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년에 PGR 첫 글로 '말레이시아에서 덴마크 남정네에게 연락처 따였던 이야기'를 썼는데, 혹시나 기억하시는 분 계실런지 모르겠네요. 원래는 '휴가'가 주제인 글쓰기 이벤트 때 쓰려고 했던 글이었는데 미적거리다 시기를 놓쳤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꼭 기간내에 글 써서 올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근데 사실 제일 좋았던 소재는(LCK 관련이니) 이미 써버렸고, 어떤 여행기를 쓰면 좋을까 고민됩니다.
코로나, 여행, 코로나에 여행... 그러고 보니 코로나 때문에 최근에 제일 아쉬웠던 거 하니까 생각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약간 특이한 컨셉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 년의 반대편에 위치한 두 개의 축제 이야기요.
'발푸르기스의 밤'.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 처음 이 단어를 들은 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라는 애니메이션에서였습니다. 아마도 피지알에도 저랑 비슷한 분들 많으실 걸로 생각됩니다.
이런 모습의 마녀죠. 아무튼 이 발푸르기스의 밤의 원전은 독일의 브로켄 산에서 마녀들이 모여서 벌이는 축제라고 합니다. 브로켄 산은 브로켄의 요괴라는 현상으로도 유명한데, 태양광이 구름이나 안개에 퍼져서 이렇게 그림자 주변에 무지개처럼 빛의 띠가 나타나는 대기광학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브로켄 산에서 마녀들이 연회를 벌인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브로켄 하면 또 이거죠.
마징가 Z의 브로켄 백작님. 아무튼 이 단어는 마도카 마기카를 다 보고 나서는 제 기억에서 잊혔습니다.
그리고 2016년. 어떻게 시간이 생겨서 전 2개월 가량의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독일쪽 여행 정보를 모으던 중 저는 실제로 '발프르기스의 밤'이라는 축제가 있다는걸 알게됩니다. 날짜도 마침 4월 30일. 제가 계획중인 여행기간 내였구요. 어떤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건 가봐야죠. 그래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제가 찾은 단서는 달랑 이 이미지 하나였습니다.
독일의 고슬라(Goslar)라는 지역에서 발푸르기스의 밤 행사를 연다는 포스터. 그 외에도 마녀 분장을 한 사람들이 있는 관련 사진은 몇 개 찾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당시에 독일 하노버 근처에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해 둔 상태였는데, 주인집 아저씨께도 여쭈어봐도 잘 모르시더라고요. 사실 우리도 다른 지방 지역축제 물어보면 뭘 알겠습니까.
뭐 일단 4월 30일에 저 고슬라에 가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 저는 일정을 거기에 맞춰 조정했습니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유럽에 들어가서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크게 상관은 없는 브란 성) 등을 둘러보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거쳐 독일 동쪽으로 들어오는 루트였는데 4월 30일에는 고슬라에 도착할 수 있도록요. 루마니아 여행도 예상 외의 일들이 계속 생겨서 기억에 남는데(K-POP 좋아하는 루마니아 여자애의 브쿠레슈티 가이드, 걔한테 소개받은 친구의 친구가 또 다시 브라소브 가이드. 브라소브 가이드해준 그 친구의 친구 집에 초대받아 놀러간 일 등등) 이건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해 보기로 하고요.
아무튼 저는 예정대로 4월 30일에 고슬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고슬라는 독일 북부 브로켄 산이 있는 하르츠 산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광업으로 막대한 부를 자랑한 적도 있지만 현재는 그냥 독일의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도시에 들어오는 순간 여기저기 보이는 마녀 장식물들을 보면서 '아 제대로 찾아왔구나'하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도시이지만 옛날에는 부유했던 덕인지, 저렇게 삐까뻔쩍한 기와로 덮인 멋들어진 집들이 많이 보입니다. 위층으로 갈수록 더 넓어지는 특이한 구조의 집들이 많은데, 옛날에 1층 넓이를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해서 그렇다네요.
독일 황제(kaiser)를 상징하는 독수리 장식도 보이고요.
금으로 된 똥을 싸는 조각상은 화폐 제조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여행 기간동안 하메른, 브레멘 등등 독일 여러 소도시를 방문했는데, 독일 여행에서 지역맥주 마시기는 절대 빠질 수 없죠. 이 지방 특산물인 고제 맥주는 맥주 순수령을 따르는 다른 독일 맥주들과는 달리 허브, 고수, 소금 등을 추가해서 독창적인 맛을 낸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첨가물 없는 다른 맥주가 더 스파이시하게 느껴질 정도로는 좀 맹숭맹숭한 느낌이었습니다.
마녀 분장을 한 사람들. 좀 퀄리티가 높다 싶은 분들은 레스토랑 직원들인 것 같더라고요. 관광객들을 위한 포토타임도 있습니다.
고슬라의 중심인 마르크트 광장(Marktplatz)에 위치한 카이저링 하우스(Kaiserringhaus)입니다. 매일 4회 시계탑에서 고슬라의 역사를 설명하는 인형극이 상영됩니다.
밤이 되면서 축제 분위기는 무르익어갑니다.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 분위기는 지역마다 다 다른듯한데(대학 도시로 유명한 하이델베르그에서는 분장 같은 건 없고 쥐불놀이 같은 걸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고슬라의 경우는 마녀 분장한 사람들이 술 마시고 노는 축제였습니다.
대단한 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이유로는 갈 리가 없었던 먼 이국의 소도시를 이미지 하나만 가지고 찾아가서 나름의 목적을 이룬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역사나 향토 정보를 모으기 좋아하는 다른 한국 분께서 가르쳐 주시길,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는 베르니게로데(Wernigerode)라는 곳에서 더 크게 열린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르츠 지방 어딜 가나 다 비슷비슷하긴 하지만요.
이 베르니게로데 성을 마녀 축제에 맞춰서 꾸미고 (이미지는 그냥 인터넷에서 찾은 것)
무려 석탄으로 가는 증기기관차로 브로켄산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쪽도 꼭 가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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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10월의 마지막 날로 공교롭게도 4월의 마지막 날인 발푸르기스의 밤과는 딱 반년 시간차가 납니다. 발푸르기스의 밤도 그렇지만 전 이런 가장 행사가 너무 좋더라고요. 왜일까요? 애니랑 게임 좋아하는 내추럴 본 오-따끄라서?
핼러윈의 경우는 2015 년 이태원 행사에 처음 가본 이후 기회만 된다면 매년 참석하는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학회 관련으로 서울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이태원에 숙소를 잡고 이렇게 디스아너드의 코르보 가면을 쓰고 갔었죠.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분장을 하고 모여있더군요. 너무 많아서 사람에 쓸려서 저절로 움직일 지경.
개인적으로 뽑은 이날의 베스트 모나리자입니다.
이태원에서의 핼러윈은 참 좋았습니다. 가면을 쓰고 다녀서 그런지 평소의 소심함도 좀 날아가는 것 같고, 저런 들썩들썩한 분위기 자체가 좋아요.
2016년 봄에는 바로 저 발푸르기스 밤 축제에 다녀왔고, 다시 반년이 흘러 핼러윈. 이번에 굳이 또 서울까지 가긴 좀 그렇지 않나 했는데, 주 활동 반경이 부산 경성대쪽인 친구가 그 주변에서도 할로윈때 사람들이 가장하고 모인다네요? 그래서 올해는 경대다! 하고 갔는데... 아 망했어요. 작년의 이태원과 비교하면 이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방은 확실히 이런 건 안 좋습니다.
2017년 핼러윈은 저렇게 날릴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 가면 제일 쩔게 할로윈을 즐길 수 있을까? 당연히 미국이 좋겠지만 미국은 너무나도 멀고 저의 짧고 나약한 휴가는 자비가 없습니다. 그러면 부산에서 가깝고도 이런 거 제일 잘할 거 같은 도시는?
도쿄빳다죠!
도쿄의 게임회사에 취직해서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핼러윈 전후로 시부야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을 하고 모이는 듯했습니다. 핼러윈 당일이 제일 피크라고는 하던데, 얼마 없는 휴가를 주말에 붙여서 가느라 당일에는 맞추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주말인 29일 토요일에 시부야로 갔습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뭐 어때요? 핼러윈 당일이 아니라도 시부야는 이렇게 쩌는데요!
이때는 도쿄에 사는 친구랑 만나 이런 LED 가면을 쓰고 갔습니다(역시나 복장은 대충대충)
시부야는 기대했던 만큼 좋았습니다. 다음에도 또 와야지 생각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9년. 도쿄에 사는 친구가 좋은 정보를 알아왔습니다. 주말에 도쿄 근교에 있는 가와사키에서 엄청난 규모로 핼러윈 퍼레이드를 한다는 소식이었죠. 역시나 이번에도 짧은 휴가로 핼러윈 당일의 시부야에는 맞추지 못했지만... 여기는 갈 수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질과 양. 어마어마합니다.
행진하다 루이지 복장을 한 꼬마를 보고는 "어이 루이지 찾고있었다고!!"라던 마리오.
2020년의 핼러윈은 토요일. 완벽합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몇 년만에 가장 이상적인 날짜가 나왔는데 하필 코로나. 코로나+여행 하니까 이 생각이 나서 글을 쓰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2021년 올해의 핼러윈은 일요일입니다. 월요일 하루만 휴가 내도 2박 3일로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꽤 좋은 위치. 올해 말에는 백신 접종이 완결돼서 여행이 가능해질까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지만 어서 빨리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