박물관 협회에서 공장과 자동차들을 통채로 매입해서 1982년부터 박물관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의 피 땀 눈물이 어린 박물관의 전시된 차들을 보며 잠시 묵념을...
뮐루즈 자동차 박물관은 자동차와 컨텐츠가 잘 조화된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과 달리, 넓은 공장 건물에 자동차들 다 때려박은 양으로 압도하는 컨셉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넓으면 박물관 안을 한 바퀴 도는 꼬마열차도 있습니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부가티의 대표 모델 베이론(Veyron)은 특별하게 모셔져 있네요. 저게 우리나라에서 27억원이였다고...
경주용 자동차 관은 19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서킷을 누볐던 차들이 있는데, 옛날 차들은 이게 경주용 차인가 싶을 정도로 생소하게 생겼습니다. 차가 아니라 마리오 카트 같네요.
뮐루즈 자동차 박물관과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 중에 하나만 간다고 하면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이 더 낫다고 생각되지만, 서로 전시하는 브랜드가 차이가 많이 나서 자동차 매니아라면 둘 다 가도되고 관심있는 차들 있는 곳을 선택해서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3. 뮐루즈 기차 박물관 (Cite du Train)
뮐루즈에는 자동차 박물관 말고도 프랑스 및 유럽의 대표 철도회사인 SNCF에서 운영하는 기차 박물관도 있습니다.
산업시대 증기기관부터 비교적 최근의 TGV까지 약 200년 역사에 걸친 기차와 철도 시스템 관련 전시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철도 차량기지 부지 일부에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실내에 들어가니 찐한 기름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래서인지 산뜻하게 꾸며진 자동차 박물관과는 다르게 정비소 같은 현장의 분위기가 많이 묻어납니다.
첫번째 전시관은 세트장 컨셉으로 전시가 되어있어서 당시 기차역 주변 시설이라든가 실내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대충만든 듯한 얼굴을 한 인형들이 눈길이 가는군요. 자동차와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는 기차가 요즘의 비행기처럼 1등석, 2등석, 3등석 이렇게 뚜렷하게 시설이나 서비스를 차등화해서 운영했던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 초 파리 지하철 열차도 직접 안에 들어가 구경해 볼 수 있었는데, 이런 레트로한 감성의 열차가 옛날에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요. 노선도를 보면 분명 현재의 파리 지하철과 같은 노선을 달렸던 열차더라구요. 플라스틱없이 철제와 나무 인테리어가 꼭 스팀펑크 세계관의 게임이나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모습입니다.
철도 매니아 분들 중에 열차 말고도 이런 철도 운행과 관련된 장비아 시설에 관심가지는 분들도 있던데, 옛날에 사용했던 분기기라든가, 운행제어패널 등 아날로그 시절의 기계들이 요즘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라 새롭습니다.
4. 툴루즈 항공 박물관 (Aeroscopia)
프랑스 남서부의 중심도시인 툴루즈(Toulouse)는 중세시대에는 순례길로 유명했지만, 현대에는 보잉과 쌍벽을 이루는 유럽 항공기 제작회사이자 방산기업인 에어버스(Airbus)의 본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툴루즈 블라냑 공항 근처에 에어버스 본사와 항공 박물관이 있어서 박물관 구경 및 본사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돌아보았습니다.
실내 전시관은 생각보다 아주 크지는 않은데, 항공기 전시물 말고도 항공기 역사, 공항에서 일하는 다양한 종사자들이 하는 일, 여객기가 뜨기까지의 절차 등 다양한 정보와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가려운 내용들을 속시원히 긁어주어서 유익했습니다.
툴루즈 항공 박물관의 하이라이트 볼거리는 바로 콩코드 여객기가 아닐까 합니다.
1970~80년대 당시에는 런던-뉴욕을 3시간대에 끊는 여객기로서는 경이로운 속도를 자랑했지만, 경제성이 너무 낮아서 결국에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려서 현재는 현대의 오버 테크놀러지의 상징으로 박물관 신세가 되어버렸네요.
실제로 보니 여객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얄상한게 전투기를 쭉 늘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에어버스 본사 투어의 마지막 코너로 수송기인 A400M 내부에 들어가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4발 프로펠러가 달린 뚱뚱한 모습이 인상적이였습니다. 공군나왔는데도 비행장에서 근무를 안했어서 비행기만 보면 그저 신기하네요.
나름 관광용으로 정리해놓아서 그렇지 사람도 짐짝처럼 옮기는 전형적인 수송기 내부 모습입니다. 옛날에 공군에서 정기공수 항공편 탔을 때 해먹같은 그물의자에 쭈그려 앉아갔던 기억이 나네요.
5. 오션 라이너 박물관 (Escal' Atlantic)
대양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을 뜻하는 오션 라이너는 여객항공 산업이 발전하기 전인 1950년대까지 대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여객 교통수단이였습니다. 많은 오션 라이너 중에서도 유럽과 미국을 연결하는 북대서양 횡단 오션 라이너가 가장 유명한데, 타이타닉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네요.
프랑스 서부 대서양 근처에 있는 낭트(Nantes) 인근에 있는 항구도시인 생 나제르(Saint Nazerre)에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던 잠수함 기지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직 남아있는데, 이 안에 오션 라이너 내부를 복원해놓은 박물관이 있어 100년 전 여객선 모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생 나제르는 별로 안 유명한데, 바로 옆 동네는 비싼 소금으로 유명한 게랑드(Guerande)로 꽤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맨 처음은 3등실 객실 복도를 지나는데, 보기만 해도 배멀미 날 것 같이 비좁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씼을 수 있는 세면대는 갖춰져 있군요. 별거 아닌 것 같은 3등석이지만 요금은 교사 한 달치 월급 수준이였다고 합니다. 2등석은 교수 등 중산층 이상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1등석은 기업가 등 부자들이 주로 이용했다고 하네요.
타이타닉 영화보면 배 안에 온갖 시설들이 다 들어가 있는게 거대한 단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도 배 안에 파티장은 물론이고 극장같은 대형공간, 그리고 병원, 미용실같은 생활위생시설도 갖추고 있다고 하고 영상자료들이 많이 있어서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희망과 애환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박물관 막바지에는 이런 복층 구조의 근사한 라운지가 나오는데 각종 음료와 칵테일을 팔고 있습니다.
괜히 아침부터 칵테일 한 잔 시켜서 여유로움을 즐기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극장으로 이동하여 오션 라이너의 흥망성쇠에 대한 영상을 감상합니다. 1940년대에 한 해 1백만명 이상 실어나르며 최절정을 달리다가 1950년대부터 여객항공산업이 발전하면서 드라마틱하게 승객을 빼앗겨서 불과 10여년 만에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해운업의 입장에서 보면 슬픈 현실을 오히려 무성영화 스타일로 익살스럽게 묘사하는 것이 아픔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같아 기억에 남습니다.
극장을 지나면 이제 출구로 가야하는데, 무려 구명보트에 탑승해서 출구로 나갑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을 몸소 표현하는 듯한 서양식 컨셉 장난인 것 같은데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빵 터졌네요 흐흐
단순히 실내를 구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게임이나 인터렉티브한 구경거리들이 많고 유머 코드가 곳곳에 있어서 생각보다 재미있게 즐길 수 있어서 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