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괴물 사이의 이야기.
저는 괴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생물체들은 항상 신비한 역사와 교훈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괴물 중에서도 그중에서 사람과 말이 좀 통하는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죽었으나 원한이 남은 귀신일 수도 있고, 지적인 악마나 정령이거나, 아니면 빙의되거나 감염된 피해자일 수도 있죠.
사람 살가죽을 대신 뒤집어썼으나 그 안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들어있지 않은 존재들.
사람의 행복을 싫어하고, 온갖 나쁜 일 만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악의가 가득한 존재들.
이런 끔찍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왜 계속해서 만들어졌을까요?
루마니아의 비교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괴물들에 대해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기준이 되어주며 삶에 있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고 적었습니다.
마치 연극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처럼,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삶이 좋고 바람직한 삶인가, 스스로 물어보고 상담할 수 있는 선생님들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괴물들을 캐스팅하면서 악역으로만 쓰고 욕하는 것에 바빴지요.
이런 발상과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는 알라를 따르는 자도 있으나, 불신자도 있습니다. 신을 믿는 자는 올바른 일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앞으로 오직 지옥 불에 타오를 일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 쿠란 72장 14절~15절.
쿠란에서 불의 정령 지니들에게 신의 말을 전하자 정령들이 전부가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 답하는 장면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똑같지만요, 한 명의 절대신을 믿는 시대에도 이상하게 구석에는 귀신과 악마들이 가득했습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 사람에게 금지된 행위들을 저지르고 따라 하라고 꼬드기는 나쁜 녀석들 말이지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시는 웬디고 이야기네요.
웬디고는 북아메리카의 토착 존재로서,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털 괴물입니다.
형태에 대해서는 다양한 판본이 있습니다만, 얼어붙은 심장, 두꺼운 털가죽, 순록 해골바가지 등이 특징입니다.
눈보라 속에서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고 살아갈 희망을 잃는 순간, 웬디고가 그 사람을 찾아오게 되는데요.
모종의 거래를 하고서 추위와 내리는 눈을 치워주고 사람은 다시 자신이 있던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아 참, 가끔 웬디고를 그릴 때, 순록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형태로 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웬디고는 본래 사람이었던 존재이거든요.
이 괴물이 제시하는 거래는 인육을 먹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다른 사람의 사체를 먹게 만들지요.
그러면 웬디고에게 당한 사람은 점점 쇠약해지면서 결국은 사람 고기를 찾아나서는 똑같은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비극적인 이야기이죠. 추운 극지방에서 시체를 입에 대고 돌아온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괴물일 것입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괴물이 존재합니다. 창귀라고 하지요.
호랑이에게 잡아 뜯기는 것은 분명 아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저는 고양이에게만 물려봤지만. 그것도 정말 아프더군요.
창귀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간 대가로 평생 그 고통을 지니고 사후세계로 가지도 못한 원혼들입니다.
이들이 호랑이로부터 풀려나는 방법이 있긴 있습니다.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사람이 호랑이에게 죽게 하는 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의 원혼과 자신의 위치를 바꿔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무서운 점은 바로 창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을 먼저 호랑이에게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먼젓번 망자와 친한 사람일수록 물려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현대매체에서 창귀가 등장한 작품은 “호랑이형님” 밖에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고문기계에 들러붙어서 다음 희생양에게 쾌락을 선사해주길 바라는 존재로 타락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헬레이저”라는 공포시리즈가 있었는데요. 창귀로 비슷한 한국산 공포물을 만들면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흔하면서도 효과적인 공포가 아닙니까? 익숙하고 알고 있던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나의 주변에 돌아온다.
그러나 무엇인가 이상한 부분이 있고, 사실은 껍데기만 비슷할 뿐 주인님에게 나를 바치지 못해서 환장한 노예였고...
이처럼 사람괴물들의 이야기는 사람이라는 매개체가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모든 이야기는 봉인된 괴물을 풀어내는 오지랖 넓은 인간들로부터 시작되지요.
그래서 숲속이나 빙하 속에 있던 괴물들은 인간 사이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제시해놓은 다음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람의 무리가 괴물 앞에서 무너지는 이야기는
지금도 현대적인 좀비의 이야기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영화 “부산행”을 좀비를 잘 이해하고 만든 공포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좀비 영화를 맨주먹으로 풀어나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한국사회는 총기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오히려 총기를 독점한 군대로 대표되는 사회의 혼란 가운데,
사실 사회의 취약점은 이성 없는 좀비 따위가 아니라 영악하고 이기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었고,
다만 괴물은 그 사이에서 사태를 조금 더 악화시키는 것으로, 기존의 문제점들을 드러내 줍니다.
그래야 진정한 공포가 시작되지요. 괴물은 역할을 다 마치고는 사라집니다. 관객들은 현실로 돌아오죠.
그래서 어떤 공포작품은 괴물이 사라지면 허망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괴물작품은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내가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사실은 다른 형태의 사람괴물들이 가득한 곳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해주죠.
문학에서 이런 괴물들의 이야기를 깊게 다루고자 시도한 사람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한 명은 일본의 고이즈미 야쿠모, 그리고 한 명은 우크라이나의 니콜라이 고골이었지요.
고이즈미 야쿠모가 정리한 일본 괴담 속의 괴물들은 항상 사람의 명예욕을 타고 사람을 괴롭힙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사무라이는 귀신과 내기를 했다가 자신의 갓난아기를 칼로 난도질하게 되며,
중앙정부에서 내려온 퇴마사는 영달을 노리고 빙의된 귀신을 퇴치하려다가 자만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또는 잘못된 정치 때문에 가난에 찌들어 죽은 어머니가 아기를 메고 다니기도 하고요.
[고이즈미 야쿠모의 본명은 라프카디오 헌이었고, 그리스 태생의 아일랜드인이었습니다.]
실패로 얼룩진 유럽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두 번째 인생을 19세기 일본에서 찾았던 그는,
일본을 보고 귀신, 신, 악마, 천사,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공포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적어 남겼습니다.
그가 보기에 존재들은 결코 숲 속이나 자연 속에 박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름대로 언어로 소통했지요.
한편 19세기 우크라이나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이라는 작가가 “미르고로드”라는 단편집을 완성했습니다.
그 안에는 “비이”가 포함되어있었지요. 고골의 초기 작품들의 전형적인 전개를 보이는 작품입니다.
부패한 지주와 영주가 있는 우크라이나의 삭막한 농촌에 사악한 존재가 침입하고,
결국 공동체는 조금씩 괴물에게 침식되면서 뒤틀려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시작점은 지주들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동유럽에 흡혈귀 이야기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됩니다.
“비이”에 등장하는 마녀 역시, 지주의 딸이며, 아무도 그녀가 무덤에서 기어서 나와 시체의 피를 빨고 다녀도,
마을을 지배하는 그녀의 아버지는 입막음에만 급급하며,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 주인공이 퇴마사인들 무슨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갈기갈기 찢겨서 뼈도 못 추리는 것밖에는 없지요.
다른 단편 “끔찍한 복수”도 분명 코사크 유목민 사이의 두 핏줄 싸움이었던 것이, 영혼을 판 강령술사가 끼면서.
시체와 귀신들이 편을 갈라서 싸우고, 묘지 밑에서 시체들끼리 뒤엉켜 자란 거대한 썩은 괴물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즉 야쿠모와 고골의 괴물들은 단순한 초자연적인 허깨비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사회가 있으면 언젠가는 튀어나올 인간의 사악한 면모들이자, 자멸로 끝나는 죄악들이지요.
그래서 시골을 떠나고, 산업화 이후의 시대에 도달하더라도 사람괴물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골은 초기 작품 이후에는 계속해서 관료제와 도시의 삭막함을 비판하는 것에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중에서 초기 작품의 초현실주의와 후기의 사회 비판적인 인식이 만나는 작품이 있으니, “코”입니다.
한 말단 공무원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의 코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는 내용입니다.
도저히 사회적으로 체면이 서지 못할 것이니 자신이 승진도 못 할 것이라 곤혹해 하고 있었더니,
아니 저기 멀리에서 마차를 타고서는 이미 자신의 코가 자신보다 많이 승진해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너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못난 놈, 썩 꺼지지 못할까!”]
사실 계급장만 있으면 코가 혼자 돌아다녀도 한 마디도 못 하는 주인공이 이상하지 않은 요지경 세상이 지금이지요.
세상이 요지경인지 알려면 역시 코를 걸어 다니게 만들거나, 다른 괴물이 걸어 다니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최신 기술로 영화를 만드는 시기가 왔음에도 괴물들은 사람의 곁을 떠나질 못했습니다.
아니면 사람의 미련이 괴물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가요.
잭 니컬슨이 열연했던 영화 “울프 (늑대)”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오늘내일하는 위기에 처한 중년에게 늑대인간이 두 번째 기회를 준다면,]
아침에 정신이 들었을 때 주머니에 잘린 남의 손가락이 들어있는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또는 “도니 다코”를 보신 적이 있나요? 제가 “에반게리온”과 함께, ‘사춘기 세계종말 스릴러’라고 부르는 작품입니다.
혼란스럽고, 아픈 10대 청소년에게 ‘그렇게 우울하다면 죽는 김에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어때?’라고 묻지요.
[왜 그렇게 웃긴 토끼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어? / 너는 왜 그렇게 웃긴 사람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괴물이 보여주는 연약한 부위, 이미 세상에서 잘못되고 있던 부분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다른 괴물이 좀 더 교묘하고 사람 같은 형태를 가진 상태로 우리 옆에 있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아닌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라는 연극에 등장하는 이프레임 카봇 같은 등장인물이 바로 그런 경우이지요.
한 마리의 좀비와 같은 인물이지요. 그의 혈관에 흐르는 것은 바이러스도, 어떤 마법도 아닙니다.
[“나는 돌덩이. 신이 교회를 세울 든든한 반석이다.” 바로 가부장제와 자존심으로 살아있는 노쇠한 아버지입니다.]
19세기 농경사회의 70대 노인이지만, 20대의 아들을 보면서 항상 믿을 수 없는 한심한 놈이라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도저히 아들 꼴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일해야 하고 편히 쉬지도 못한다고 몰아붙이는 존재입니다.
아버지가 들인 새어머니에게 흑심을 품게 되면서 자존감을 찾고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서 달려든 아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술김에 양손으로 두들겨 패서 쓰러트리고, 집안은 포근해서 무섭다고 외양간에서 소 옆에서 자는 등,
인간성은 전부 늙어버리는 과정에서 까먹어버리고, 아버지로서의 강인함과 노동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증만이
신체를 받치고 있는 불쌍한 존재이지요. 결국은 농장에 홀로 남고 늙은 몸을 떨면서 다시 일을 하려 나갑니다만.
“어둠의 심연”에 등장하는 쿠르츠라는 등장인물의 경우에도 사람과 괴물 사이의 괴상한 존재로서 등장합니다.
콩고의 원주민들의 상아를 강탈하기 위해서 파견된 ‘상인’이었던 쿠르츠로부터 연락이 끊기고,
온갖 괴상한 일들이 그 지역에서 일어나자 벨기에령 콩고의 지배자들은 그가 원주민들과 한패가 된 줄 알았지만,
그를 직접 찾아내 보니 훨씬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 상태였지요. 언어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콩고에서,
백인 쿠르츠는 그 어떤 소통방법과 연결고리도 찾지 못하고 다만 무력과 폭력의 언어만을 깨달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총으로 쏴 죽이고, 자른 머리를 꼬챙이에 끼워 원주민들로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와 기존의 사회제도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폭력과 작위적인 독재 그 자체,
자연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자연 그 자체의 기본적인 사람 관계 사이의 법칙조차도 무시하는 쿠르츠에게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전율을 느끼고 어떻게든 그를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지요.
그가 사람이었던 존재는 맞습니다만, 과연 왕국을 세운 시점에서 그가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였을까요?
무더운 여름이 돌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공포 이야기들이 다시 무덤가에서 돌아오는 계절이지요.
그러나 귀신, 괴물, 뭐라고 불리던지 간에 이런 악역 존재들은 흔하디흔한 ‘극적인 악역’에 불과합니다.
막장 드라마와 괴물 이야기들은 사실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치를 떨고, 그들을 경멸하며, 나는 모범적이고 제정신인 존재인 것에 안도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오직 가장 극단적이고, 취약하며, 한심한 녀석들만이 형상화된 것이 괴물이라고 생각하면서요.
[넌 그게 괴물로 보였니?]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과 괴물 사이의 이야기들을 기억하십시오.
열심히 걸어갈수록 나의 앞을 가로막는 지하철의 존재들 가운데 사람을 찾아내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존재들 가운데 괴물을 찾아내십시오.
우리는 두 세계를 오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디 세상에 괴물이 가득하다고 보면서 살지 않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모두 사람이기를, 괴물은 다만 하나의 비유이기를...